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그렇게 1학년 1학기의 기말시험이 다 끝나고, 이제 정말 방학만 앞두게 되었다.
시험이 끝난 주말이 지나고 종강일인 월요일이 왔다. 이날은 과 전체가 모두 인천공항으로 견학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항공실무를 한 학기 동안 직접 배웠으니, 마무리는 여객청사와 화물청사 견학으로 직접 배웠던 것들을 보는 것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검정 정장으로 갖춰 입었고, 나도 하늘색 소매가 풍성한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를 입었다. 단체로 검정 정장을 입고 몰려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 보니, 몸만 컸지, 유치원생들 소풍만큼이나 유치한 수다들로 즐거웠다. 점심은 을왕리에 위치한 식당에서 먹기로 예약이 잡혀있었다.
학교를 벗어나 현장학습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두들 충분히 들떠있는데, 바다라니!
모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먹고 바닷가로 뛰쳐나갔다. 대부분 바닷가를 산책하거나, 해변가 근처 상점의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진철이도 여느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오락실에서 폭싱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진철이는 놀다가 거추장스러워졌는지 경아와 나에게 다가와 집 열쇠와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것 좀 갖고 있어 줘"
진철이는 또 남자친구처럼 자기 물건을 다 나에게 맡겼다.
"아니 근데 터지지도 않은 휴대폰은 왜 들고 다니는 거냐 대체"
난 쓸데없이 좋은 기능의 가로본능 휴대폰을 열어보며 말했다.
"사진은 잘 찍혀, 그냥 사진 많이 찍어줘"
진철이는 남자아이들이 있는 오락실을 향하여 빠르게 사라졌다.
그날 바다는 썰물이었다.
해안가에 찰랑거리는 파도를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뻘만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조금 걷다 보니 뻘 한가운데 고깃배 한 척이 묶여있었다. 안개가 낀 해무 속으로 뻘 위에 떠있는 배 한 척이 뭔가 내 처지 같아서 한 장 찍었다.
진철이의 휴대폰으로 찍은 첫 사진이었다.
뻘 안에 갇혀 하염없이 바다로 나아가길 기다리는 배 한 척은 조금 녹이 슨 모습이었다. 어쩌면 밀물이 들어와도 자유롭게 바다로 나아갈 생각이 없는 듯하기도 했다. 매인곳에서 그저 저 멀리 수평선만 바라보며 같은자리에 떠있을 배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파리를 가고 싶다고 염원하지만, 언제나 동경하지만 결코 나아갈 생각이 없는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학습을 마치고, 우리 반은 다시 학교로 이동했다.
종강일인 만큼 종강파티와 군대를 가는 동기들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개강파티 때 갔던 그 술집이었다. 나는 그때와 똑같이 테이블 끝쪽 자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물론 오늘도 빠르게 도망갈 생각으로 말이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맞은편에 진철이가 앉았다는 것이었다.
우리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은 모두 술게임에 수다에 신나 여념이 없었다. 그 테이블의 끝자락 나와 진철이만은 팔을 괸 채 다른 세상인양 차분한 대화만 나누었다.
"너 웬일로 애들이랑 섞여서 안 놀아?"
난 구석에서 도망갈 기회만 노리는 내 앞자리를 선택한 진철이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나 원래 술 잘 못 마셔"
그걸 이제 알았냐는듯한 말투였다.
"어. 진짜 몰랐는데. 항상 술자리는 다 가지 않았어? "
그때였다.
우리 테이블 끝에 앉은 여자애가 갑자기 진철이 자리로 뛰어오더니 500cc 잔을 내밀었다. 진철이는 웬일로 게임 분위기를 맞춰주지 않고 적당히 거절했다. 까불거리는 진철이가 오늘은 왠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이미 한껏 끌어 오른 분위기에 신난 우리 반 여자아이는 그럼 선배님이라도 마시라며 나에게 그 잔을 내밀었다. 그 잔이 내 눈앞에 왔던 것도 아주 잠시 진철이는 "에이씨"라고 귀찮다는 듯 말하며 벌컥벌컥 500cc 잔을 원샷하였고,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맙소사 그건 500cc 잔에 가득 담긴 소주였다.
"너 괜찮아? 방금 술 못 마신다며"
놀란 내가 물었다.
"괜찮아. 너 먹이려는데 어떡해 그럼"
진철이가 당연하고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아니 거절을 해야지. 그걸 준다고 그냥 마시냐"
핀잔을 주며 뻥튀기를 하나 내밀었다. 진철이는 내가 내민 뻥튀기를 오물거리면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우리 테이블의 게임은 더 난폭하고 시끄러워졌다. 아까 그 여자아이가 이번에는 깽깽이발로 우리 자리까지 단숨에 뛰어오더니 진철이 목을 팔로 조여 한참 시달리게 했다.
도대체 무슨 게임일까. 아이들은 모두 그저 즐거워 보였고, 진철이는 딱히 즐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갈까..?"
나는 조용히 제안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카운터를 지나 한 명만 올라갈 수 있는 너비의 좁은 통로의 계단까지 몰래 나오는 데 성공했다.
학기 초 개강파티 때 그 아이가 내 팔을 잡아주었던 이곳. 그 한 학기의 끝인 종강파티날 우린 그 계단을 함께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무도 모르겠지?"
난 뒤를 돌아보며 진철이에게 말했다.
"상관없잖아."
진철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학가 후문 앞 문화의 거리로 계속 걸었다. 아직 이른 저녁시간이라 상점들은 모두 붐비는듯했다. 시끌벅적한 거리의 풍경과 달리 오늘따라 진철이는 이상하게 차분하고 조용했다.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가려고 후문 앞 횡단보도 앞에 섰다.
"조금만 걷다 가도 돼? 나 술이 좀 올라오려고 해"
진철이가 조금은 괴로운 듯 말했다.
"그래, 그럼 캠퍼스에 소리를 지르면 계속 메아리쳐 울리는 장소가 있다는데 거기 가볼까?"
우리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높은기둥 위에 용동상이 올라가 있었고, 그 기둥을 중심으로 정육면체의 커다란 돌들이 의자처럼 둥글게 배치되어 놓여있었다. 진철이는 그중 한 곳에 앉았고, 나는 그 옆에 그대로 서서 서성거렸다.
날씨는 많이 더워졌다.
이제는 제법 여름으로 접어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선한 봄바람을 함께 맞으며 내 다리가 예쁘다고 말했던 그날의 연못가의 장면이 떠올랐다.
계절의 처음인 봄. 그리고 첫 학기. 너와의 모든 처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습기를 머문 여름바람을 맞이한 지금. 여름밤의 공기와 기운이 조금은 끈적거리게 감싸왔다.
"나 사실 학기 초에 너 좋게 봤다. 지금도 그렇지만"
진철이가 점점 더 올라오는 취기에 조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
"사실 청계천에서 니 손 잡고 걷고 싶었어."
진철이가 조금은 쓴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래? 근데 왜 안 잡았어?"
나는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그랬다간 너한테 한 대 맞을 것 같았거든"
진철이와 나는 웃었다. 그랬던 것 같다.
진철이는 언제나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왔고, 내가 신경 쓰지 않을지, 상처받지 않을지 세심하게 신경 쓰며 행동했다. 장난스럽고 별생각 없어 보이는 가벼운 말과 행동들 속에서도 언제나 그 기준은 명확히 있는듯했다. 마음으로도 나를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 정말 소중히 또 소중히 다치지 않게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용동상에서의 대화는 생각만큼 메아리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청계천 데이트 때처럼 조금은 진지하고 힘든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진철이는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엄마가 어렸을 때 자신을 많이 챙겨주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맛있는 걸 먹고 싶어도 못 먹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갑자기 아침마다 학교에 오면 배가 고파하고 매점부터 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진철이의 마음의 상처를 마주하고 듣다 보니, 왠지 모를 모성애 같은 게 올라왔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그런 느낌.
그때 갑자기 진철이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서러움 때문인지 당황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는 남자를 처음 봐서일까.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이런 상처가 있는 아이에게 내가 또 다른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가가던 손을 멈췄다.
그렇게 그 아이의 어깨 위까지 다가갔던 내 손을 어색히 내려놓았다.
잊고 있던 내 처지. 이아이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나의 상황. 하지만 밀어내지도 못하는 내 이중적인 마음. 이제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게 아닌지 조차 나 자신에게 자신이 없었다. 미안했다.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 3호관 사물함에 우산 있어"
우리는 우산을 가지러 3호관 방향으로 이동했다.
"우웩.....................!!!!!"
소주를 500cc로 먹은 진철이는 결국 길거리 한복판에서 한바탕 쏟아냈다.
"잘한다. 그러니까 술도 못 마신다면서 그걸 왜 넙죽 마셔"
나는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덥고 습한 바람과 빗방울들이 더욱 몸을 찝찝하게 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5분도 안되어 걸어갈 거리인데, 과음한 진철이에게는 멀게 느껴졌는지, 다시 한번 토하고는 간신히 사물함이 있는 3호관 건물에 도착했다. 며칠 전 진철이가 벽에 나를 밀치고 가까운 숨결을 느꼈던 그곳. 자물쇠 비밀번호를 풀며, 슬며시 그 현관의 그날의 풍경을 떠올렸다.
"괜찮아?"
구토에 찝찝했는지 가글을 하고 오겠다며 화장실을 다녀온 진철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내가 물었다.
"응 괜찮아."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진철이가 대답했다.
"조금만 쉬다 가면 괜찮을 것 같아"
진철이가 3호관 앞에 있는 등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오늘은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같은 벤치에 앉아 캠퍼스로 향하는 텅 빈 길을 바라보았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젊은이들의 열기가 넘치는 캠퍼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지만, 강의실이 즐비한 이쪽에는 사람이 없었다. 단 둘 뿐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분무기를 뿌리듯 가볍게 내렸다.
밤안개 속 캠퍼스의 노란 가로등 앞으로 여린 빗줄기들이 흩날리는 게 보였다.
우린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비 오는 캠퍼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술이 깬다기보다는, 이 밤공기에 더 취하리라.
"이제 갈까"
내가 먼저 일어섰다. 진철이가 일어서는 내 오른팔목을 탁 잡았다.
개강파티 때 술집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내 팔을 잡듯. 그렇게 준비 없이 나는 또 한 번 그 아이에게 잡혔다.
"나 너 좋아해."
만감이 교차한 듯, 하지만 오늘은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나는 가로등 불빛 위로 보슬비가 내리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아직 술이 안 깼네. 맨 정신이 아니야. 가자!"
나는 진철이를 일으켜 세웠다.
진철이는 못 이기는 척 천천히 일어났다.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바닥을 바라보며 따라올 뿐이었다.
'오늘은 피할 수 없는 건가.'
걱정했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느끼자 가슴이 쿵쾅거리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5호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도서관 건물 뒷 뜰을 지날 때즈음 갑자기 진철이는 멈춰 섰다.
옆에서 우산을 씌워주던 나도 같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내 바닥을 바라보던 진철이는 어느덧 각오한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아니 나 너 많이 좋아해. 나 취한 거 아니야."
진철이는 다시 한번 확고하게 강조하듯 말했다. 그렇게 기다렸고, 걱정했던 순간이 닥쳐버린 것이다.
'이제 정말 어떡하지.'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안된다.
"나 지난번에 하려고 했던 말 있잖아... "
나는 지난번 못했던 아팠던 날의 얘기를 꺼내려고 했다. 그러자 진철이는 내 팔을 잡고 몸을 돌려 나를 마주 세웠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안 되겠어. 너 어디 아픈지 말해봐. 널 좋아하니까 난 들어야겠어."
그 눈빛은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길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니, 나 고등학교 때 겪은 병이 하나 있긴 한데. 심각한 건 아니지만. 가끔씩 힘들면 귀가 안 들리고 어지럽고 그..."
내가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진철이는 내 말을 끊고 결심한 듯 말했다.
"지아야, 우리 사귀자"
확고하고 빛나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졸업 후에 나랑 같이 영국으로 가자. 난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처음부터 너였어. 처음 우리 반 교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눈엔 너밖에 안보였어. 너랑 친해지기 위해서 네 근처만 맴돌았고, 개강파티 때도 너 나가는 거 보고 따라 나가서 잡았어. 엠티 때에도 너 혼자 별 보는 내내 멀리서 지켜봤어."
진철이는 한참을 조금 큰소리로 강조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모든 걸 쏟아부어내듯. 그렇게 한꺼번에 전부 다.
"내가 영국에서 굳이 한국에 있는 대학에 온 이유는 평생의 사랑인 결혼상대를 찾으러 온 거고, 그게 너야"
나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너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들으니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근데 왜.. 나야?.... 난 우리 반 다른 애들에 비하면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평범한데"
나는 자신 없는 듯 말했다. 진철이는 무슨 소리냐는 듯 어이없는 미소를 띠더니 다시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내 눈엔 네가 제일 예쁘고, 너밖에 안 보여”
그리고 내 눈은 아래로 향했다.
무릎을 꿇은 진철이의 모습이 보였다.
진철이는 고개를 숙인 채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취한 거 아니야. 내일 아침 전부 다 기억날 거라는 거 약속할게. 난 지금 너에게 얼마든지 무릎도 꿇을 수 있어. 지아야 사랑해"
진철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조금만 더 걸으면 학교 후문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우산을 쓰고 오가는 게 보였다.
비는 아까보다 조금 더 거세졌고, 진철이의 까만 정장은 젖은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