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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_ 새 학기

그 별빛은 아득한 미래의 나에게 와닿아, 찬란히 빛났다.

by 윤지아 Aug 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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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파티 이후 난 어느 정도 우리 반 여자 후배들과 수다를 떨 정도로 친해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선후배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지긴 했지만, 되도록이면 편하게 대하려고 무단 애를 썼다.

"너희들 후문에 있는 야우리라고 알아? 거기 밥튀김이 예술이지~ 작년에 자주 갔었거든"

'선배'라는 단어 뜻 그대로, 먼저 배운 이 학교 근처의 맛집들을 풀어놓으며 말이다.

사실 내세울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그렇게 경아와 반 여자후배들과 같이 밥을 먹고 학교 주변을 산책했다.

커다란 비행기가 놓인 잔디밭에는 아직 조금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삼삼 오오 앉아있었다.

"그런데 선배님, 캠프파이어할 때 어디 가셨던 거예요?"

동그란 얼굴형에 큰 눈, 앞머리가 귀여운 후배가 물었다. 우리 반 반대표였다.

"아 그때, 그냥 바람 쐬러 잠깐 근처 공원에 앉아있었는데, 얼마나 시끄러운지 어차피 행사 소리는 다 들리던데 뭐"


사실  MT만큼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았었다.

작년 MT의 기억은 좋지 않았다.

선배들의 술권유나 강압적인 극기훈련 같은 일정도 힘들긴 했지만, 무엇보다 그때 난 이 학교를 떠날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MT를 가게 되면 작년 그때처럼 또다시 흔들리게 될까 봐 올해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으면 결석처리 된다는 교수님의 말에 할 수 없이 참석했던 것이다.


"그런데 너 나 없어진 거 어떻게 알았어? 정신없어서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행사의 모든 초점은 06학번 신입생들에게 맞춰져 있던 터라, 2학년인 05학번들의 일정은 자유였다.

1학년이면서 05학번이었던 나는 행사에 참석을 하기에도 어색하고, 2학년들과 섞여 방에 남아 술자리를 준비하기도 어색했다.

경아와도 다른 조였고, 의외로 경아는 후배들과 잘 어울려 놀고 있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 산속에 위치한 수련원의 밤공기는 산책을 하기에는 입김이 조금은 나왔지만, 생각을 정리하기엔 오히려 좋았다.

수련원 건물에서 조금 걸어 내려오니, 야외 운동기구들이 놓여있는 공터가 나왔다. 

밤 10시 정도였던 것 같다. 

아무도 없었지만, 캠프파이어 행사소리가 크게 들려와 별로 무섭진 않았다.

운동기구에 엉덩이만 걸터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쏟아질 것 같다는 게 이런 광경을 보고 하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너무 거대해서, 오히려 가짜 같았다.

마치 일부러 지어낸 작은 돔 같은 그런 우주.

별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돔 안에,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작게 느껴졌지만, 그 반짝임이 정확히 나에게 도달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별은 수억만 년 전 빛났던 과거의 별일 것이다.

저 별은 미래의 누군가에게 닿을 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저렇게 찬란히 아름답게 빛을 내었던 걸까.

그 시차만큼 더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별빛들에 점점 더 빠져들어, 그렇게 한참 동안 고개를 들고 하늘만 바라보았더랬다.


"아, 그때 누가 선배님을 찾아서요 “

“응? 누가?”

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와 저 오리들 좀 봐!"

경아가 손가락으로 캠퍼스 안 연못에 있는 오리를 가리켰다.

"쟤네들 중 하나 로봇이라는데 진짜에요? 선배님?"

경아의 말에 모두 화제를 바꾸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반대표의 말이 맴돌았다.

'날 찾을 사람이 없는데 ‘

누군가 나를 찾고 있었다면, 혹시 그 공원에의 나를 발견했을까.

그때 다른 인기척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다. 모르겠다. 워낙 행사 소리가 크게 들려왔으니까.

그때 보았던 그 밤하늘이 떠올랐다.

그 수많은 별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내 머리 위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대부분의 수업은 모두 새 학기 커리큘럼에 맞춰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수업은 과의 특성에 맞게 항공무역, 여객운송, 비즈니스영어, 비즈니스일본어 등등으로 짜여 있었는데, 제일 싫어하는 시간은 역시 영어시간이었다. 특히 외국인 교수님이 직접 강의하시는 그 시간만큼은 정말 3시간이 지옥 같았다.

 영어 회화라면 한마디도 못하고 버벅거리는 나로서는 교수님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회화수업 첫날부터 망신당할 뻔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교수님은 출석부를 보시더니 내 이름을 불렀고, 뭐라 뭐라 질문하셨다. (아직도 난 그분이 뭐라고 하신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아, 무슨 소린지 이해도 못했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하지만 반에서 그래도 선배라는 사람이 질문을 받자마자 얼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망신인가.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지 머리가 하얘지고 있는 그 찰나,

갑자기 뒤에서 뭐라 뭐라 영어로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난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톰이 내 대신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톰과 교수님이 대체 무슨 대화를 한 건지 알 수 없다)

교수님은 캐나다 분이셨기에 발음이 부드러워서 그나마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편이었지만(그럼에도 나는 못 알아들었지만), 톰은 영국식 발음이어서 도무지 뭐라는지 더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난 이 상황을 대신 받아 쳐준 톰에게 정말 고맙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라 생각했다.

교수님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학생을 만나서 신나셨는지, 나에게 질문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신 채 톰과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계셨다.

 영국식 발음은 딱딱하면서도 절도 있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확실히 멋있었다.

나중에 회화를 배울 때에는 꼭 영국식 발음으로 배우리라 다짐하며 그렇게 난 그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

 

쉬는 시간에도 톰은 가장 시끄러운 아이였다.

언제나 모두에게 둘러싸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리드하는 아이.

항상 조용히 다음수업을 준비하거나, 한두 명의 친구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나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의 아이이기에 일부러 다가가서 말을 걸진 않았다

하지만 활발한 성격의 톰은 나와 경아에게까지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너네 우리 반에 유일한 05 선배라며? 나도 동갑이니 그냥 말 놓을게"

개강 파티 이후 제대로 대화를 해 본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를 불편해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쿨한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톰은 매일 우리에게 와서 말을 걸어줬고, 화제도 다양하고 흥미로웠다. 

톰이 우리에게 와서 이야기할 때면, 경아도 한껏 목소리톤을 높여 동조하고는 했다. 

같은 외국 파라 그런지 톰도 별다른 편견 없이 경아의 대화를 잘 받아주었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문화차이에 깜짝 놀란 마음을 숨겨야 할 때가 많았다. 

얘기 도중 갑자기 나에게 어깨동무를 한다거나 손을 잡으며 과한 제스처를 하곤 했다.

'친하지도 않은데 왜 이리 스킨십을… 역시 영국애라 다르네..'

그러나 웃으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행동했다. 

옆에 있는 경아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했기도 했고, 선배인 우리에게 아무 편견 없이 이렇게 다정하게 얘기해 주는 톰이 싫진 않았기 때문이다. 

유난을 떨면 토종한국 유교걸의 지나친 오버로 보일게 분명했다.

 

 그렇게 톰은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 기웃거리며 여기저기 온갖 참견은 다 하고 다녔고, 06 여자아이들은 톰의 이름인 진철오빠라고 부르기보단, 런던오빠라고 부르며, 화젯거리엔 언제나 등장하였다.

 주로 런던오빠가 어제 술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데 웃기더라라던가, 

런던오빠가 어제 누구랑 당구장을 갔는데 어쩠다더라.. 등등.. 

벌써 반 친구들과 꽤 친해졌는지, 방과 후 자주 놀러 다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난 '학교-집-학교-집'이 생활인 만큼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지만, 한마디 보태었다.

"아 근데 걔 너무 뜬금없이 스킨십하지 않니? 여기가 아직 런던인 줄 아나 봐. 문화가 너무 달라서 당황스럽지 않아?"

난 그렇게 여자아이들과 '런던오빠' 험담하기에 끼어들었고, 당연한 공감을 예상했다.

그런데, 06 여자아이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약간의 정적도 흘렀다.

"엇? 선배님, 런던오빠가 스킨십하면서 얘기한 적 한 번도 없었는데요."

 난 순간 당황했다.

 적당한 말로 얼버무리며 상황을 넘겼지만, 하루종일 우리 반 여자아이들의 말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다른 아이들과는 그렇게 놀러 다니면서도 스킨십을 안 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나도 모르게 톰의 행동을 관찰하게 되었다.

정말 그랬다.

톰은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스킨십은커녕, 말도 잘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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