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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_ 시험기간

그 짧은 순간, 마법처럼 사랑에 빠져버렸다.

by 윤지아 Aug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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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인천, 학교도 인천에 있었지만 등교는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인천은 신기한 게 서울까지도 한 시간 반 걸리고, 제주도까지도 한 시간 반 걸리고, 같은 인천끼리도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참 광활한 도시다.

심지어 도시 한복판에 갈매기가 자주 출몰되기도 한다. 

언제나 바다를 볼 수 있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축복이다.


사실 학교까지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면, 40분 안에는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내겐 내려서 갈아타는 과정이 영 성가셨다.

학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는 온 인천시내를 다 누비고 다니며 뱅글뱅글 돌다가 정확히 70분이나 걸려 학교 정문 앞에 날 내려주었다.

허리도, 엉덩이도 아프고 지겹기도 했다.

하지만, 톰의 진심을 헤아려 보며, 온갖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등굣길은 한 시간도 금방이었다.


난 비 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적 좋아했던 빨강머리 앤의 e자 붙은 앤 셜리처럼, 낭만적인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버릇의 시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앤이 벚나무에 붙여준 이름인 ‘봄의 여왕’이나 ‘빛나는 호수’ 같은 자연에 대한 감사에서 나오는 상상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한두 줄씩 생각이 띄워져 있고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던가 하는 SF로맨스 같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곤 했다.

분명한 것은 행복한 상상만 했다는 것이다.

행복한 이야기들을 만들고, 그 속에 나를 집어넣고 나면 한 시간은 10분처럼 지나가버린다.


그렇게 상상하기 좋아하는 나에게 톰은 미지의 세계에서 온 흥미로운 상상의 소재였다.

아주 작은 에피소드라 할지라도 내 머릿속에선 소설책 한 권 분량의 전개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반 다른 여자아이들에겐 전혀 스킨십을 하지 않고, 말도 잘 걸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부터, 어쩌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된 것일까.

그렇게 혼자 피식 웃으며, 차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아무렴 어떤가.

봄날의 따스한 바람과 바닷가 근처를 지나가는 버스가 주는 바다향은 새로운 사랑의 상상을 불어넣어 주기 충분했고,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이렇게 온갖 상상을 다 하며, 설레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톰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양상을 보였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내 옆에 붙어서 수다를 떨거나 수업을 같이 듣는가 하면, 어떤 날은 며칠 연속으로 한 번도 말을 안 걸어 주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에게 언제나 둘러싸여 있는 톰이 내게 관심을 가져주기엔 너무 바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그 아이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하루는 나도 모르게 힘이 없고, 괜히 풀이 죽어있곤 했다.

도대체 난 무얼 기대한 걸까.

단순한 호기심은 점점 커져 상상으로 펼쳐지고, 상상을 현실로 착각하다가, 정신을 차린 순간 갑자기 절망하는 내 모습.

얼마나 우스운가.

너무 몰입해 버린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점점 자라 호감으로 착각해 버리고는 이내 톰의 친절을 당연하게 여겨버렸다.

‘아니 내가 언제부터 쟤한테 무슨 기대를 했다고’

생각해 보니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다.

단지, 아무런 편견 없이 편하게 나와 경아에게 다가와줬다고 해서, 언제나 먼저 다가와주길 바란다는 건 지나친 기대 아닌가.


하지만, 그다음 날 등굣길도 난, 갈아타는 버스를 보내고, 나만의 상상버스를 탔다. 한 시간 동안 혼자 멍하니 한숨지었고, 웃었고, 다시 한숨지었다.

왜인지 모를 이 허망함은 내 상상이 만들어낸 가짜 마음일 것이다.


어느 날 우리 반 여자아이들은 나에게 요새 살이 왜 이리 빠졌냐며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다.

난 그때 알 수 있었다.

재수생활을 하느라 쪘던 살이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하느라 자연스레 빠지고 있었다는 걸.

정신적인 괴로움이 나에겐 육체적 운동보다 더 다이어트 효과가 뛰어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쨌든, 재수시절 때 5킬로 쪘던걸, 다시 원래대로 원상 복귀한 것뿐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 괴로운 감정은 짝사랑일까.’

말도 안 된다. 나에겐 이미 나에게만 헌신적인 최고로 자상한 남자친구가 있다.

그리고 내가 톰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특별한 계기 같은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린 방과 후 같이 시간을 보내 본 적도 없는 그저 같은 반 동급생일 뿐이다.

그저 이 마음은 나의 과도한 상상이 불러온 나만의 착각일 것이다.




그 무렵 종우는 군대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종우에게 난 언제나 이런 말을 했었다.

난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할 필요 없다고.

난 남자친구를 바꿔가며 쉽게 사귀고 헤어지는 그런 여자들을 가장 경멸한다고.

절대 난 그런 여자들과 다르다며, 열변을 토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종우는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선언과도 같은 나의 긴 연설을 들어주기만 할 뿐.

난 그렇게 군대 가는 종우를 안심시켰다기 보단, 나만의 오기만 표출했던 게 틀림없었다.

단지, 내 안의 오기. 난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어쩌면 잠시나마 톰에게 느낀 알 수 없는 감정을 이렇게라도 강하게 부정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난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자꾸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나 종우의 입대를 앞두어 힘든 가운데서도 학교만 가면 자연스레 톰이 신경 쓰였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 수업준비를 하느라 의자 밑 공간에서 책을 꺼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 틈인지 내 앞자리에 와서 앉은 톰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날은 분홍 카라 티를 입고 왔는데, 반테 안경에 깔끔하게 내린 머리가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을 닮은 모습이었다.

그 웃음 하나로 지금까지의 서운함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이렇게나 쉽고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난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진 않았지만, 이 웃음이라면 첫눈에 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웃음 진 얼굴 때문에 영원히 이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 반하는 슬로우 걸린 장면처럼, 그렇게 그 아이의 웃음 띈 그 얼굴이 한동안 잔상처럼 눈앞에 지속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난 사랑에 빠진 것이다.

너무나 마법 같고, 거짓말 같게도.


“스카이네. 셀카 잘 나와? 줘봐~”

톰은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책상 위에 놓인 내 휴대폰을 들고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장면은 그렇게 내 휴대폰에 박제되었다.

톰은 휴대폰을 다시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얘기인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앞엔 아까와는 다른 톰이 앉아 있다.

이제부터는 이 아이의 표정과 모습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경아가 왔다.


경아는 어제 온라인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웠다며, 오늘 학교에 늦은 이유를 설명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마비노기라는 온라인 게임을 즐겨하는데, 그곳에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다고. 남자친구와 실제로 만나기가 힘든 상황이라 어제는 밤새 에린(게임 속 세상)의 숲 속에서 데이트를 했다나?

엉뚱하지만 꽤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 그 게임 정식 오픈한 지 얼마 안 됐다며? 나도 해볼래!”

톰은 남자아이인 만큼 게임에 관심이 많았다.

자기도 같이 하고 싶다며, 경아와 함께 방과 후에 피시방을 가자고 했다.

“좋아! 내가 뉴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겠어!! 지아야 너도 갈 거지?”

얼떨결에 나까지 합류하게 되었다.


이 웬일인가?

이렇게나 우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경아는 나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준 것이다.

경아 덕분에 그토록 같이 있고 싶었던 톰과 단둘이는 아니더라도 방과 후를 약속했다는 게 나에게는 선물과도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경아와 나와 톰은 셋이 쪼르르 피시방에 앉아서, 경아가 시키는 대로 계정을 만들고 아이디를 생성하고 어리바리 뛰어다녔다.

난생처음 3D RPG게임을 해봐서 그런지 너무 어지러웠다.

특히 전투 게임을 못하는 나로서는, 움직이기만 하면 몬스터에게 맞아 죽어서 쓰러져있었다.

그렇게 게임도 제대로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는데, 톰의 캐릭터가 날 계속 쫓아다니면서 살려주었다.

그리고는 PC방 칸막이 옆에서 내 쪽으로 고개만 살며시 넘어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아야 넌 내가 지켜줄게. 기다려."

현실과 상상과 이젠 게임에서까지 나를 헷갈리게 만들다니.

저 말의 범위는 대체 어디까지인 것일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아이가 정말로 날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게임이 이렇게나 달콤한 데이트가 될 수도 있구나. 혼자 착각하며 괴로워했던 시간들이 그 한마디에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우린 학교에서 만나면 공통 관심사인 게임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같이 수업도 듣고 밥도 먹으며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톰은 하루 세끼를 먹는 적이 거의 없었다.

학교는 언제나 굶고 왔고, 나만 보면 배고프다고 졸라서 매점에서 먹을거리를 사다 줘야 할 때도 많았다. 

언제나 듬직하고 묵묵하게 내가 필요한 건 다 해주는 종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내가 엄마처럼 챙겨주는 느낌이었지만, 이런 관계가 싫진 않았다.

이렇게, 톰과 나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종우의 입대 날자는 다가왔다.

 

종우가 입대하기 하루 전날.

우린 한강 고수부지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원효대교의 야경을 바라보며, 종우는 끼고 있던 커플링을 빼서 내 목걸이에 끼워서 걸어주었다.

난 손에 끼고 있는 커플링도, 목에 걸고 있는 너의 커플링도 언제나 하고 다니겠다고 약속했고, 종우의 짧게 자른 머리를 보고야 앞으로 2년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종우는 입대 날 배웅 나오지 말라고 했다.

자기 부모님도 오라고 하기 싫다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보기 싫다고 했다.

결국, 종우의 입대날. 난 정말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사실, 곧 시험기간이었고, 수업이 중요하기도 했다.

종우가 오라고 했어도, 난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사랑이 확고하다고 큰소리쳐 놓고는 나의 일상을 우선으로 삼는 이 모습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종우의 부모님을 통하여 전해받은, 잘 다녀오겠단 통화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내 휴대폰에 종우와의 문자는 계속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실제로 닥치자, 3년 내내 한결같이 내 옆에 있어주었던, 언제나 내가 연락하면 받아주었던 그 종우가 곁에 없단 생각에 엄청난 상실감이 밀려왔다.

마지막 통화조차 난 학교 도서관 앞 뜰에서 받았다.

날 그렇게 배려해 주고 아껴주었던 종우는 끝까지 내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난 내 시험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미워졌다.

그렇게 도서관 앞 뜰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왜 이런 심각한 상황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는지 당황스러울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서 있었을까.

누군가 날 불렀다. 톰이었다.

톰은 담배를 피우러 잠시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가, 날 발견하고는 부른 것이다.

"아, 공부는 잘 되어가? 너 공부도 잘 안 하고 놀기만 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도서관에를 왔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마주침이라 약간은 놀랐지만, 자연스럽고, 장난스럽게 톰에게 말했다.

매일 놀기만 하는 톰이었기에, 언제나처럼 우리 반 남자아이들과 당구장에나 갔으려니 생각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내 앞에 나타나다니.

그러나, 웬일인지 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내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난 거짓말하다 들킨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얘가 왜 이러지... 내 통화내용을 들었나...? '

하지만, 내 눈은 울었던 흔적도 없었고,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들키지 않을 자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톰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봤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 내 마음을 다 읽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방금 그 눈으로 뭔가를 말한 것 같았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마법같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다 이야기한 것 같았다.

"들어가자. 내일 시험이잖아. "

톰이 먼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웬일이야. 네 입에서 시험이라고 공부하자는 말이 다 나오고? "

자연스럽게 농담을 하며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분명 난 느꼈다.

이 아이가 눈빛으로 전한 그 마음을.

 

도서관에 들어가는 문 앞에서 갑자기 톰은 담배한대를 피우겠다고 했다. 

약간은 씁쓸한 표정으로 나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오지 않는 쪽에 서서, 난 톰을 기다렸다.

멍하니 도서관 앞 뜰을 바라보니, 마지막 통화에서의 종우 목소리가 떠올랐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사랑해..."

지금쯤은 들어갔을까.

종우네 부모님께 다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정말 이젠 2년 동안 볼 수 없는 건가.

난 목걸이를 풀어, 종우의 커플링을 손에 쥐고 바라보았다.

미안하고, 미안했다.

종우의 일생에 중요한 사건보다 내 시험이 더 중요하고, 내 새로운 작은 감정들을 더 중요시 여겼다는 생각에 한없이 미안했다.

 

그 순간, 톰은 내 손에 쥐어진 반지를 가로채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는 언제 내 뒤로 온 건지.

그리고 지금 이런 행동은 화를 내야 하는 건가.

분명 화를 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워 말문이 막혀버렸다.

"들어가자. 그리고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내 옆에 앉아있어. 다른 생각 안 들게 니 옆에 있어줄게. 힘들면 말해."

태연히 말하는 그 아이의 그 말은 분명 위로의 의미였으나, 나에게는 자책이었고 배신이었을 것이다.

종우의 반지를 빼앗아갔는데.

영원히 지키겠다고 한, 영원히 내 목에 걸고 있겠다고 약속한 반지를 입대한 지 단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에게 빼앗겼는데.

난 화를 낼 수 없었다.

난 다른 여자와 다르다며. 강하게 오기만 부렸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든 그 상황에 닥치기 전엔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외로움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새로 내밀어온 손을, 그 눈빛을 외면해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도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그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걸 깨닫는 순간, 과거의 내 말들은 자만이었고, 오기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 들어와 현실을 다잡는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내 일상을 지켜주었던 종우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내일 있을 시험 역시 학점 관리를 위해서는 절대 망치면 안 되니까.

종우의 반지가 걸려있지 않은 내 목걸이의 가벼움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칸막이너머 옆자리 톰을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다. 그저 나에게 빼앗아간 반지를 지갑 위에 올려놓고는, 내일 볼 시험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난 그 아이의 흔들림 없는  그 자세에서 분명한 무엇인가를 느꼈다.

눈빛만으로 느꼈던, 그 메시지를 이젠 확실히 전달받은 것 같았다.

들켜서는 안 되는,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알아주길 바라는 그 메시지를

톰과 나는 대화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통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그렇게 대학에서의 첫 중간고사기간이 시작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는 진철이 옆자리에 앉아서, 그리고 집에 와서도 그 아이의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떨리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학교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도, 머리로는 공부를 해야 한다며 프린트물을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았으나, 시선은 자꾸만 차창밖을 향했다.

흐르는 풍경을 따라 스치는 생각들.

몽롱하게 형태 없는 이상한 기분.

아플 때 약을 먹고 잠깐 괜찮은가 싶은 딱 그 느낌이다.

아픔이 전반적으로 깔려있지만, 약기운과 같은 무언가 더 강한 기운이 내 몸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이러한 기운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여러 가지 기억들과 추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더욱 혼란스럽고 어지러워졌지만, 나지막하게 아른거리는 환상일지라도 이 행복한 상상을 붙잡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프고 싶지 않았다.

3년의 연애와 추억들이 잠시 멈춰졌다.

마법 같은 그 아이의 웃음에 그 아이와 나눈 단 몇 마디를 붙잡고 계속 되뇌었다.

어제의 일도 오늘의 일인 것처럼. 어제의 그 웃음도 오늘 보았던 것처럼.

머릿속을 지배하는 내 안의 오기와,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찬 가슴속 설렘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싸웠다.

어느 한쪽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모순된 양상이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고 있었으며, 사랑이 아닐 거라 의심했으나 점차 확신하고 있었다.

모순된 머리와 가슴은 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나에게 다시 되물음으로 돌아왔다.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손에 든 프린트물은 한자도 읽지 못하고, 학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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