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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_ 그 해 여름의 끝

그렇게 우산 속에 갇혀 하염없이 비 내리는 바다만 바라보았다.

by 윤지아

드디어 2학기가 시작되었다.

개강 후 1학년 2학기는 작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 후 군대 간 선배들과, 어학연수 간 동기들이 돌아와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했다. 06학번 새내기로만 구성되어 있던 우리 반도 복학생들이 섞여 나의 존재도 더 이상 튀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학기 초 친했던 아이들도 몇 보여서 반가웠다.

"수화야 웬일이야! 너무 반갑다. 작년에 휴학했었구나"

수화는 학기 초 내가 휴학하기 전에 잠깐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하얀 피부에 여전히 예쁜 외모가 역시 ‘우리과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와 지아야. 친한 사람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난 나밖에 없을 줄 알았어!"

수화처럼 다른 복학생 친구들은 06 학번과 같은 반이라는 게 다들 어색해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수화에게 경아와 진철이를 소개해줬다. 그날 우리는 수화가 휴학 전 자주 갔다던 학교 후문 밥집에서 양배추쌈으로 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나 고향이 부산이라, 휴학하고 부산에서 쭉 있었어. 지금은 여기 후문 근처에서 자취 중이야"

수화는 휴학기간 어학연수를 다녀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다 같이 노래방에 갔다.

경아는 새로 사귄 예쁜 친구인 수화가 마음에 드는지, 친해지려고 계속 대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아직 종우의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고, 여전히 하루에도 대여섯 개씩 문자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 마음이 복잡했다.

3일 정도 지나자, 종우의 문자 개수는 확연히 줄었지만, 어차피 교회에 가면 마주칠 거기 때문에 이번주 안에 마음의 결정을 해야 했다.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노래방에서 실컷 지르며 마음을 정리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철이는 옆에서 진지하게 앉아 웃는 얼굴로 내 노래를 열심히 들어주고 있었다.

"지아야, 근데 진철이가 너 진짜 좋아하봐. 너 노래 부르는데 옆에서 너를 보는 눈빛에 하트가 뿅뿅이야!!"

화장실에 가는 나를 따라 나온 수화가 말했다. 나는 설명하기 좀 복잡하지만, 남자친구는 아직 아니라고 말해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정말 결정해야 한다. 약속된 2년이라는 시간의 제약이 있는 인연이지만 그래도 자꾸 진철이 쪽으로 끌리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평생 나만 바라봐줄게 확실한 종우를 끊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 아이를 이대로 그냥 보내버리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노래방에서 나온 뒤에도 아직 날은 환했다. 개강시즌은 수업을 거의 하지 않아, 일찍 끝나니 학교에서 더 같이 있을 시간이 적은 것 같았다. 진철이와 나는 아쉬운 마음에 친구들과 헤어진 후 전철을 타고 동인천 역으로 향했다. 진철이는 하필 오늘따라 굉장히 긴 까만 장우산을 가지고 왔는데, 너무 길어서 거추장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근데 넌 비도 안 오는데 그걸 왜 들고 온 거야"

내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오늘 뉴스에서 비 온다고 그랬다니까."

평소에는 항상 내 우산만 얻어 쓰던 진철이가 웬일로 쓸데없는 준비성을 발휘했나 싶었다. 어쩐지 비가 더 안 올 것만 같은 맑고 화창한 하늘이었다.

동인천에서 자유공원을 산책하며 인천역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에~~~ 취!!! "

나는 감기기운이 조금 있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갓블레스유"

진철이가 말했다. 그동안 내가 재채기를 할 때마다 진철이는 어김없이 갓블레스유를 말해줬지만, 난 한 번도 진철이가 재채기할 때 그 말을 해준 적 없었다. 그럴 때면 진철이는 투덜거렸다.

"왜 갓블레스유 안 해줘? 이건 해줘야 하는 거야. 영국에서 이건 상식이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신기하다는 듯 진철이의 말을 들어줄 뿐, 막상 진철이가 재채기를 할 때에는 너무 순식간이고 갑자기라 그 말을 해주는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저기가 엽기적인 그녀에서 차태현이 누웠던 벤치다!"

대화를 하며 천천히 산책하듯 넘어왔는데, 벌써 인천역이었다. 인천역 앞에 있는 벤치를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뭐 정말?!!!"

진철이는 빠르게 바로 달려가서 벤치 위에 몸을 쪼그리듯 욱여넣고 옆으로 누웠다. 가방뒤에 매달아 둔 장우산이 한결 더 거추장스럽게 보였다.

우리는 2번 버스를 타고 월미도로 향했다. 월미도까지는 금방이었다. 진철이는 가로본능 휴대폰으로 열심히 바다 사진을 찍었다. 자주 보던 인천 앞바다, 더러운 까만 물, 바다 비린내, 나에게는 별 볼 일 없는 풍경이었지만 진철이는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런 진철이를 보니, 지겨운 월미도도 조금은 볼만 한 것 같았다.

그때였다. 후드득 머리 위로 큰 물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나 싶더니, 갑자기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소나기가 퍼붓듯 내리기 시작했다.

바닷가 쪽에 서 있던 우리는, 상가 쪽 방향으로 뛸 시간도 없이 거리 한복판에서 비를 만났다.

몸을 피할 틈도 주지 않게 갑자기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라니.

"거봐 비 온댔잖아. 내 말이 맞지?"

까만 우산 속에 진철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주변은 환했지만, 거세게 오는 빗줄기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이 앞쪽 바다 수면 위로 수천 개의 물방울이 일제히 부딪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같기도 했고, 수천 개의 샹들리에 유리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져 서로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우산 속에 갇혀 우린 그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젖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 채 가만히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소나기가 얼른 그치길 기다리면서, 아니 그치지 않기를 기도하며, 그렇게 빗속에 멈춰 서서 하염없이 비 내리는 바다만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길, 종점인 인천역에서 지하철을 타고는 우린 부평으로 향했다. 별다른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함께 소나기를 맞은 여운을 더 느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바탕 비가 오고 난 후인 부평역 광장의 대리석 바닥은 얕은 물이 깔려 밤인데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국 어두워질 때까지 같이 있게 되었네.'

부평역 광장은 사실 평소에는 잘 올라와보지 않았다. 보통 부평에서는 지하상가만 돌아다녔을 뿐 지상에서는 있을 일이 없었는데, 왜인지 오늘은 비 온 뒤 청량한 바깥 기운이 좋았다.

차분한 내 분위기와 달리 오늘따라 진철이는 장난기가 한가득했다.

"여기도 엽기적인 그녀에 나온 곳이지?"

진철이가 부평역 맥도날드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맞아~"

차태현 좀 닮았다고 했더니, 아주 뿌리를 뽑을 작정인가 보다. 그런 진철이가 귀엽기도 했고, 정말 영화 속 차태현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럼 내가 영화에서처럼 업어줘야겠다."

진철이가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응?!! "

진철이는 정말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뭐 하는 거야!! "

나는 비에 젖은 광장을 철퍽거리며 도망 다녔다. 그런 나를 재밌다는 듯 쫓아오며 진철이는 나를 몇 번이나 더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아이의 양팔에 들린 채, 나는 제어할 수 없는 상태의 높이에 올려졌다. 그렇게 많이 높지는 않지만, 그 아이를 내려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 진철이는 그런 내 눈을 바라보며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장난기가 빠진 눈빛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뺨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내 팔은 그 아이의 양손에 잡혀있었다.

난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우리의 입술은 그대로 닿았다. 까만 밤하늘아래 수많은 불빛들이 바닥의 빗물에 비춰 올라가는 듯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서로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운명을 거부할 수 없음을 강하게 느꼈다. 약속된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인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만나기로 예정된 운명임을, 준비 없이 비를 맞은 순간처럼 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그렇게 그 아이의 입술에, 우리의 운명에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2014년 3월.

오늘은 이 회사에서의 퇴사일이다.

2년 계약직을 선택했을 때, 이런 헤어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점심시간 친한 선배는 일부러 나와 다른 테이블에 앉고 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난 이곳을 떠난다. 더 좋은 곳에 합격했고, 오늘 이 점심은 내 이직 축하자리였다.

분명 이곳에 입사한 것은 나에게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약속된 인연의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온 것이다.


이미 모든 업무는 종료했기에, 점심 이후 회사 앞 공원에 이어폰을 꽂고 나왔다.

브라운아이즈소울의 '너를'이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2년의 약속된 시간과 인연 그리고 헤어짐.

2006년의 그 아이와의 인연만큼이나 애절하게 다가왔다.

약속된 인연이라 해서, 제한된 인연이라 해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난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2006년에도 그걸 알았었더라면, 그 2년간 온전히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해 주었었다면, 지금 우린 달라졌을까.

끝을 아는 인연이라 해서 처음부터 시작하길 두려워해선 안된다. 그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버티게 해 줄 추억의 여운을 하나도 만들 수 없을 테니까.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시작한 자만이, 그 추억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때도 알았었다면, 조금 더 빨리 네 손을 잡아주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지막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공원 벤치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빗소리는 너무 커서 음악소리를 묻히게 했다.

그 풍경은 마치 2006년 여름 우산 속에 갇혀 바라보았던 소나기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