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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_ 너와의 하루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날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by 윤지아

진철이와의 관계를 회복한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 아이와 추억을 더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다행이다가도, 떠날 날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와 슬퍼지기도 했다.

물론 진철이와 다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찬란했던 작년 봄, 여름의 그 선선했던 바람을 기억하느냐고, 우리가 함께 보였던 그날들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마무리를 짓기 위하여, 시작부터 되짚어 보아야 하는 것이니까.

게다가 이미 한번 상처 입힌 종우에게 다시 같은 아픔을 반복하게 할 수 없기에, 종우가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진철이와의 남은 한국에서의 약속된 시간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감정의 장애물들 가진 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철이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 조심스러워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서로를 의식하며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망설이며 그냥 스쳐 보냈다.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은 숙제처럼, 그렇게 언젠간 해야 할 일정도로 남겨 놓고 서로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 잡았다.



이제는 제법 추워진 11월.

드디어 우리는 방과 후 약속을 잡았다.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이다.

최근에 바꾼 휴대폰 배터리가 문제가 있어 교환하기 위하여 동인천에 갈 일이 생겼는데, 진철이가 따라오겠다고 한 것이다.

우린 서로 무거운 마음을 감추고, 하교 후 같이 지하철을 타고 동인천으로 이동했다.

이런저런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별일 아닌 양. 자연스럽고 우연한 동행인 듯.

우리는 둘 다 풀어야 할 마음의 짐을 숨기기 위하여 더 장난스럽게 떠드느라, 지하상가 입구까지 마중 나온 휴대폰가게 사장님을 못 보고 지나쳤다.

이번에 새로 바꾼 휴대폰도 SKY다. 베이비핑크색 프레스토 휴대폰의 배터리를 새것으로 교환받고 나니 볼일이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배 고픈데 밥 먹고 갈까?”

웬일로 진철이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예전에도 데이트할 때 밥이 아닌 커피만 마셨기 때문에 같이 밥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럼 여기 즉떡집 갈래?”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간 즉석떡볶이집으로 진철이를 데리고 갔다.

오랜만에 찾은 즉석떡볶이집은 고등학교때와 그대로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엔 온갖 낙서가 한가득이었다.

익숙한 장소 속에서 느껴지는 어색함.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매일같이 오던 이 장소에 미래의 내 소울메이트와 같이 다시 오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진철아 너 언제 여기 왔었어? “

나는 진철이 이름이 쓰인 벽의 낙서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어색함을 덜기 위하여 나는 평소와 달리 말이 더 많아져버렸다.

생각해 보니 종우와 있을 때는 말이 많던 나인데, 진철이와 만날 때면 언제나 난 듣는 쪽이었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내가 더 많이 떠들고 있는 것이다. 이 어색함을 채워서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오늘은 둘 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에.

밥을 다 먹고 나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럽게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쪽으로 걸었다.

오늘 방과 후 만남의 진짜 목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겠지.

잡지 못하는 손을 서로 어색하게 흔들며 천천히 자유공원의 언덕을 올랐다.

“우리 자유공원 온 거 오랜만이다 그치?“

진철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조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래. 바로 이런 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러게, 작년 봄에 오고 처음이네”

그렇게 난 작년 봄에 대하여 언급했다.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그 누구도 다시 언급하지 않았던 그때에 대하여.

때마침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매듭을 풀어내기에 아주 적절한 시간대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저무는, 하늘과 바다가 같은 색으로 풀어질 그 순간에 말이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 시간대에 말이다.

언제 시작했는지, 아니 시작한 적이나 있었던 것인지

끝낼 것이 있기는 한지, 마무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건지 모든 경계가 모호한 우리 사이에 대하여 이보다 더 좋은 풍경이 있을까.

다 오른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의 풍경은 예상대로 검푸른 바다와 해 질 녘의 붉은 하늘이 아름답게 뒤엉킨 모습이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경계와 사이사이 커다란 선박들이 어우러진 그 풍경.

고등학교 때 야자를 빼먹고 달려 나와 언젠간 꼭 글을 쓰는 일을 하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호흡하던 그곳.

행복한 꿈을 응원하듯 한없이 아름다웠던 저 바다와 하늘은 이제는 꿈을 뒤로한 채 세상에 맞춰 재조정하고 타협하러 온 나를 이해한다는 듯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지는 붉은 노을색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그조차 여전히 아름다운 것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 동안 바다만 바라보다가 맥아더동상 앞 벤치에 앉았다.

“난 편입 준비를 할지, 어학연수를 갈지 고민이야.”

최근 항공사 면접에서 떨어진 나는 힘 없이 말했다. 경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여자동기들은 모두 항공사에 붙었고, 나를 비롯하여 떨어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탈락원인이 낮은 토익점수와 영어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하고 싶던 일도 꿈도 아니긴 했지만, 막상 떨어지고 나니 우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항공사 합격 발표가 있던 날 학교 근처에서 다른 친구들과 때마침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불합격 소식을 접하고 난생처음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다. 취한 채 후문 근처 벤치에 앉아있다가 종우가 나를 찾아 나온 일이 떠올랐다.

훗날 생각하면 모두 한심한 모습이겠지만, 그땐 그게 전부인 양 그랬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의 내 꿈들이 아직 가득 펼쳐져있는 듯한 이곳에서, 그것도 종우가 아닌 진철이 앞에서 하게 되다니.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나 다음 달 5일에 영국 들어가. “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음 달이구나. 이제 정말 닥쳤구나.

이루지 못한 꿈과 진철이가 떠난다는 소식이 더해져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번 겨울에 같이 일본 안 갈래? 일본 경유해서 들어갈 생각이거든 “

진철이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이제는 영국을 같이 들어가자고는 못하네’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국 들어가면 너 많이 보고 싶을 거 같아. 너 보러 한국 자주 나올게 “

조금은 직설적이지만 담백한 진철이의 이런 화법이 오늘은 차라리 깔끔하게 느껴졌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요한 바다와 선박의 불빛만 응시했다.

어차피 이 아이의 달콤한 말들은 한 계절만 유효할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저 아름다운 노을도 오늘 이 시간에만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것처럼. 찰나의 아름다움은 그저 지금만 즐기면 되는 것이니까. 작년 여름에 입은 상처가 다 치유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흉터로 남은 것처럼 우리 사이에 풀지 않은 매듭은 결국 허공의 말들이 되어 떠다닐 뿐 아무것도 유효하진 않았다.

조금은 추워하는 나에게 진철이는 자기 머플러를 풀어서 나에게 둘러주었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로 하고 언덕 위에 있는 파랑돌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헤이즐럿을 진철이는 아이리쉬 커피를 시켰다. 아까 밖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의 풍경은 카페의 큰 창을 통하여 더욱 고요하게 보였다. 카페 안에서는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고요한 밤바다의 풍경과 커피 향까지 더해졌다.

“지아야. 정말 미안해. “

진철이가 적막을 깼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지난봄 여름 우리의 찬란했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면,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쩌면 강제로 지워버린 그 해 여름의 사건을 말할까 봐. 또는 내가 모르는 진철이의 잘못을 오히려 알게 될까 봐.

그렇게 기다렸던 시간이었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사이의 매듭을 풀려 시작한 대화는 결국 풀 매듭 자체가 이미 없기에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에게 진철이는 여전히 좋은 기억일 뿐이다. 우리가 멀어지게 된 그 사건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고, 내 스스로 그렇게 좋은 기억만 남기기로 기억이 조작되어 있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혹시 그날 수화와 있었던 일에 대하여 말하려는 걸까.’

그 사건에 대한 새로운 무엇인가가 추가되면, 내 조작된 기억들과 모든 내 착각이 깨져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지아야 용서해 줘... “

진철이의 사과는 진실했지만, 나는 굳이 그 사과를 받아주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진철이는 작년 봄 여름 나에게 행복한 단꿈이었고, 감사한 존재였다.

나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사과하는 진철이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괜찮다고 할 수도, 용서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왜 그랬냐고 다그칠 필요도 당연히 없었다.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내 눈빛은 충분히 진철이에게 그 의미를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우리 관계의 매듭을 푸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그저 이렇게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공간에서 커피 향을 맡으며 시답지 않은 몇 마디 나누는 것.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들에 대한 문책보다는 남은 시간 속에서 일상에 더 집중하고 싶을 뿐이었던 것이다.


우린 카페에서 나와 예전처럼 인천역까지 걸었다.

11월의 날씨는 꽤 쌀쌀했지만 진철이의 목도리를 두르고 있어서 따듯했다. 우리는 인천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부평으로 넘어왔다. 걷다 보니 첫 키스를 나눈 장소에 다다랐다. 오랜만에 찾은 부평역 광장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때와 달리 밤공기는 찼다.

예전에 앉았던 벤치에 앉아, 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지만, 진철이는 듣는 둥 마는 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는 잠깐 고민하는 듯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나 사실 할 말이 있어.”

진철이가 어렵게 말을 꺼내 장난스럽게 떠들던 내 이야기를 끊어내었다.

“.... 하지 마”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흐르는 적막 속에 부평 밤거리의 여러 소리들이 겹쳐 들렸다. 이 풍경 속의 시간이 멈춘 느낌이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두려워서 못하겠다... ”

진철이는 고개를 돌려 역을 응시하며 조금은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

진철이가 말을 이었다.

“하지 마. 안 들을게 “

나는 다시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두려워서 할 수 없다는 그 말은 아마도 나도 듣기 두려운 말임이 틀림없다.

듣고 나면 예전처럼 다시 대책 없어질 그 말이 너무나 뻔하고 두려워 나는 결국 끝까지 말을 막았다. 무엇보다 한번 더 이 아이에게 빠지게 된다면, 회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간신히 아문 상처를 다시 후벼 파게 놔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아이는 다음 달에 한국을 떠날 아이니까. 어차피 내 곁에 없을 바에야 오늘만 유효한 그런 약속 따위로 내 마음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나는 말을 돌려 좀 전처럼 가벼운 장난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오늘은 진철이보다 내가 더 장난기가 많았다. 진실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을 숨기고, 이렇게 그저 오늘은 행복하게 이 아이와의 하루를 보내면 그걸로 충분했기에.

진철이는 장난치는 나에게 예전처럼 까부냐며 장난스럽게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진철이의 두 손은 내 어깨를 잡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강하게 잡지는 못했고, 조심스러웠다. 그 눈빛에서 작년 그날의 눈빛을 보았다. 다시 작년 그날처럼 키스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멈춰야 했다.

그 아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다시 자연스럽게 장난스러운 대화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우리답지 않은 이런 모습이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최면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 1년 만에 다시 허락된 이 날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일기에 빼곡히 기록했다.

그 아이가 떠나기 전 다시 추억의 장소를 되짚어볼 수 있어서, 그 아이의 눈빛을 다시 느껴볼 수 있어서 그걸로 충분했다.


그때 진철이가 하려던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건 잘한 행동이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진철이가 떠나면 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그런 가벼운 인연은 아니었다. 그 인연의 끝은 생각보다 아주 먼 미래까지 이어져있었기에.

그럼에도 내가 이 날 하루를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불완전했고 절제된 하루였기 때문일 것이다.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날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우린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장소에 예전과 다른 태도로 걸었지만, 그 절제된 행동 속 마음을 통제할 수 있어 좋았다.

불완전했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