우리의 이야기는 청계천 강줄기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에서의 첫 시험이다.
강의실의 풍경은 고등학교 시험기간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럭저럭 첫 시험을 치른 뒤, 다음강의실로 이동했다. 아직 앞반의 시험이 끝나지 않아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
모두들 요약정리노트를 들고 중얼거리는 복도의 풍경,
모두 다음시험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아예 쭈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처박고 외우는 아이에, 철퍼턱 자리를 잡고 앉은 아이. 그리고 모여서 서로 예상문제를 의논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난 다른 아이들의 말소리에 공부가 방해될 것 같아, 복도 맨 끝 벽에 등을 기대고 마지막으로 외운 것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본 것들이 꼭 시험에 나오는 법칙 때문인지, 시험 시작 10분 전에 공부한 것들이 가장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비록 바로 옆에 흡연실이 있어서 담배냄새가 간간이 흘러들어왔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기침을 몇 번 한 것 같다.
아니,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기침을 했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 동희야, 흡연실 문 닫아. "
누군가 흡연실로 고개를 들이밀고 조용히 말하는 걸 들었다.
그리고 담배냄새는 더 이상 새어 나오지 않았다.
흡연실 문 바로 앞에는 진철이가 프린트물을 들고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무심한 듯 차분한 모습으로.
어쩌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내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방식으로 날 감싸주고 있지 않았을까.
맨 처음, 영어시간. 단지 잘난 척하기 위하여 교수님께서 내게 한 질문을 가로채어서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당황해하는 걸 알고, 대신 대답해 준 게 아닐까.
개강파티 때 술자리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걸 들킨 것도, 우연히 내가 나가는 걸 들킨 게 아니라, 어쩌면 날 주시하고 있다가 따라 나와서 잡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보니 무의식 중에 겪은 여러 가지 장면들 속에 언제나 톰이 있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그렇게 진철이는 꼭 내 주위에서 맴돌았던 것 같다.
그렇게 첫날 시험이 끝났다.
주위에서 맴돌기만 하고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는 톰 때문에 신경이 쓰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가는 것만큼은 일등이던 나도, 괜스레 꾸물대며 천천히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진철이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집에 갈 때만큼은 짧은 대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도 죄책감이 들게도 했다.
하지만, 진철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학교를 나서는 순간까지, 진철이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남자아이들과 돌아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하루 만에 또 기대를 하고, 또 실망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마음을 묻고,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그 아이를 만나고, 또 아무런 말도 해보지 못하고,
같은 프레임 안에 있는듯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카페에서 잔잔하지만 경쾌한 재즈가 흘러나올 때처럼,
좋은 음악이 흐른다는 걸 알아챈 순간, 이미 끝나버려 아쉬운 여운이 느껴지는 그런 아이...
멜로디가 좋다는 걸 느낀다 해도, 금세 다른 리듬으로 바뀌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매력적인 재즈 같은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몇 번이나 내일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시험공부에나 집중하자며.
저런 녀석 때문에 천하의 윤지아가 휘둘릴 수 없다며.
온갖 위로를 나 자신에게 해대며, 그렇게 긴 한숨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방 안에서 내일 공부할 과목을 펴고 열심히 외우다가, 왠지 몸살기운이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다.
종우의 입대에, 톰 때문에도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게 일상이었고, 게다가 시험기간이라 며칠째 늦게까지 공부를 하느라 몸살이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게다가 나는 고등학교 때 피곤하면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돌발성 난청을 경험한 적 있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날.
열심히 수업을 듣던 중 갑자기 한쪽 귀가 정전되듯 나가버린 것이다. 조퇴 후 찾은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재발할 수 있다며, 공부도 하지 말라는 황당한 소리를 했었다. 실제 이 병을 앓았던 현직 아나운서가 아나운서직을 관두기까지 했다면서 말이다.
약으로 안되면 수술해야 한다는 청천벽력을 듣고 망연자실 집에 돌아와 약기운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있던 그날의 조용했던 집안의 공기.
모든 게 기억난다.
하루 만에 청력이 돌아와서 다행이었지만, 그 후 피로하면 이따금씩 어지러움과 함께 한쪽 귀가 다시 멀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고3 때 공부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제는 연애도 하지 말라고 하겠군’
과도하지 않을 만큼의 스트레스만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할까?
그 아이의 마음을 추측해 내는 것조차 나에게 과도한 스트레스가 된다면, 병의 재발은 물론이고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스트레스들로 힘들게 될지는 예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 아이와 나는 단지 가끔 몇 마디 나누는 정도인 동급생일 뿐이니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환상 속의 나일뿐이니 말이다.
그렇게 몸 상태의 아슬아슬함을 느꼈으나, 다행히도 첫 중간고사는 무사히 마쳤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경아는 밥을 먹으러 가자는 둥, 노래방을 가자는 둥, 신이 나서 여러 가지 제안을 했다.
어느 쪽도 별로 원치는 않아서, 그냥 집에 간다고 하려는데, 경아의 남자친구가 학교로 데리러 오기로 했다며 같이 동대문에 쇼핑을 하러 가자고 했다.
순간, 이 커플과 함께 뒷자리에서 차창밖이나 실컷 바라보며 바람이나 쐬고 오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 진철이와 한마디라도 나누고 집에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지, 한마디라도...
인사라도 하고 헤어진다면 좋을 텐데...
정말 단지 그 정도라면...
" 진철아, 남친이 차 끌고 와서 동대문 쇼핑 갈건대, 너 안 갈래? 지아도 같이 가기로 했어~ "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경아가 진철이에게 함께 놀러 가자고 제안을 하고 있었다.
역시 눈치도 없는 경아.
당연히 남자애들에게 끌려다니며 인기 좋은 톰인데, 시험 끝난 날 약속이 없을 리 있겠냐만은
굳이 가서 물어보는 걸 보니, 경아도 참 막무가내이다.
뭐, 이미 우리 반 아이들이 경아의 이러한 다짜고짜 태도를 잘 알고 있지만, 당연히 거절할 상대에게 "Are you join us?"를 날리다니.
참 재밌는 친구라 생각하고 빨리 가자며 경아를 보채러 경아와 진철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래, 잘됐다. 나 한국에 유명한 곳들 잘 몰라서, 돌아다녀 보고 싶었는데~ "
경아가 나에게 주는 두 번째 선물이었다.
역시, 사람은 포기하기보다 도전을 먼저 해야 하나보다. 당연히 약속이 있을 줄 알았던, 진철이가 흔쾌히 데이트 신청을 수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뜻은 동대문까지, 난 이 커플의 차 뒷자리에 같이 앉아서, 혼자의 환상 속에서 톰의 미소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동경의 대상과 함께 환상을 현실에서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 아이의 한마디를 다시 떠올리며 살아가야 했던 날들이 아니라, 그 아이와 나의 새로운 장면들로 오늘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행복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대한 뒤에 돌아올 상처가 무서웠고, 내 안의 오기와 가슴속의 벅차오름의 싸움은 그 와중에도 계속되고 있기에.
오늘의 외출은, 단지 친한 대학친구들과의 어느 오후와 다를 바 없다며 계속해서 나를 다스려야만 했다.
경아의 남자친구는 오후 6시나 돼야 우리를 데리러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 노래방 가서 놀면서 기다리자!~ "
오늘 경아가 제대로 놀기로 작정했나 보다.
나로서는 정말 고마웠다.
낮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진철이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시험이 끝나자 몰려오는 허전함과 군대에서 고생하고 있을 종우 생각에, 차라리 좀 소리를 지르고 오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교회 친구들과 종우와 다 함께 노래방을 갔던 때가 기억났다.
당시 한창이었던 엠씨더맥스의 '사랑의 시'를 부르던 종우의 모습에 처음 반했었는데...
미성의 목소리로 부르는 박효신의 ‘눈의 꽃’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그래서 종우는 나에게 '겨울'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찬란한 봄.
신입생의 생기와, 길 꽃들의 향기로움과, 풀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봄이다. 계절은 돌고 돌아 언젠간 다시 겨울이 돌아오겠지만, 일단 지금은 봄이다. 그리고 봄이 왔을 때 만끽해야 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지아야 이것 좀... "
진철이가 휴대폰과 까만 반지갑을 내게 내밀었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특별히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인지, 휴대폰과 지갑이 거추장스러웠나 보다.
진철이의 귀중품을 받아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가방 속에 넣었다.
그렇게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나는 이 아이에게 특별한 존재라도 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건 주로 남자친구가 여자친구한테 맡기는 거 아닌가?'
언제나 지갑과 휴대폰을 나에게 맡기고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종우가 또 생각났다.
이상하다. 진철이와 하루종일 같이 있게 되면, 너무 설레고 좋을 줄로만 알았는데, 진철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자꾸만 종우가 더 생각나고 그리워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쓸쓸한 기분으로 종우와 노래방을 갈 때마다 불렀던 발라드 몇 곡을 불렀다.
"너는 이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것 같아. 이 노래 부를 때가 제일 예뻐~"
서영은의 ‘내 안에 그대’를 부르며, 자꾸만 종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오늘 장소선택을 잘못한 것일까.
시험의 부담과 진철이와의 긴장 때문에, 잊고 있던 종우의 빈자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경아는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는지, 자리를 잠시 떴다.
"왜 노래하면서 자꾸 울려고 그래~ 내가 웃겨줄게~ "
계속해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진철이가 밝은 곡들을 불러 기분을 풀어주었다.
정말 웃기려고 저렇게 부르는 거겠지.
계속되는 음이탈에 피식 웃었다.
잠시 후 돌아온 경아는, 남자친구가 노래방 앞에 와 있다고 했다.
시험 때문에 지친, 종우의 빈자리에 지친 그리고 새로운 인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지친 나에게 괴로우면서도 달콤한 휴식 같은 드라이브가 될 것이다.
경아의 남자친구는 지난번에도 한번 본적 있었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인 자상한 오빠셨지만, 엄청난 나이차이 때문인지 오빠라기보단, 아저씨라고 불렀다. 약간 통통하고 고집스럽게 생긴,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로 이리저리 바쁘신 것 같았다.
둘은 마비노기에서 만나서 그런지, 만나면 게임처럼, 현실처럼 알콩달콩 사귀는 모습이 언제나 보기 좋았다. 눈치 없고 둔한 경아의 단점까지 커버해 주며 감싸주는 아저씨는 정말이지 경아에게는 완벽한 짝이었다.
정말 운명의 상대란 있는 것일까?
Love can touch us one time
사랑이 한 번 우리에게 닿으면
And last for a lifetime
끝까지 계속될 거예요
And never let go till we're gone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보내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곡으로 진철이에게 팝송 좀 불러보라고 했더니, 타이타닉 주제곡을 부르고 있다.
음이탈에 힘겹게 부르고 있지만, 노래방 화면 속 가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단 한 번의 인연으로 평생을 간직하고 살아갈 만큼 큰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인연은 정말 있는 걸까.
있다면, 나는 그 인연을 이미 만났을까, 아직 만나지 못했을까.
그런 인연이 오게 된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계산 없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동대문까지는 거의 1시간은 걸릴 것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 안에서 온갖 상상을 하며, 행복해하고 슬퍼했던 내 모습은 이제 과거이다.
오늘은 그 상상 속 주인공과 함께 한 공간에 있다.
밖은 제법 어두워져 흔들리는 차창밖의 풍경이 내 마음을 흔든다. 그렇게 조용히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내 안의 모든 감각을 현재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좁은 공간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으면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어색하다.
난 바보 같게도 차마 그 아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멍하니 창 밖의 수많은 불빛들만 바라보았다.
나란히 앉아 반대쪽 풍경만 응시하고 있는 우리는 고요함 속에 정신없이 이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리라.
문득 그 아이 쪽으로 노출되어 있는 나의 반대쪽 뺨이 달아오르진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차 안의 공기까지 어색한 기분이다.
가방을 열어, 엠피쓰리를 꺼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방을 뒤적이며 살짝 톰을 바라보니, 진철이는 아직 반대쪽 차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래방에서 나에게 불러주었던 임재범의 ‘너를 위해’의 가사가 자꾸만 떠올랐다가, 생각보다 노래를 못하는 톰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뒤척이는 나 때문이었을까.
톰은 고개를 돌려 내 손 위에 놓인 엠피쓰리를 바라보았다. 창쪽에서 몸을 돌려 내쪽으로 손을 내밀더니, 한쪽 이어폰을 가져다가 끼우며 같이 듣자고 했다.
평소 즐겨 듣던, 잔잔한 곡인 tamia의 officially missing you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차창밖으로 수많은 불빛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작은 움직임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에서 어색하게 나란히 앉아, 잔잔한 팝송을 함께 나눠 듣고 있으니 아까보다 배는 더 어색한 기분이었다.
“나 이거 좋아하는 곡인데, 가사 해석 좀 해줘 봐~ “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보려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잠깐만”
톰은 곡에 집중하는 듯 이어폰을 꽂은 한쪽귀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한 소절씩 말해 주었다.
And today I'm officially missing you
오늘 당신이 무척 보고 싶어요
Ooh Can't nobody do it like you
아무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어요
Said every little thing you do, hey, baby
당신이 말했던 모든 사소한 것들까지
Said it stays on my mind
여전히 제 마음에 남아있어요
그저 잔잔한 멜로디 때문에 좋아했던 곡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여 주는 말들은 마치 나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아직도 나에게 영화 같은 이 장면 때문에 난 팝송을 들을 때 마음속으로 해석을 하며 듣는 버릇이 생겼다. 영어가사 그대로가 전해주는 감정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
그 아이가 전해 준 그 속삭임처럼 음악은 지독한 향수 같다.
그 아이의 향기와 그 당시의 추억과, 그 시간의 공기들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음악.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시간 속 나를 소환해 낸다.
그래서 잔인하기도 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길을 걷다 쇼핑을 하다 우연히 타이미의 곡을 듣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한 음악에는 하나의 추억밖에 저장할 수 없는 걸까?
All I hear is raindrops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 밖에
Falling on the rooftop
들리지 않아요
Oh baby, tell me why'd you have to go
아픔이 계속되는데
Cause this pain I feel it won't go away
왜 가야만 했나요
And today I'm officially missing you
오늘 당신이 무척 그리워요
"우리는 상가에서 살 것 좀 사고 올 건데, 너네는 어떻게 할래?"
밤인데도 생기가 넘치는 동대문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여기저기 시끄럽고, 밝은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밤공기에 취해 여기저기 시선이 닿는 대로 바라보던 나는 경아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
"우린 청계천이나 좀 걸으면서 기다릴게" 그런 나를 대신해 진철이가 대답했다.
"그래 너네는 베이킹엔 관심이 없을 테니, 좀 오래 걸릴 거야. 사야 할 재료가 다 다른 가게에 분산되어 있거든"
그랬다. 경아는 쿠키를 구울 때 쓸 베이킹 재료들을 사러 이곳에 온 것이었다.
경아의 달콤한 취미가 나에게 이렇게 온 평생을 통틀어 가장 달콤했던 공기를 선사해 주었다.
경아네 커플과 헤어진 우리는 조용히 청계천으로 내려가 걷기 시작했다.
그곳은 청계천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청계천이 끝나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날의 우리에게 그곳은 찬란한 시작지점이었다.
그곳은 도로에서 한층 높이 정도 낮은 공간에 펼쳐진 도심 속의 운하와 같았다.
징검다리 대여섯 개만 뛰면 건널 수 있는 폭의 물줄기에, 깊지도 얕지도 않은 물속은 예쁜 자갈들과 물고기들이 훤히 비춰보였다. 물줄기의 양편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고, 그 긴 청계천의 구간마다 예쁜 미술품이 전시된 다리 밑 공간이라든지,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든지, 천을 향하여 배치된 계단(물로 들어가라는 뜻은 아니겠지만)이라든지 볼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난 인물 초점 사진을 찍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처럼, 그 아름다운 배경과 소리들을 블러처리하고, 흐릿한 배경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아이와 이 시간에 이 공간을 함께 걷는다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하여.
"나 사실 입학하고 초반에 정말 힘들었다"
진철이의 말에 나는 너무 의외라고 생각했다. 외국에서 자라 밝고 활발한 성격에, 언제나 그 주변엔 네다섯명의 친구들이 모여있고, 무리의 중심에서 행복하게 대화하던 모습의 그 아이가 힘들일이 뭐가 있겠는가.
"왜?" 난 고개를 살짝 진철이가 있는 방향으로 틀다가 시원 해 보이는 청계천 물줄기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난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잖아. 한국 대학에서의 문화가 익숙하지도 않고" 진철이는 조금 풀이 죽은 듯 말했다.
그런 진철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모르는 이 아이의 새로운 모습에 설레어 그만 나는 조금 경쾌한 듯 말했다.
"와, 그렇게 즐겁게 다니면서, 힘들었다는 건 전혀 몰랐네. 난 복학생으로 신입생사이에 끼어서 수업 듣는 거 이방인 같아서 정말 힘들었는데. 넌 항상 즐거워 보여서 부러웠거든"
나는 진철이와 정 반대의 성향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조용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나와 달리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 그 안에서 언제나 화제의 중심인 사람. 환하게 웃는 그 미소까지, 왠지 모르게 슬픈 느낌이 드는 내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사람. 그래서 전혀 친해질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 아니 가까이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화를 나눌수록 우리는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많이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아주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갭이 느껴지는 서로 다른 우주가 왜인지 자꾸만 비슷하게 겹쳐졌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만날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오늘을 위해 내가 재수를 하고, 실패를 하고, 다시 이 학교로 돌아온 것처럼. 오로시 이 아이 하나만을 만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이 짜여진 한 편의 소설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살던 아이인데, 지금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 청계천을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럽고 벅차 괜스레 마음이 저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는 어디쯤일까. 생각도 못하게 진철이와 마음속에 있던 깊은 걱정거리를 늘어놓다 보니, 한참을 내려온 것 같았다. 가방 속에 휴대폰은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었고, 엄마의 전화를 몇 번이나 무시했다.
처음이다. 이 시간에 이렇게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며 내 고집을 부려보는 것은.
그냥 지금 이 순간은 이 선선한 밤 공기와 물소리 섞인 사람들의 말소리와 그 속에 섞여 우리가 나눈 진지한 대화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엇, 경아 전화 아니야?"
진철이가 초록색 내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가져간 뒤 금방이었다. 휴대폰 진동을 느끼고 나에게 가방대신 휴대폰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정말 경아였다.
"너네들 어디 있어? 이제 가야지!"
새벽 2시였다. 주차된 곳까지 다시 돌아가야 한다. 너무 한참을 내려와 버려서 올라가려면 30분도 넘게 걸릴 거라고 말한 뒤 우리는 언제 다시 올라가냐며 투덜투덜 웃었다.
싫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날 집에 들어간 시간은 새벽 네시였다. 엄마는 나에게 실망했다며, 한참 연설을 하셨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 딸이 처음으로 자신의 말을 어기고 저지른 일탈이 딸 평생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장면으로 기억될 밤이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마도 이해해 주시겠지.
2019. 10.
나는 그날의 밤공기와, 선선했던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던 그 주변의 풀내음과 물비린내까지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다시는 그런 공기를 만나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근무시간까지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 동료들과 청계천을 산책하기로 했다. 회사 건물이 서울시청역 쪽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주변이나 둘러보자는 것이었다. 서울역, 명동, 서울시청, 그리고 청계천까지 이 동네에 많은 추억이 있었다. 1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난 그날의 그 공기내음을 맡아보려 노력한다.
조금 걷다 적당한 곳에 잠시 앉았다. 흐르는 물줄기를 멍하니 앉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나 쉽고 자주 오게 될 이 장소에, 아주 예전 너와의 시작이 있었던 그곳에, 지금 내가 앉아 있다고. 비록 너는 없지만, 그렇게 나는 아직 그 시작 위에 그대로 있다고.
그때의 밤공기대신 쨍한 햇빛 아래에서 그렇게 너를 또 한 번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