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강물처럼 시간은 흐르고 흘러 결국 이렇게 여기서 안녕
그다음 날 난 진철이의 목도리를 돌려주려 손에 쥐고 1호관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심장이 멎을 뻔했다. 나가려고 문 앞에 서있던 진철이와 딱 마주친 것이다. 진철이는 무슨 일인지 까만 정장에 반테 안경을 끼고 작년 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었다.
"아 이거.. 돌려주려고.."
나는 진철이에게 어색하게 목도리를 내밀었다.
"아 나 오늘 가방을 안 가지고 와서, 네가 더 가지고 있어 줘"
결국 난 목도리를 돌려주지 못했다.
"대신 그 목도리 하고 내일은 명동이나 갈까?"
진철이가 환하게 웃으며 다음 약속을 제안했다.
어제로 멈췄어야 했는데, 난 돌려주지 못한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11월의 서울은 추웠지만, 진철이가 벗어준 외투에, 목도리까지 하고 있던 난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여느 겨울보다 따듯했다.
우리는 시청을 지나 예전에 함께 걸었던 청계천까지 걸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처음의 시작 지점인 이곳.
계절의 처음. 모든 것이 푸르렀던 청계천은 계절의 마지막을 향해 차갑지만 여전히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사실 청계천에서 니 손 잡고 걷고 싶었어."
"그래? 근데 왜 안 잡았어?"
"그랬다간 너한테 한 대 맞을 것 같았거든"
청계천 아래로 내려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진철이는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그 해 여름 후회했던 자신의 그 말에 대하여 보상이라도 하듯
남은 시간 후회 없이 매듭짓기 위한 세리머니처럼
자연스럽고도, 결심한 듯 그렇게 우린 손을 잡고 걸었다. 진철이의 손은 따듯했다.
‘우리의 마지막은 시작과 같은 청계천이구나.’
청계천 강물처럼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국 이렇게 여기서 떠나는구나.
‘안녕, 그리고 안녕’
그렇게 우리는 청계천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공유했다.
청계천을 따라 천천히 걸어 도착한 명동은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우리는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빈스빈스 카페로 향했다. 사보이 호텔 안쪽 2층에 위치한 조용한 곳이었다.
카페에 들어선 진철이는 그제야 따듯한지 얕은 입김을 내뱉었다.
바보같이 나한테 옷을 벗어주고는 저렇게 떨다니,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소파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손을 꼭 잡고 마주 앉았다.
그렇게 우리는 이 시간이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할 수 있는 말은 잘 가라는 말뿐.
끝까지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했다는 말도, 널 따라 영국으로 가고 싶었다는 말도. 보고 싶을 거라는 말도.
확신도 자신도 없었다.
확실한 건 그저 지금 내 눈앞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맑은 눈빛의 이 아이를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난 잡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잊지 못할 거라는 것 정도였다.
그날 나는 진철이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왜 계속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무슨 의미의 눈물일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사랑했던 기억에 대한 아쉬움일까. 아쉬움이 아니라면,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혹시 여전히 난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진철이는 그런 날 그저 바라보며 말없이 손만 꽉 잡아줄 뿐이었다.
그날 진철이는 나 때문에 감기에 걸렸고, 다음날 나는 목도리를 돌려주었다.
12월 4일 그 아이의 출국 하루 전날이다.
조금은 씁쓸한 마음에 집에서 일기장을 뒤적거렸다.
행복한 날의 기록만 기록한 나의 일기장. 명동에서의 그 아이와의 데이트를 기록한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고작 두어 장 남짓한 종이에는 내 감정의 1/10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기록이라도 붙잡아 두면, 읽는 동안은 그때의 그 공기와 차갑던 바람이 느껴질 테니까.
글은 추억을 가두기에는 한없이 작은 그릇이다. 그래도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 목도리.
괜히 돌려주었다. 목도리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 기억의 촉감이라도 되살릴 수 있었을 텐데.
새삼 아쉬운 생각이 드는 찰나 진철이에게 문자가 왔다.
갑자기 마비노기에 들어오란다.
‘게임이라니. 이게 뭐람.’
마지막으로 게임이나 한판 하자는 건가. 의외의 연락이었지만 빠르게 게임에 접속했다. 게임 아이디 창에 모르는 펫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웬 펠리컨?.....'
자기가 보고 싶을 때 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진철이가 준 선물이었다.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인사 참 유치하기 짝이 없네. 이진철답다~”
난 투덜거리면서도 펫 이름을 '런던으로'라고 지었다. 누가 더 유치한 건지 모르겠다.
PC방에서 데이트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진철이 다운 마무리다.
게임에 접속한 후, 진철이의 마비노기 캐릭터를 만났다. 가상공간에서의 마지막 인사. 명동에서의 마지막과 사뭇 달랐지만, 한여름밤의 꿈같은 진철이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에 현실이 아닌 가상의 에린은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지구반대편에 살던 그 아이가 평범한 나를 사랑해 준 것은 정말 비현실적인 일이었으니까.
우리의 방과 후 핑곗거리였던 게임 속 우리도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진철이는 다음날 출국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지된 그 아이의 휴대폰 번호로 전송되지 못할 메시지를 보냈다.
"진철아 사랑해... 잘 가"
메시지는 전송실패로 돌아왔다. 그럴 줄 알면서도 괜히 그래보고 싶었던 것이다.
끝내 말하지 못했던 내 마음. 전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이렇게라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살면서 이런 사랑은 다시 못 만나겠지. ‘
그 여름 노래방에서 불렀던 타이타닉 OST처럼 나에게는 진철이와 보낸 이 시간들이 평생을 이끌고 갈 여운의 기억일 것이다.
이미 예전부터 만나기로 예정되어있던 운명 같은 만남.
눈빛만 보고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던 너와의 그 언어들.
어떻게든 만나졌을 인연. 그 아이는 나에게 소울메이트였다.
제한된 시간 속 이루어질 수는 없었지만, 들판에 핀 장미처럼 그저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 더 아름다웠던 그런 사람.
들판에 필 장미는 매년 여름 다시 볼 수 있을 테니, 언제든 난 그 아이를 그렇게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졸업 후 2008년과 2009년은 나에겐 어두운 시절이었다.
그 아이와의 추억이 가득한 주안역 근처에 위치한 편입학원에 하루종일 처박혀있었다. 졸업 후 나는 운이 좋게도 대기업에 입사하였지만 1년 만에 관두고 편입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어릴 적에는 대학만 졸업하면 꿈을 이루든 실패하든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나오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꿈을 향한 여정은 생각보다 길고 어쩌면 평생 동안 진행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꿈의 실현에 대한 정의를 하기에 삶은 너무 복잡했기에.
편입건물 4층 여자 화장실에 작게 난 좁은 창으로 전철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예전 자유공원에서 진철이와 나누었던 꿈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났다. 어쩌면 난 그 아이를 따라 영국에 갔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지금 난 편입학원 화장실에 서있다. 이런 내 모습이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꿈을 꾸곤 했다.
언젠가 그 아이를 만나면 꿈을 이룬 행복한 내 모습을 보여줘야지.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만나면 우리는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꿈을 이루는 것도, 그 아이를 다시 만나는 것도 모두 불확실한 한 해였다.
그러나 어두운 밤하늘에도 하얀 구름은 열심히 흘러가듯, 이 시기에도 난 열심히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행복했고, 그 아이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힘을 얻었다.
1년의 시간이 지나 난 편입에 성공했고, S여대 법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난 다시 꿈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