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흘려보낸 시간들 속에서도 우린 계속 함께였다.
어김없이 나는 그날 이후 감기에 된통 걸려서 며칠간 고생했다. 감기에 걸린 이유는 단순히 감기기운이 심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종우와의 정리에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인 것도 있다.
만나서 말할 자신이 없어, 문자로 다른 사람이 생겼음을 알렸다.
처음 사귀게 된 순간도 종우가 문자로 고백했었는데.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진철이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종우에게 희망고문을 하게 할 수 없었다.
종우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다린다고 했다.
처음 해 보는 이별. 아무리 좋은 이별도 좋을 수 없을 텐데. 내가 알린 이별은 최악 중 최악일 것이다.
이후 주일날 교회 복도에서 마주친 종우에게 나는 잔인하게도 밝고 평범하게 인사를 했다.
종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를 지나갔다.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며 감기는 더 심해졌다.
월요일 강의 시간에 나는 아파서 수업에 집중할 수조차 없었다.
"지아야, 이거 받아....."
고개를 들어보니 수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이게 뭐야? "
약봉지였다. 수화가 아픈 나를 위해 약을 사서는 간단한 편지와 함께 전해주었다. 예쁜 얼굴만큼 예쁜 마음씨와, 예쁜 글씨체.
"우와. 정말 고마워.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나는 부스럭거리는 약봉지를 받아 들었다.
"아니야. 네가 아픈데 당연히 이래야지. 얼른 약 먹어. 내가 물 떠 올게!"
복도 정수기를 향해 나가는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의 수화를 바라보았다. 문 앞에는 막 등교한 경아가 서 있었다. 나에게 다가오던 경아는 방금 전 우리 둘의 모습을 보았는지 아닌지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 수업 끝나고 개강파티가 있습니다! 다들 마지막 수업 끝나고 보물섬으로 모여주세요!" 반대표가 짧게 미리 종례를 했다. 다행히 나는 수화가 준 약을 먹고 상태가 많이 나아져서, 언제나처럼 잠깐 얼굴만 비추고 올 생각으로 개강파티에 참석했다. 나는 수화와 경아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진철이를 찾았다. 같은 테이블이지만 맞은편 쪽 끝에 앉아있는 진철이를 발견했다. 진철이는 이번에 복학한 여자 선배들에게 열심히 애교를 떨며 이쁨을 받고 있었다.
역시 진철이의 존재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으로 다가와 언제나 화젯거리이긴 했다. 나는 진철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눈앞에 보이는 진철이는 내 문자를 확인한 듯 휴대폰을 한번 열었다가 닫았다. 그러나 내쪽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나 종우랑 헤어졌어. 진철아. 이제야 온전히 너에게 가서 미안해"
느낌이 이상했다.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 아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울메이트라 확신한 진철이의 반짝이는 그 눈빛의 마법이 사라진 것 같은 싸늘한 느낌.
나는 한번 더 문자를 보냈다.
"내가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제는 다신 너 힘들게 안 할게"
진철이는 다시 휴대폰을 열어보고는 그대로 닫았다. 기분 탓이라기엔 그 아이의 주변의 공기가 지나치게 차가웠다. 더 이상 내가 아는 그 아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감기기운과 어지러움에 잠깐 일어나서 화장실을 다녀왔다. 솔직히 나는 진철이가 지난번처럼 따라 나오거나 걱정해 줄줄 알았다. 그러나 나를 따라온 사람은 진철이가 아닌 수화였다.
"지아야 괜찮아?"
수화는 걱정되는 듯 나에게 물었다.
"응 괜찮아. 얼른 들어가자"
나는 수화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너무 기다리게 만들어서 진철이가 토라진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나의 착각일까.
아니다. 착각이라기엔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보낸 날들 속에서도 느껴졌었던 나를 사랑하는 기운 자체가 그 아이의 주변에서 아예 사라진 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곱씹고 곱씹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철이가 미소 띤 얼굴로 문자를 보내는 듯 휴대폰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송을 했는지 휴대폰을 닫았다. 내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아무 문자가 오지 않았다. 그 순간 옆에서 수화가 문자를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미소 띤 얼굴로 답장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진철이를 바라보았다. 진철이는 다시 문자를 확인하며 입가에 미소를 숨길 수 없는 듯 행복한 표정으로 다시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수화 역시 그 이후 계속하여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진철이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아야, 너 몸도 안 좋으니까 그냥 가자. 나도 이쯤에서 미리 빠지려고"
경아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수화는 좀 더 있다 가겠다며, 경아와 나를 배웅해 주러 나왔다.
"지아 잘 데려다줘 경아야! "
수화는 너무나도 천사 같은 얼굴로 걱정스럽게 우리를 배웅해 주고는 다시 술집으로 총총 들어갔다.
경아는 데리러 온 남자친구 차에 타라며,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평소에 언제나 하이톤에 시끄럽던 경아는 온데간데없고 이상하리만큼 조용히 집까지 왔다.
다음날 나의 몸상태는 한결 나아졌지만, 마음은 더 심란한 채 강의실에 들어섰다.
어제 진철이의 그 태도는 뭘까. 내 문자를 씹은 것도 그렇지만, 그 사랑이 가득한 표정으로 문자를 주고받은 사람은 그럼 내가 아니고 누구였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했는데.. 나에게 어떤 세기의 고백을 했는데.. 그럴 리 없다.
강의실 문을 열자 진철이와 마주쳤다.
"진철아, 잠깐 얘기 좀 해"
나는 진철이의 팔을 끌고 복도 끝 흡연실로 들어갔다. 이상했다. 다정했던 그 아이가 낯선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아무 메시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래? 왜 내 문자에 답장 안 해?"
나는 이미 잘못됨을 느꼈으나 확인하듯 다그쳤다.
"아니야. 그런 거…"
진철이는 대답을 피했다. 몇 마디 짧게 부인하더니, 볼일이 있다며, 빠르게 나와의 대화를 마치고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깥을 응시했다. 내가 저랬었나.
내가 한 그대로 돌려받는 건가. 결국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나에게 질려버려서, 마음이 떠났나. 말도 안 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꽉 나를 안아주며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날 하루종일 나는 수업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고 경아는 나에게 카페에 가자고 했다.
경아와 둘이 카페를 온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진철이와 가깝게 지낸 후 경아와 둘이 얘기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지아야, 수화랑 가깝게 지내지 마."
잔꽃무늬 베이지색 소파가 편안 해 보이는 카페였다. 커피를 주문한 경아는 점원이 주문을 받고 나가자마자 정적을 깨고 단호하게 말했다.
"응? 수화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나 아프다고 약사온 것도 봤잖아."
나는 경아의 의외의 말에 당황하며 물었다.
"어. 그래서 더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하는 거야.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그것보단 나을 것 같아."
경아는 내가 아팠던 그 며칠 사이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내가 종우와 정리하고 힘들어하며, 하교 후 그냥 집에 갔던 그 며칠 사이 수화와 경아는 하진오빠 진철이와 함께 넷이서 당구장과 노래방에 갔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화가 적극적으로 진철이에게 다가갔다는 이야기. 지아는 남자친구가 있지 않냐며, 일부러 강조하듯 내 처지를 각인시키며, 진철이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한 이야기. 그리고 개강파티 이후 경아에게 했던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경아야. 진철이가 개강파티 날 취해서 몸을 못 가누는 나를 자취방까지 데려다줬는데. 나한테 너무 들이대길래. 내가 지아 때문에 미안해서 안 되겠다고 거절했어~"
이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경아는 지금까지 중간에서 나에게 잘해주는 수화의 뻔뻔스럽고 이중적인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복학생 여자애들한테 들었는데 수화가 휴학했던 거, 남자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 것 같더라고.. 원래 그런 아이였나 봐. 가까이 지내지 마"
나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수화의 배신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운명과도 같았던 진철이가 흔들렸다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그동안 나의 마음을 바라며 많이 힘들었던 걸까. 아니면 남자들은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가 자취방으로 끌어들이는 유혹에는 당할 수 없는 것일까. 진철이에게 실망감이 몰려옴과 동시에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도 같이 몰려왔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재지 않았더라면, 힘들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쉽게 다가온 지나가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자책은 다시 원망으로 다가왔다. 아니다 종우였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진철이는 그런 아이였다고, 애초에 알고 있지 않았냐고. 우리는 서로 정 반대의 성격이었고, 그저 진철이는 저렇게 흘러가는 대로, 오는 여자 거절 못하고 그때그때 즐기면 되는 그런 성격의 아이였다고. 나 혼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내 평생의 사랑과 헤어지는 과오를 범했다고 그렇게 증오하고 원망했다.
나는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정확하게 자업자득이었다.
그날도 종우는 답장 없는 나에게 의미 없는 문자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종우에게 잠깐 흔들렸었다고 미안하다고 답장했다. 뻔뻔스럽게도.
그러나 종우는 기다렸다는 듯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었다.
나는 지난봄, 여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나 종우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돌아왔으니까. 그리고, 나 없는 동안 너를 외롭게 하지 않은 그 사람에게 오히려 감사해."
그렇게 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후 진철이와 나는 같은 공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한 채 남은 2학기를 보내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냈다.
종우와 주안역 지하상가를 걷고 있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근데 전화를 한 상대는 너무 의외의 사람이었다.
"나 진철이 아빠 되는 사람인데요. 혹시 진철이랑 같이 있나요? 밤새 연락이 안돼서요."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네? 누구시라고요?”
난 그 와중에도 목소리가 참 자상하다 생각했다.
"아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에요. 그냥 솔직히 말해줘도 돼요~ "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당황스러웠다. 난 아니라고 대답하고 수화라는 아이와 있었을 거라고 알려주고 끊었다.
“왜 그래? 누군데?”
지하상가 한복판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있는 나에게 종우가 물었다.
난 종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곧바로 진철이에게 전화했다.
아직도 최근 통화목록에서 사라지지 않은 그 아이의 이름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떨림으로 눌렀다.
“여보세요”
오랜만에 듣는 전화목소리. 여전히 약간은 중저음에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
“나 지금 너희 아빠 전화받았어.”
내가 왜 이런 전화를 받아야 하냐고 화를 냈다.
“미안하다…”
진철이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미안한 듯 낮고 차분했다. 그 점이 나를 더 짜증 나게 했다.
나는 진철이와 밤을 보낸 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아빠가 나를 그렇게 취급한 것에 대하여 화가 났지만, 반면 진철이의 아빠가 내 번호를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가슴이 시리기도 했다.
하긴 그렇게나 빠르게 나에 대한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으니, 문자나 최근 통화기록 같은 다른 모든 정황이 그 아이의 사랑은 아직 나라고 가리킬만했다.
난 그 일을 겪고도 진철이에게 화 한번 내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감정이 한꺼번에 차올라 소리를 질렀다.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그 아이의 사과하는 목소리에 내 이성은 고삐를 잃었고, 더 화를 내게 만들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냈다.
네가 그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것에 대하여, 난 뭐라고 말할 기회도 없었다고.
그런데 적어도 너의 아빠에게까지 나를 그런 가벼운 여자처럼 보이게 하는 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고.
나는 그렇게 종우 옆에서 진철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화를 내본 적은 처음이었고, 그런 나에게 사과하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항상 사과는 내가 그 아이에게 했었는데, 모든 게 뒤바뀌어버린 걸까. 아니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인 걸까.
신기한 점은 그날 이후 진철이와 수화가 같이 있는 것을 본 적도 없고, 둘이 대화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를 대하듯 수화도 피하는 느낌이었다.
며칠 뒤 수화는 하진오빠와 같은 커플링을 끼고 있었다.
수화의 꽃뱀 같은 행동은 같은 반 여자아이들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고, 모두 수군거렸다. 수화는 얼마못가 또다시 휴학을 했다. 작년에 무슨 일로 휴학을 했던 건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수화에게 오히려 난 고마웠다.
덕분에 진철이의 가벼운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충분히 도움을 준 친구라고 생각했고, 원망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학교 가는 마을버스 안에서 진철이가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고 같이 들었던 노래가 있었다.
수호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곡이었다. 설레고 뜨거운 봄 여름이 가고 서먹한 권태의 가을이 오고 겨울에 다시 사랑을 회복한다는 내용의 곡이다. 가사 중에 근육질 남자가 든든해 보인다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들려주며, 너도 그러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몸이 좋았던 하진오빠를 의식한 질문이었지만, 난 그 음악의 빠른 랩에(요즘 노래에 비해서는 아주 느리지만) 가사를 못 듣고 지나쳤었다.
결국 우리 사이가 그 노래가사처럼 되어버렸다.
찬란한 봄 여름을 보내고, 그 해 가을 우리는 서먹한 수준을 뛰어넘어, 무시하듯 아예 각자 다른 무리 속에서 지냈다. 나는 복학한 여자친구들과 경아와 함께 어울렸고, 진철이는 복학한 남자 선배들과, 야간반에서 청강을 올라온 두 명의 여자아이와 함께 다녔다. 한 명은 키가 아주 작은 친구로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키가 아주 크고 잘 웃는 여자아이였다. 키가 작은 편인 진철이가 그 야간반 여자아이들과 함께 다니는 모습은 꽤나 안 어울렸다.
그 해의 가을 겨울은 빠르게 지났고, 같은 공간이었지만 진철이에 대하여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생각보다 마주치게 되지도 않았고, 수업이 끝나고 놀다가 들어가는 일 없이 바로 집에 가거나, 종우랑 데이트를 하러 가곤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종우와 행복하게 보냈고, 모든 것은 다 제자리로 돌아온 듯 보였다.
그렇다.
이렇게 1년만 더 지나면 이제 저 아이와 마주칠 일은 없게 된다.
제한된 인연이여 슬펐던 시절의 기억도, 고민도 모두 지금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내년 겨울이면 진철이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군대 문제 때문이라도 한국에 더 머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2학년이 되었고, 07학번 새내기들이 입학했다.
학기 초 엠티는 모두 기대하는 큰 행사였다.
"자 다들 엠티 조 짠 거 나왔으니까, 확인해 주세요~"
반대표 선배가 가볍게 종례를 하며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우르르 강단으로 몰려갔고, 조편성을 확인한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철이와 같은 조로 편성된 것이었다. 같은 조 다른 남자 선배들은 비교적 친한 선배들이라 상관없었지만, 진철이랑 같은조라고 생각하니 오랜만에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왔다.
하지만 이미 반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별다른 감정 없이 잘 지내지 않았는가. 이번기회에 차라리 다시 예전처럼 친구로 돌아가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애써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지막으로 진철이와 대화를 해 본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주안역 지하상가에서 했던 통화가 마지막 대화였다.
그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나.
그게 그렇게까지 사과를 할 일이었나.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본 그때의 사건은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느껴졌다. 그저 행복했던 봄, 여름날의 추억이었고,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는 크게 기억에 남지 않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행복했던 기억만 남기고, 가슴 아팠던 일들은 기억에서 지우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기억만 남는다는 말을 나는 작위적으로 참의 전제로 성립시킨 셈이다. 생각해 보면, 지나간 두 계절이 완전히 괜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진철이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주안역을 가지 않거나, 집에서 학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이나 걸려서 등교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몸을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는 있어도, 추억이 떠오르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1시간 넘게 버스 안에 갇혀 지나가는 차창밖풍경을 바라볼 때면 속수무책으로 그 아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특히 바닷물이 들어오는 하천이 있는 부근을 지날 때면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코끝으로 바닷물 내음을 느꼈다. 그럴 때면 더욱 비 오는 월미도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난 두 계절 간 행복했던 시간들에 대하여 잊지 않으려 충분히 곱씹느라,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던 것이다.
오히려 그날의 기억을 변형시키거나, 아예 잊으려 하는 바람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쁜 기억이 조작되어 버렸다. 그렇게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 커서 그 기억만으로 충분히 모든 게 괜찮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랬었다.
우리는 엠티 때의 준비물을 서로 나누기 위하여 조별로 모였다. 나는 드라이어를 가져오면 됐고, 남자선배들은 요리는 자기들에게 맡기라며 프라이팬에 조리도구에 커다란 짐들을 맡았다. 진철이와 나는 별다른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일부러 눈을 피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무리에 끼어 있는 동급생으로, 딱 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 여름 이후 진철이의 스타일은 많이 바뀌었다.
반테안경은 까만 뿔테안경으로 바뀌었고, 털모자를 눌러쓰거나, 챙이 짧은 모자를 자주 쓰곤 했다.
차분히 내린 앞머리에 맑은 눈을 돋보이게 했던 반테안경이 아닌 진철이는 더 이상 봄내음 풋풋했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가을남자의 모습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그 모습이 아닌 진철이이기에 과거의 그 아이는 지금의 이 아이가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대하듯 자연스레 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망의 엠티날
07학번 후배님들은 야외에서 단체 행사를 마치고 방으로 복귀한다고 했고, 선배들은 방에서 07학번 새내기들이 돌아올 때까지 음식을 준비하도록 되어있었다.
"지아야, 진철이랑 요 앞에 마트에 가서 쌈장이랑 과자 몇 개만 더 사 와봐. 산다고 샀는데도 없는 게 있네"
선배는 난감해하며 우리에게 카드를 들려주었다.
얼떨결에 진철이와 나는 간단한 물건들을 사러 나왔다.
며칠 전 갑자기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3월에 눈이라니, 별일이지?”
선배가 준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엠티 행사에 대한 이야기, 우리 조 후배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
무심코 내 후배라는 단어를 사용한 나에게 “걔네가 왜 니 후배냐 내 후배지! “라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 완전 한국사람 다 됐네'라고 생각했다.
심부름을 다녀와보니 선배들은 다들 신입생 행사 지원을 위하여 나간 상태였고, 나와 진철이만 텅 빈 방에서 장 본 것을 풀어놓고 거실에 앉았다.
고요한 적막에 기분이 조금 이상해지려는 차, 진철이는 TV를 틀었다.
우린 둘 다 말없이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았다.
이것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텅 빈 낯선 집 거실에서 둘이 TV앞에 앉아있자니, 마치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신혼부부 같은 느낌이었다.
"다들 어디가신 걸까?"
어색한 정적을 깨기 위하여 내가 진철이에게 말했다.
"그러게………. 근데 이거 진짜 좀 기분 이상하다..”
진철이가 어색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만 이상하게 느껴진 게 아니었구나, 우리가 작년 이맘때 만약 이루어졌더라면, 정말 훗날 이런 풍경을 기대해 볼 수도 있었던 것일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예전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아야, 혹시…”
진철이가 다른 무슨 말을 꺼내려하는 순간 선배들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07 애들 오기 전까지 요리 다 끝내야 해! 빨리 다 주방으로 와”
선배들과 남자들은 모두 요리를 하느라 우당탕거렸고, 여자들은 테이블 세팅을 했다. 일회용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던 나는 아까 진철이가 불러준 내 이름의 어감이 떠올라 조금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가 말하려고 했던 그다음말은 과연 뭐였을까.
그 엠티 이후 나는 진철이와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라는 표현자체가 정확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작도, 끝도 그 무엇도 한적 없었으니.
지난가을, 겨울 동안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한 게 아니었다.
그냥 흘려보낸 시간들 속에서도 우린 계속 함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