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나나프라푸치노는 다시 맛볼 수 없었다.
대학생활의 첫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계절학기는 일주일 후 월요일부터였다.
나와 경아는 학점이 좋은 편이었지만, 학점 최종 평점을 올리기 위하여 계절학기를 신청하였다.
그리고 진철이를 비롯한 과 몇 남자아이들은 F나 D과목을 재수강하기 위하여 강제로 계절학기를 들어야 했다.
어찌 됐건 방학 때도 우린 또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진철이의 휴대폰은 여전히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신이 불가능하고 수신만 가능했다. 사실상 네이트온에 들어가지 않으면 진철이와 방학기간에 얘기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절학기에서 만난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우리가 자꾸 만나게 되는 경우의 수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정 반대적인 이유였다.
나는 학점을 더 올리기 위한 목적이지만, 그 아이는 낙제를 면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나는 반수에 실패하여 억지로 복학하여 왔지만, 그 아이는 멀쩡한 의대를 퇴학 후 굳이 한국에 있는 이 대학을 선택하여 왔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저 졸업과 취직을 목적으로 공부 중이지만, 그 아이는 결혼상대를 찾으러 한국에 있는 대학에 온 것이라는 점.
종강일 비 오던 그날 진철이가 무릎을 꿇고 내게 했던 말들은, 일주일 내내 생생히 내 귓가에 맴돌았고, 눈앞에 펼쳐졌다.
일주일 내내 그 꿈같은 장면에 시달렸고, 행복해했고, 슬퍼했다.
그 애절하고도 간절했던 고백의 풍경은 어느 날은 아름다운 배경음악이 깔려 로맨틱하게 다가왔다가도, 어느 날은 슬픈 음악이 깔려 진철이의 눈물만 떠오르기도 했다.
흩날리던 빗방울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와 젖은 머리칼로 바뀌어 기억되기도 했고, 또는 빗방울이 아닌 핑크빛 벚꽃비로 둔갑되어 행복한 일만 펼쳐질 것 같은 장면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일주일 내내 같은 장면은 내 기억 속에 여러 가지 필터로 다양하게 각인되었고, 결국 어느 것이 진짜인지 헷갈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 아름답고 거짓말 같아서, 정말 있었던 일이었나 하며 꿈에서 깨어나려 했던 날도 있었다.
너무 아름답고 슬퍼서 이 모든 일이 부정되어버릴까 봐, 나는 그 기억을 일주일 내내 나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간직했다.
받아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 순간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쩌면 가장 그 순간을 기다렸던 건 나였다. 내 마음을 나에게조차 숨겼던 것이다.
반면 그 아이는 언제나 나에게 솔직했고, 그 순간순간에 진심이었다. 난 그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을 언제나 짓눌렀고, 이건 일시적인 착각이라고, 나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정 반대편의 나라에서 날아온 아이를 좋아하게 됐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하면 할수록, 그날의 풍경은 나에게 솔직해지라고 압박하는 하나의 통지서로 느껴졌고, 나는 그 마음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은 채 일주일을 보냈다.
계절학기가 시작되기 전 주말, 오랜만에 진철이가 네이트온에 접속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PC방 알바 중인 옆반 준호도 함께 로그인되어 있었다. 준호는 내가 로그인하자마자 나에게 곧바로 말을 걸어주었다.
나는 준호와 대화하면서 다른 용무 중으로 뜬 그 진철이의 대화명을 클릭하고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역시 답장은 빨리 오지 않았다.
'역시...'
그날은 너무 취했던 것일까. 진철이의 고백이 정말 진심이었다면, 어떻게든 나에게 먼저 연락하려 했을 텐데, 그 아이는 그 후 일주일간 조용하다.
단순히 휴대폰이 안되어서라기엔 내 번호를 외우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세기의 고백을 한 사람이 어떻게 연락 한통이 없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아이는 그냥 그날의 그 분위기, 취기 때문에 그 순간의 감정에 대하여 쉽게 털어놓았던 것일 수도 있다. 순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 그 아이의 기억을 떨쳐버릴 수 없는 내가 오히려 더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결론은 결국 내 마음도 이미 그 아이에게 다가섰다는 것이다.
진철이의 답장을 기다리며 준호랑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준호는 진철이와 친구인 게 이상할 정도로 성실하고 완벽한 아이였다. 반대표로 인기도 많았고, 교회도 다니고, 공부도 잘하고 성실했다. 다른 반은커녕 같은 반 동기와도 교류를 잘하지 않는 나로서는 진철이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준호와는 아예 대화도 못해보았을 것이다.
준호랑 대화하는 도중 진철이의 답장이 왔다.
"응. 지금 하고 있어."
진철이가 대답했다.
"응? 뭘?"
나는 내가 보낸 인사와 전혀 다른 대답에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야. 그냥"
진철이가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마도 지금 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 것이다.
진철이의 이러한 어눌한 한국어에 익숙해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라고 하려고 했지?"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 엔터를 쳤다.
"응. 넌 너무 나를 잘 알아"
진철이가 대답했다.
영국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진철이는 가끔 단어, 한자, 문장들을 혼동하거나 잘 못쓸 때가 많았다.
동해에 일출을 보러 가고 싶다는 것을 '돌출'을 보러 가고 싶다고 해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계속 무슨 소리냐고 캐물으면,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라고 하곤 했는데. 아마도 지금은 PC방 알바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운가 보다.
"너 근데 준호한테 내 얘기 뭐 한 거야? "
준호와 대화하며, 생각보다 준호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클래식과 뉴에이지음악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철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준호에게 꽤 많이 한 모양이다.
혹시 어디까지 내 이야기를 한 걸까. 혹시 그날일까지 다 말한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냥 별 얘기 안 했어. 너 이쁘고, 착하고, 마음씨 좋고, 같이 다니면 길 헤매서 조금 힘들고, 가끔은 폭력적이고, 다리가 예쁘다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내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아이는 그 일이 있고, 일주일간 아무 말도 없다가 또 이렇게 한방에 내 마음을 사정없이 무너뜨리는구나.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처럼, 차태현이 전지현의 소개팅남에게 전지현에 대하여 설명하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준호 소개해줬는데, 난 휴대폰 사진첩에 있는 여자 언제 소개해줄 거야?"
감동도 잠시, 소개팅타령이라니.
나에게 했던 고백과 저 말들은 다 뭐였는가.
게다가 사진첩 속에 있는 여자라면 내가 얼마 전 만난 고등학교친구와 찍은 사진을 말하는 건가.
헷갈리고 화가 났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에 나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소개팅 시켜주고 싶지 않아"
나는 단호한 듯 빠르게 엔터를 쳤다.
"왜? 질투나?"
나에게 듣고 싶은 대답을 유도하는 진철이의 의도에 오늘만큼은 따라줄 작정이었다.
"응. 질투나. 그래서 싫어."
이번에도 나는 빠르게 엔터를 쳤다.
"나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갑자기 진지해진 진철이의 모습,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가슴이 콩닥거리며 대화창을 응시했다.
"너 정말 흔들려?... 너한테 종우가 있는 거 알아. 그리고 좋은 아이인 것 같아. 그래도.. 혹시 종우보다 나를 먼저 만났더라면 나를 먼저 좋아해 줬을까?"
마음이 아팠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기운을 빌려 고백해 놓고, 이 아이는 또 망설이고 있었구나.
내 처지를 신경 쓰며 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묻는 저 말이 너무 시리게 아팠다.
더 이상 이런 배려를 받고 싶지도 더는 이 아이를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종우를 먼저 만났을지라도, 네가 좋아. 이제는 나도 나를 속일 수가 없어. 저녁마다 이어폰을 꽂고 네가 노래방에서 불러준 노래를 들으면서 동네를 산책해. 사실 전혀 내 취향이 아닌 노래지만 네가 불렀다는 사실만으로 엠피 파일을 다운받았어.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내내 네 생각만 하면서 산책을 해"
리쌍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를 부르던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낮지만 경쾌한 톤의 목소리,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그 목소리에 매료되어 버린 이후부터 나는 거의 매일 그 곡을 들었다. 클래식이나 뉴에이지, 또는 가요라면 발라드만 듣던 내가 음악 취향이 바뀌게 된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위험하게 늦게 돌아다니지 마."
또 딴소리. 의외로 차분한 반응의 진철이가 왠지 모르게 미웠다.
"뭐야 너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서운하게?"
나는 툴툴거렸다.
"아니 니 얘기를 들으니까 지금 입가에 미소가 안 사라져"
진철이는 그렇게 내 마음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린 너무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풀하우스 ost인 I Think I love you가 딱 내 마음이랑 똑같아."
몇 분이 지나고 진철이가 대답했다.
"엇 이거 별이 부른 거네"
잽싸게 찾아서 들었을 그 모습이 상상되었다.
가사에 집중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내 마음을 들어준 거겠지.
그렇게 내 마음이 그 아이에게 닿았다. 드디어 전한 것이다.
"그럼 내 휴대폰 속 그 여자 나 소개팅 시켜주는 거다"
진철이의 말에 그제야 떠올랐다.
종강일 진철이가 나에게 맡긴 휴대폰에 찍힌 사진. 내가 찍은 갯벌에 떠 있던 배 한 척의 사진과 더불어 경아가 찍어준 비행기 옆에 서서 찍은 내 사진도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여자는 나였구나.
‘… 처음부터 너였어. 처음 우리 반 교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눈엔 너밖에 안보였어. 너랑 친해지기 위해서 니 근처만 맴돌았고, 개강파티 때도 너 나가는 거 보고 따라 나가서 잡았어…’
그날의 고백처럼 정말 처음부터 다 나였구나.
모두 다 나였는데, 오해하고 외면하고 의심했던 건 결국 나였구나.
"오늘도 산책 나갈 거야? 늦게 돌아다니지 마. 내가 걱정하니까 나가더라도 나한테 문자 보내고 나가"
컴퓨터를 끄고 나는 어김없이 산책을 나왔다.
고민이 가득 찬 채 듣던 음악이 오늘만큼은 밝고 경쾌하게 들렸다.
내 입가에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걸으며 진철이 번호로 문자를 남겼다.
"나 산책 나왔어. 들어가면 또 문자 남길게"
계절학기 수업 내내 너무 떨려서 어떻게 수업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 나랑 경아가 강의실 앞쪽에 앉으면 바로 뒷 줄에 진철이랑 하진오빠가 앉았다.
하진오빠는 06학번이지만, 다른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나이가 우리보다 4살이나 더 많았다.
경아와 하진오빠가 없이 진철이와 단둘이었다면 어땠을지 정말 상상만 해도 진땀이 주르륵 날 것 같았다.
계절학기는 수강생이 많지 않아, 캠퍼스는 한산했다.
수업이 끝나고 진철이와 나는 마을버스를 타러 1호관을 나왔다.
비가 오고 있었다. 웬일로 하얀 파일을 어색하게 든 하진오빠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나도 오늘은 주안역으로 갈 건데 나 좀 씌워줘"
하진오빠랑은 가끔 공강 시간에 당구장도 종종 같이 갔더래서 그런지 편했다.
하루는 하진오빠가 수업을 땡땡이치고 당구장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나와 진철이가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눌러앉아 같이 자장면을 시켜 먹었던 날도 있었다.
모범생 그 자체인 나는 이들과의 땡땡이가 내 인생 첫 일탈이었다.
진철이는 4구를 정말 잘 쳤다. 포켓볼밖에 못 치는 나는 어떤 볼을 어느 각도로 쳐야 하는지 진철이에게 설명을 듣곤 했는데,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을 때면, 진철이는 내 뒤로 와 나를 감싸 안듯 팔을 잡고 큐대 잡는 걸 도와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달아오르는 얼굴을 티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욱 오버를 하며 장난을 치곤 했다. 그럼에도 눈치 없는 하진오빠는 우리의 이런 기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참 다행이었다.
"근데 오빠 우산 없어서 주안역까지 따라온 거예요?"
오빠는 그렇다고 하며, 기왕 이렇게 된 거 커피 한잔 마시고 가자고 했다. 나와 진철이는 부평역으로 가서 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다 같이 지하철을 탔다.
부평역 지하상가는 정말 복잡했고(여전히 갈 때마다 느끼지만) 나는 길치였다. 하진 오빠는 일단 아무 대로나 나가서 카페를 찾아보자며, 아무 출입구로나 올라와서 미어캣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대각선 길가에 위치한 스타벅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자!"
부평 5 거리 2층에 위치한 스타벅스는 모퉁이를 둘러싼 통창으로 비 내리는 거리를 감상하기 좋았다.
나는 카라멜마끼아또를 주문했고, 진철이는 바나나프라푸치노를, 하진오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하진오빠는 잠깐 담배를 피우겠다고 나가며 진철이에게 같이 피우자고 권했지만, 진철이는 나 때문에 거절했다.
"너 다리 모델 해도 될 것 같아"
둘이 남게 된 테이블에서 진철이가 능청을 떨며 말했다.
"너 오빠 있을 때랑 눈빛이 너무 다른 거 아니냐. 들키면 어쩌려고"
나는 오빠가 올라오지 않는지 계단 쪽을 빠르게 쳐다봤다.
“몰라 캠퍼스에서 손잡고 다닐 거야. 남들이 우리 사귀는 걸로 오해하게 해서 강제로 사귀게 할 거야. 말로는 안되니까 힘으로 억지로 할 거야 “
진철이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군대 간 종우 때문에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겠다고 한 것도 잠시 진철이의 내적갈등은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튀어나왔다.
며칠 전에도 이 얘기를 티격태격하며 학교 후문까지 걷던 중 같은 반 여자아이가 뒤에서 우리를 보고는 "둘이 사귀죠?"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질문을 받자마자 3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진철이가 내 눈을 보며 '말한다'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내가 애써 아니라고 우리는 안양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어내며 둘러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진철이는 새삼 아쉬운 눈빛으로 어색히 웃었으며 그렇다고 동조했고, 같은 반 여자아이는 다 알겠다는 듯 " 아~~~~ 그러세요~~~~~~~"라고 하고 실실 웃으며 그냥 넘어간다는 듯 지나갔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공공연하게 초등학교 동창, 짝꿍씨라며 가끔 어색한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비 내리는 스타벅스를 좋아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언제나 약간 달달한 커피만 주문하던 진철이가 특별히 주문했던 바나나 프라푸치노는 2006년 계절 한정 음료였다. 프라푸치노에 바나나를 갈아 넣은 음료였는데, 나에게도 한입 먹어보라고 했었다. 그날 이후 난 몇 년 동안 그 맛을 찾으러 다녔다. 맛있기도 했었지만, 그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계절 그 기억을 되새기기 위하여였다. 다른 카페에서도 비슷한 이름이 보이면 어김없이 먹어봤고, 스타벅스의 매년 여름 계절음료 메뉴판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그날 이후 2006년의 바나나 프라푸치노는 다신 만나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스타벅스 계절음료가 나오면 그 계절 내내 계절한정음료만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그 계절의 한정된 추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 계절에 충분히 실컷, 마음껏 즐겨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오히려 같은 음료가 다음 연도에 출시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2006년의 여름은 그렇게 스타벅스 바나나프라푸치노처럼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그렇기에 그 추억도 영원히 그 비 내리는 스타벅스의 풍경에 가둬 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우리는 연인처럼 달콤한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난 의식하듯 다리를 꼬고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겠지. 비 내리는 스타벅스의 기억은 그 이후 많은 다른 사람들과의 추억으로 덮어씌워졌지만, 그 첫 장의 기록은 2006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계절학기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진철이는 수업을 꽤 많이 빠졌다. 껄렁껄렁거려 보이지만 생각보다 책임감이 있고 고지식 한 면이 있는 아이여서 이런 잦은 결석이 조금은 의외였다.
아니 어쩌면 이게 원래의 모습인 것일 수도 있겠다. 아직 그 아이에 대하여 잘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까. 나와 하나부터 열까지 정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그 아이에 대해 확실히 아는 건 많이 없었다.
언젠가 학교 앞 알파문구 2층에 위치한 모닝이라는 경양식집에 갔을 때였다.
돈가스를 먹으면서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충격이었다. 아마도 유난히 작은 잔에 나왔던 물을 보고 떠오르는 이야기를 그냥 했던 것 같은데, 영국에서 애벌레를 넣어 만든 데낄라를 마신적이 있다며 열심히 설명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의 뒷골목? 문화의 경험담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어릴 적 구김 없이 자란 모범생인 내가 듣기에는 이런 이야기들은 너무 충격이었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이런 애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몇 년이 지나 이 얘기를 회사 친한 선배에게 한 적이 있었는데 선배는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지아야 내가 만약 네가 어떤 애인지 모르고 이 얘기를 들었다면, 너에 대해서도 오해했을 거야.” 선배가 그 정도로 표현한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난 그 아이에게 이상하게 끌렸다.
아니 오히려 나와 다른 부분에 신비한 매력을 느낀 것 같다.
그 아이에 대하여 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 존재만을 좋아하고 싶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인지 그 배경을 알고 싶지도 않은, 그 사람의 영혼자체에 끌리는 느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진철이가 수업에 빠진 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뒷문을 자주 돌아보며, 혹시 오늘은 오지 않을지 기대했다. 그 아이를 보지 못한 하루하루가 늘어날수록 나는 기대했다가 체념하곤 했다.
결국 나에게 했던 모든 달콤한 말들과 약속들의 깊이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깊지 않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간 진철이를 만나지 못했다.
2학기때 쓸 스케줄 노트를 정리 중인 주말이었다. 갑자기 내 하얀 스카이 IM-8100의 액정에 진철이의 멋있는 사진이 뜨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어 놓은 사진을 전화 화면으로 설정해 놓았는데, 사실상 이 사진이 뜰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갸름하게 약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얼짱 각도로 찍은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더욱 차태현과 닮아 보이는 사진이었다.
“말도 안 돼.....”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휴대폰 액정에 뜬 그 아이 이름 세 글자와 사진을 바라보느라 벨이 울리고 한참 뒤에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너 진철이 맞아? 뭐야?”
난 너무 반가운 마음에 살짝 소리를 질렀다.
“내가 휴대폰 풀려고 알바한다고 했잖아. 지금 정지 먹은 거 풀리자마자 제일 처음 너한테 전화한 거야.”
그랬었다. 분명 진철이는 그랬었는데, 믿지 못한 건 이번에도 나였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10분가량 짧은 통화를 마치고 진정되지 않은 마음으로 휴대폰을 손에 잡고 있는데 금방 문자 알림이 울렸다.
“너 그거 알아? 전화 목소리 조금 달라. 좋아. 딱 내 스타일이야. “
그간의 서러움이 또 사르르 쓸려 내려가는 느낌.
정말이었구나. 난 그 아이를 얼마나 가볍게 봤던 것일까.
어쩌면 이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지하고 더 멀리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운세에 내가 운이 좋다고 나왔는데. 이거였어. 너랑 통화한 게 내겐 행운이야. 너무 좋았어. 네 목소리를 들어서. “
두 번째 문자가 바로 연이어 왔다. 이 아이가 나에게 주는 그 마음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 것일까. 이제는 정말 이 아이의 마음을 받아 주어도 괜찮을 걸까. 혹시 내 마음의 깊이보다 가볍고 얕아 내가 상처받게 되더라도, 지금의 이 설렘만큼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오늘 시험만 보면 계절학기도 종강이다.
시험이 시작 후 조금 지난 후 강의실 뒷문이 스르륵 열렸다. 진철이었다.
그래도 시험은 보러 왔구나. 반가운 마음을 뒤로한 채 시험에 열중했다.
오랜만이었다. 매일같이 연락은 자주 했고, 며칠 전 영화도 같이 봤지만, 학교에서 만난 건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시험이 끝난 뒤 오랜만에 우린 경아와 셋이 당구장에 들렀다.
“나 남자친구랑 서울 갈 건데, 너네 놀러 갈 거면 중간에 내려줄게”
경아는 흔쾌히 우리를 태워다 주기로 했고, 경아의 남자친구가 올 때까지 당구장에서 시간을 때웠다.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나는 낄 수 없어 그 둘의 배틀을 구경했다.
1시간 정도 후 경아의 남자친구가 도착했고, 우리는 차 뒷자리에서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즐겁게 서울까지 묻어왔다. 진철이는 처음부터 뚝섬유원지를 가고 싶어 했지만, 경아의 남자친구가 내려준 곳은 신천역이라는 낯선 곳이었다. 우리는 걷다가 지도를 발견하고는 뚝섬유원지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진철이도 나와 함께 다니더니 길치가 된 듯 계속 헷갈려했다. 내가 놀리자 나에게 길치병을 옮았다며 툴툴거렸다.
계속 보슬비가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그냥 근처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그 호수가 어디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호수를 산책하는 내내 진철이는 내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거나 허리를 감싸 안고 걸었다. 누가 보더라도 다정한 연인처럼 자연스러웠다. 호숫가는 생각보다 별로 볼거리가 없어 우린 한강야경을 보기 위하여 여의나루역으로 이동했다. 오늘 데이트가 있기 전 통화에서 진철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일만큼은 나를 남자친구로 대해줬으면 좋겠어 “
그 말에 나는 화답하듯 다정하게 걸었고, 여자친구처럼 담배를 피우지 말라며 잔소리도 하고, 뺏어보기도 했다. 이 모든 행동들은 자연스러웠고 이래도 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오랜만에 마주한 한강 야경은 정말 슬프게도 아름다웠다.
“저기서 괴물이 튀어나오는 건가?!!”
엊그제 영화관에서 ‘괴물’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아서 그런지 진철이는 더 즐거워 보였다. 한강고수부지는 처음이라고 했다. 난 종우가 군대 가기 전 같은 장소에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넌 언제 와봤어?”
진철이의 질문에 나는 한강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철이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한숨을 깊게 쉬며 오늘 하루종일 참고 있던 빨간색 말보루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이번에는 나도 말릴 수 없었다.
나는 원효대교가 보이는 난간에 기대어 진철이가 담배를 다 피우고 오길 기다렸다.
원효대교의 불빛이 강물에 일렁여 아름답게 흐드러졌다.
“그래도... 고마워 지아야 “
진철이가 뒤로 다가와 살며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씁쓸한 담배냄새와 묵직한 향수냄새가 섞여 취할 것 같았다. 한강야경과 섞이니 더욱 몽환적이었다.
이 아이의 마음을 전부 받아주지 못하는 나는 미안한 마음뿐인데, 고맙다니, 역설적이었다.
”아니야... 내가 더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도 네가 정말 너무 좋아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내 마음을 말했다.
“서로 좋아하는데.. 도대체 왜 안되는 거야? 우리는?...”
진철이가 답답해하며 난간에 기댄 내 몸을 돌려 품에 세게 꽉 안았다가 이내 천천히 힘을 빼며 놓아주었다. 세게 꽉 잡았던 그 힘이 무색하게 무기력하게 놓은 그 느낌에 더 간절함이 느껴졌다.
진철이의 얼굴이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그 아이의 마음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그럼에도 진철이는 강요하거나 더는 시도하지 않았다.
꽉 안았다가 놓아준 그 품처럼 언제나 그냥 그렇게 내게 다가올 수 있는 만큼만 다가와줬고, 나는 그런 진철이가 고맙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켰다. 하루종일 꺼두었었다.
오늘만큼은 정말 진철이에게만 집중하고 싶었기도 했고, 진짜 남자친구가 돌아오는 날이기도 했기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 휴대폰의 연락을 피하고 싶었다. 이제는 더는 마음의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왜 연락이 안 되냐는 종우의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그날은 종우의 의가사제대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