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수많은 비 오는 날들을 만날 때마다 너를 떠올리겠지
2학년의 여름. 우리는 졸업 여행으로 태국여행을 가게 되었다.
엠티 이후 진철이에 대한 내 마음이 헷갈려 혼란스러워졌기에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일부러 더 멀리 떨어져 앉으려 했고, 최대한 자유일정도 겹치지 않는 장소로 짰다.
이렇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엠티 이후 꾼 우연한 꿈 때문이었다.
진철이와 나는 부평역 지상 공원의 밤 풍경 속에 있었다.
그 풍경은 그날 그 대리석 바닥 아래 빗물에 비친 그 물속 풍경처럼 아른거렸다.
그 아이는 다정한 얼굴로 다가왔고, 그때와 같이 우리는 고요한 입맞춤을 했다. 그 입술의 부드러운 촉감은 꿈이 아닌 듯 생생했다.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같은 공간에서 하루의 절반을 같이 생활하면서 그 아이가 나에게 주는 영향력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예전 같은 소울메이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대하여 왜 한 번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왜 한 번도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걸까. 그냥 이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서로 합의한 것인 양 서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그 시간들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왜 한 번도 제대로 정리를 하거나, 변론을 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것 봐 물이 진짜 깨끗해!!!"
경아와 복학생 지영이는 파타야 물속에 몸을 담근 채 파란 바다에 감탄하고 있었다.
가슴 쪽 부분에 하늘색 줄무늬가 있는 하얀색 나시차림에 짧은 청반바지를 입은 나도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맑고 청량한 파타야의 바다였다.
우리 셋은 코코넛음료도 마셔보고,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머리카락까지 완전히 다 젖은 상태로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아주 멀리서 이제야 막 외출을 나서는 진철이와 남자선배들의 무리를 보았다.
멀리서 진철이가 그런 내 모습을 응시하는듯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시선. 아마도 나의 이런 차림도 이런 모습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진철이와 선배들을 쳐다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순간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진철이도 엠티 날 잠시 우리가 둘이 되었던 그때에 예전의 우리 모습을 회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날 하려고 망설였던 그 말은 정말 뭐였을까.
혹시 나처럼 가끔 우리가 예전모습으로 돌아간 꿈을 꾼 적은 없을까.
진철이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세계의 유명한 장소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은 미니어처 박물관에 단체 일정이 있었다. 나는 진철이와 선배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의식하며, 최대한 멀리 있는 작품을 먼저 감상했다. 저 멀리 에펠탑 미니어처에서 장난스러운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는 진철이가 보였다.
“우리 같이 영국으로 들어갈 때 파리 경유하자”
그날의 진철이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반 단체사진까지도 난 진철이와 의식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찍었다.
낯선 해외라는 장소적인 이유 때문일까.
지금껏 괜찮은 척 지내온 모든 시간이 무너져 내렸다.
게다가 이 여행은 졸업여행. “졸업” 그 단어의 의미는 그 아이가 곧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듭짓지 못한 사이.
이루지 못했지만 끝내지도 못한 사이.
아니 시작하지도 못한 사이가 더 맞겠다. 해피엔딩이 아닐 거라는 건 예상했다. 그러나 난 이대로 이 아이를 보내도 괜찮을 걸까.
졸업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묘하게 다시 예전같이 서로를 의식하는 기운을 느꼈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우린 서로에게 소울메이트였으니, 이러한 기운은 그 아이도 눈치챘을 것이다.
"지아야.."
수업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진철이가 쉬는 시간에 나를 불러 세웠다. 뒤에 말한 내용은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아이의 목소리. 너무 오랜만이었다.
예전처럼 너무 다정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떨려왔다.
이젠 다가갈 수 없는데,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모든 감각이 다시 작년 봄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예전의 그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
아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너와의 하루가 한 번만이라도 허락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까지.
그 후부터였다. 종우랑 데이트를 하며 들르는 장소들 속에 진철이가 있었다.
월미도에서도, 부평에서도, 자꾸만 그 아이와 앉아있던 장소에 시선이 머물게 되었다.
손은 종우의 손을 잡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자꾸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가장 괴로웠던 건 비 오는 날의 부평 스타벅스였다.
의외로 성실한 진철이는 1호관 발권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학교에 일찍 오곤 했다. 아침에 강의실에 들어가면 진철이가 항상 혼자 와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정도만 나누고 멀리 떨어져 앉아있었는데, 곧바로 다른 친구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어색한 기운이 오래가진 않았다.
그 당시 나는 학교 수업 전에 주안역에 있는 영어회화 학원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학원 수업시간에 카나페를 만들어서 나눠먹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집에서 엄마와 열심히 카나페를 만들었고, 학원에 가져갈 것과 가장 예쁘게 만든 것을 세네 개 정도 따로 담아 가지고 나왔다.
그날은 1호관 발권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가 한창 행복했던 작년 봄,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면 언제나 배고파하던 진철이의 모습이 오랜만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등교 후 1호관에 먼저 와 있을 진철이에게 자연스럽게 전해 줄 생각이었다.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니고, 학원 수업 때문에 만든 거니 줄 핑계도 충분했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주안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오랜만에 수호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들으며, 손에는 작은 타파통을 들고 있었다. 두어 정류장정도 갔을까, 진철이와 남자선배 한 명이 같이 버스에 탔다. 나는 너무 반가웠지만, 진철이와 선배님께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차분히 앉아있었다. 학교 앞 정류장에서 나는 내리려고 일어났고, 진철이는 선배님께 인사를 하고 혼자 일어섰다.
"왜 선배님은 여기서 안 내리셔?" 버스에 내리자마자 진철이에게 물었다.
"아, 선배는 볼일 있어서 다음에 내린데" 나와 진철이는 오랜만에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까지 걸었다.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에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꿈만 같았다.
선선한 가을날의 공기는 작년 봄의 바람이 주었던 내음보다는 씁쓸한 향기로 우리를 감쌌다. 강의실 근처에 다다른 우리는 아직 시간이 일러 오랜만에 야외 벤치에 잠깐 앉기로 했다.
“나 요즘 회화학원 다니거든. 수업시간에 만든 카나페가 있는데 배고프면 너 먹을래?”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해 주었다.
"와 정말?!"
진철이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얼굴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아마 단순히 카나페 때문만은 아니었겠지. 집에서부터 따로 준비해온 게 뿌듯했다. 덕분에 오늘 나란히 걸을 수 있었으니, 그 아이의 미소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족했다.
1호관 수업이 끝나고 바로 옆인 3호관으로 이동했다. 다음 수업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싸이버플라자에 앉아 싸이월드를 하면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까의 여운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기에.
투명한 문 밖에 강의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진철이가 싸이버플라자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옆에 앉더니, 내 반대쪽 이어폰을 빼서 자기 귀에 꽂았다.
예전처럼.
바이브의 ‘사진을 보다가’가 흐르고 있었다.
"이 노래 기억나? 반쪽을 찢었어~ 지금 우리처럼~ "
장난스럽게 따라 부르는 진철이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 있을까. 억지로 장난치듯 따라 부르는 진철이의 모습에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과 그 마음을 어렴풋이 전달받은 느낌이었다.
"지아야 오랜만에 수업 끝나고 PC방 갈까? 지금 레벨 몇이야?"
오랜만에 자연스럽게 게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방과 후에 PC방에 가기로 약속했다.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아이와의 방과 후 약속은 너무 오랜만이었기에.
카나페를 전해줄 때만 해도 그 아이와 나란히 걷던 것만으로 감사했다. 잠깐이어도 그 아이의 미소를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그 아이와 오랜만에 방과 후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수업 내내 딴생각에 잠겨있느라,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니 왜 갑자기 비가 와"
경아가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나 사물함에 우산 있어, 내가 마을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줄게"
나는 경아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줬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내린 가을비는 아까보다 더 짙은 낙엽냄새를 풍기게 해 주었다. 아직은 조금 더운 초가을이지만 이 비로 이 여름도 끝날 것이다.
나는 긴팔 시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허리 부분은 가슴 밑까지 위로 올라와 파란 띠로 둘려있었고, 스퀘어넥에 그레이 바탕에 파란 원형 문양의 무늬들이 공작새처럼 박혀있는 요란스러운 원피스였다. 메트로시티 접는 우산의 로고와 내 원피스는 어울리지 못하고 몇 배는 더 요란스럽게 튀었다.
3호관까지 가는 길목에서 진철이를 만났다. 진철이는 야간반 여자아이들과 남자선배들의 우산을 끼여서 얻어 쓰고 오느라 머리만 간신히 우산 속에 욱여넣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무리에서 빠져나와 내 우산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이제 됐어. 고마워~"
진철이는 야간반 여자아이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진철이에게 우산을 들고 있던 손을 뻗어 빠르게 씌워주었다.
"오~~~~~~~~~~~~~"
진철이와 함께 오고 있던 선배들과 야간반 여자아이들은 스캔들 구경이라도 난 듯 동시에 우리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진철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온 비는 생각보다 거셌지만, 우리 우산은 너무 작았다. 오랜만에 우리는 예전처럼 다 젖고 말았다. PC방에 도착해 같이 게임을 할 때에도 진철이는 계속 춥지 않냐, 젖은 거 괜찮냐는 등 이리저리 챙겨주었다.
PC방에서 나와 오랜만에 마을버스를 같이 탔다.
비 내리는 창을 바라보며 젖은 팔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서로 머리를 감았네 목욕을 했네 주고받던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진철이도 내 쪽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냥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 아이의 갈 곳 없는 두 손은 그날처럼 날 잡아주지는 못했고, 그 모습이 왠지 애처로웠다.
우린 그렇게 각자 생각에 빠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안역에 도착한 나는 진철이가 역에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해 줬다. 개찰구로 들어가는 진철이는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전화하라는 어이없는 말을 남기고 역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주었던 하루였나.
갑자기 내린 비는 그렇게 언제나 우리를 다시 예전처럼 데려가는 걸까.
앞으로 수많은 비 오는 날들을 만나며 그 아이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래도 너무 감사한 하루다.
그 아이와의 하루가 실현되었으니. 우리가 같이 비 내리는 날 다시 한 우산을 썼으니, 웃는 얼굴로 서로 장난을 치며 게임을 즐길 수 있었으니. 그동안의 아픔을 모두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아무 욕심을 내고 싶지 않았다. 함께 비를 맞았단 그 사실만으로 이대로 충분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