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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_ 핫팩, 그리고 핸드크림

벌어져버린 시차만큼이나 다른 기억 속의 우리

by 윤지아

그렇게 우리는 부평 분수대 앞에서 만났다.

진철이는 다소 피곤해 보였으나, 어제처럼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제는 만나자마자 허깅을 해 주었지만, 두 번째 날인 오늘은 만나자마자 자연스레 손을 잡고 걸었다.

부평 한복판에서, 이렇게 다녀도 되는 것일까.

혹시 종우 친구라도 만나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나도 이상하게 간이 부은 듯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이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우리가 같이 있음을 증명해 주길 바랐다.

'그래 오늘 하루인데 뭐'

자꾸만 합리화시켜 갔고, 내 영혼은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추억의 장소인 스타벅스에 가지 않고 그 옆 나무그늘 카페에 갔다.

스타벅스의 옆 건물 2층에 위치한 조용한 북카페였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오늘은 정말 진지하게 우리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우스 커피를 시키면 빵을 무제한으로 구워서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반으로 자른 식빵 두 조각을 살짝 토스트기에 구워 가지고 와 테이블에 놓았다. 바싹 하게 잘 구워졌다.

"지아야, 이거..."

안락해 보이는 원목 소파에 막 앉은 나에게 진철이가 더페이스샵 핸드크림을 내밀었다.

"웬 핸드크림이야?"

약간 연둣빛이 도는 몸통에 뚜껑은 진 갈색인 작은 핸드크림이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아니 어제 너 보니까, 추운데 핸드크림도 안 바르고 다녀서 손이 막 트잖아. 그래서 아까 기다리면서 하나 샀어!"

난 뚜껑을 열어 손등에 핸드크림을 조금 짜내었다. 그리고 양 손등을 비벼 얇게 펴 발랐다.

"흠, 이거 냄새가... 좀..."

나는 손등 냄새를 맡으며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수풀향? 대나무내음? 자연의 향이었다.

진철이가 궁금한지 내 손을 가져가 코에 가까이 대었다. 아주 잠깐 입술이 스쳤다.

"왜? 좋은데? "

진철이도 핸드크림을 가져가서 조금 짜더니 손등을 비볐다.


드립커피 향이 좋은 하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듯하게 입술을 적시는 커피 향과 코끝을 찌르는 풀내음이 오묘하게 섞였다. 카페 내에는 잔잔한 발라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영국엔 언제 들어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핸드크림을 만지작 거리며 물었다.

"내년에.... 다음 주 월요일"

진철이가 조금은 조용한 톤으로 말했다.

"1월 3일?... "

난 애꿎은 핸드크림만 계속 바라보며 물었다.

"응"

"일주일도 안 남았네"

우린 잠시 말없이 커피잔만 응시했다.

알고 있지 않았는가. 어차피 떠날 사람.

2년이었을 때나, 일주일인 지금이나 결국 이번에도 내 곁에 잠시 머물 뿐, 영원할 수 없는 인연. 서로를 끌어당기는 소울메이트라는것을 부정하지만 않을 뿐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데, 왜 또 3년 전과 같은 풍경과 마주해야 하는지, 왜 또 마음이 쓰려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랑 매일매일 만나야지! "

진철이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한국에 들어온 진짜 이유가 뭐야? "

그런 진철이와 반대로 나는 표정 없이 차분하게 물었다. 진철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 잔인한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떠날 사람이 왜 자꾸 다시 나타나 흔들어놓느냐고. 과거에 한때 사랑했던, 너의 소울메이트가 세상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는지 보러 왔으면, 그냥 잘 살게 두면 되지 않느냐고. 나를 다시 흔들지 말라고, 그렇게 눈으로 말했다.

"....... 너 만나러 온 거야"

예상한 답이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언제나같이, 바람둥이 같은 그 말투. 고요했던 3년의 침묵과 이해할 수 없는 한국행. 그 모든 것들에 이유가 있을까. 이유가 있다면 난 진실을 정말 알고 싶은 걸까.

"3년 전에 우리 헤어질 때 기억나?, 네가 명동에 카페에서 울었었잖아."

기억난다. 명동 빈스빈스. 진철이의 목도리를 두른 채, 알 수 없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던 그날을. 자기 기분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피우던 그 담배도. 모두 다 기억난다.

"영국에서 계속 생각났었어. 네가 울던 그날"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만 남겨진 그 아이. 그 아이에게 난 슬픔으로만 남겨졌던 것일까. 나에게는 한여름밤의 꿈같은 행복한 단꿈으로 남은 그 아이. 그 아이에게 나는 한겨울 슬픈 눈물로만 기억된 것일까. 벌어져버린 시차만큼이나 다른 기억 속의 우리는 과연 서로가 찾는 사람이 맞는 것일까. 다른 시간 속의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사실, 이번에 너 한국 들어오면, 한 번만 만나고 안 보려고 했었어."

핸드크림을 내려놓고, 다시 커피잔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잡으며 말했다.

"딱 한 번만 만나서, 잘 살고 있는지 그냥 안부만 묻고 말려고 했었어."

조금은 단호하게 나답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진철이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커피잔만 응시했다. 나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진 못했다.

말. 우리에게 남겨진 손에 잡히는 무언가는 결국 서로에게 주었던 말들이었다.

그 말들로 한없이 행복해했고, 한없이 슬프기도 했다.

일기장에 잡아둔 그 말들은 다시 꺼내보아도 들리는 듯 생생했고,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지기도 했다.

우리는 최소한의 말만 했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하여, 그리고 덜 상처주기 위하여.

하지만 이제 우리에겐 그러한 말들이 필요했다.

예전에 매듭짓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매듭을 지어야 했다.

진철이는 조용히 한숨을 한번 쉬더니 고개를 떨궜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진지한 얼굴로 다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 지난 3년간 네 생각 많이 했어"

진철이의 목소리는 마치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냐는 듯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그래. 그랬겠지. 그 지난 3년간 다른 여자도 많이 사귀고”

나 또한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페이스북으로 다 보고 있었어. 행복해 보이더라. 너답고. 밝게"


서운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지난 3년 페이스북 여자친구 정보에 계속 바뀌는 외국인들을 보며, '그래도 한국 여자는 없네'라는 생각에 안도를 했던 내 바보 같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아이에게 난 도대체 뭘 기대한 것일까. 수많은 여자들 중 나도 한명일뿐. 그저 그뿐일 텐데.

"친구들과 행복한 사진들을 볼 때마다 바랬어. 제발 내 이야기를 어디 가서 쉽게 하지 않기를. 난 너의 수많은 스친 여자들 중 한 명일 뿐이지만, 그들처럼 쉽게 이야기하지 않기를."

어제 파스쿠찌에서 우연히 열어본 진철이의 휴대폰 메인 화면에는 누군가의 이니셜이 쓰여 있었다.

그 이니셜은 가장 최근까지 진철이가 사귀었던 중국 여자의 이니셜이었다. 누구냐고 묻자, 얼마 전 헤어진 애라며 스치듯 국적과 헤어진 이유만 간단히 말해준 일에 대하여,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전해지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했던 것이다.

잊고 있던 기억. 쉽게 식어버렸던 진철이의 눈빛이 기억났다.

뻔한 유혹에도 넘어간 2006년 여름 끝 무렵 개강파티가. 그리고 그 이후의 그 차가웠던 눈빛이. 가슴은 아프지만, 다시 그런 눈빛을 보느니, 아예 다시는 빠져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제발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그런 스쳐간 여자들과 똑같이 쉽게 말하고 다니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차라리 나를 모르는 것처럼.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부탁이야 "

그러나 난 그렇게 모질지 못했다. 눈물이 맺혔다. 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무그늘 창밖으로 67번 버스가 지나가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최대한 눈물을 삼켰다.

진철이는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 그냥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넌 나한테는 내가 사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더... 소중한 사람인데"

진철이의 말에 몇 명의 여자들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지 생각했다. 얕은 한숨이 나왔다.

"난, 사실 이번에 한국 정말 너만 보러 들어온 거야."

진철이는 차분하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출국하기 전에도 너한테 공항에 나오라고 했던 거고, 난 네가 나와줬을 줄 알았는데... " 서운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옛 연인이 크리스마스날 공항으로 데리러 오라는 말을 진심으로 듣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난 적어도 네가 같은 마음일 줄 알았는데..."

진철이의 말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처음 보는 모습. 진철이가 나에게 서운해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럼 지난 3년간 그럼 왜 연락이 없었냐며 다그쳤다.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SNS로 종우와 행복한 모습을 보며, 과거에 자신이 한 잘못이 떠올랐다고.

다시 다가가봤자, 자기는 영국으로 또 떠날 테고, 그렇게 내 눈물이 떠올랐다고 한다.

내 행복한 모습을 그냥 지켜만 봤다고 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사느라 바빴다고, 하지만 더는 늦을 것 같아, 손을 내밀어보았다고. 언제나 난 다 받아줬으니까. 떠나 있던 순간까지도 계속 지켜봐 줬으니까. 그렇게 내 눈물에 대한 답을 찾았다고 했다.


"영국에서 떠나기 전에 엄마한테 말했어. 이제는 한국에서 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진철이는 사뭇 진지했지만, 내 눈빛은 계속 믿음 없이 흔들렸다.

"근데 오늘은 좀 충격이네... "

진철이가 긴 한숨을 쉬었다.


우린 가슴이 뻥 뚫린듯한 기분으로 카페를 나섰다.

모든 것은 정리되지 못했다. 그러나 더는 대화를 잇지 못했다. 어떤 결론이든 서로에게 두려운 대답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모질지 못했고, 정리되지 않은 말들은 허공을 떠 다녔다.

"먼저 가, 난 좀 돌아다니다가 들어갈게"

버스를 타는 나에게 진철이가 말했다. 그러고는 내 손에 핫팩을 쥐어주었다. 하루종일 몸에 지니고 있어 더 뜨거워졌다고 했다.

차창밖으로 사라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이 슬퍼 보였다.


하루가 지나면 식어버릴 핫팩.

한 계절이면 다 써버릴 작은 핸드크림.

우리는 그런 사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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