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내 마음은 처음부터 그 아이에게 닿아있었다.
늦은 밤까지 핫팩은 따듯했다.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다. 방안에 켜둔 라디오는 심야 프로그램의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 DJ가 조용히 3부 오프닝을 하고 있었다. 오프닝곡의 선곡이 좋았다.
이 계절의 차가움을 따듯하게 표현한 박효신의 눈의 꽃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눈물이 가득 찼다. 가슴속에 가득 찬 눈물은 쏟아낼 수 없어 답답하게 속에서 곪아터지고 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수록 후회가 밀려왔다.
3년 만의 재회. 두 번의 만남. 행복했던 어제와 슬픈 오늘.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이별인가.
아니다. 난 한 번도 그 아이를 마음껏 사랑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절제되었고, 제한적이었고, 머뭇거렸다.
반면 그 아이는 언제나 강인했고, 무모하고, 확고했다. 이번 한국행도 그런 것처럼.
나는 지난 3년간 그 아이를 그리워만 했지, 한 번도 먼저 손을 뻗어본 적이 없다.
먼저 메시지를 보낸 적도, 물론 만나러 가 볼 생각을 한 적은 더더욱 없다.
이번 해외여행도 그렇게 가고 싶었던 영국이 아닌, 단지 편하게 여행할 조건만 따져 결정한 호주인 것처럼. 난 언제나 그런 식이었나 보다.
그리워만 하고 나서진 않은, 3년간 연락 한번 없다가 나타난 그 아이를 욕할 자격이 없다.
내가 훨씬 더 비겁하고 계산적이었다.
이런 나를 3년간 내버려 둔 건 그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내 방 창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늦은 밤. 지나다니는 차소리. 차분하고 평온한 시간. 혼자 생각에 잠긴 이 시간은 그렇게 후회로 가득 차 흘러가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은 아이팟에 노란 알림 창이 떴다. 진철이의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서둘러 알림 창을 클릭했다.
"지아야 자? 안 자면 네이트온 들어와 봐"
이 시간에 네이트온에 들어오라는 것은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데, 어디 PC방인 것일까. 안양까진 간 걸까. 혹시 아직 부평인 걸까.
요동치는 심장을 뒤로하고 급하게 데스크톱 쪽으로 옮겨 앉았다. 컴퓨터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DJ가 연애 고민 사연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줘야 할지 어쩔지 모르겠다는 고민에 DJ가 말했다.
"사연 보내주신 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보세요. 이미 마음은 그 사람에게 닿아있는 것 같은데요~"
2007년 겨울, 명동에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망설이고 망설이다 하염없이 흘렸던 내 눈물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이성의 머리가 더 크게 가슴을 짓눌러 흐르지조차 못한 마음의 눈물이 가득 차버렸다.
법대에 진학한 후 더 이성적이고 단호한 성격의 나로 변해가던 차에 다시 마주한 너.
다시 차오르는 그때의 내 눈물들과 표출하지 못했던 내 진심들.
억제된 무언가가 터져 나올 듯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네이트온에 로그인하자마자, 진철이의 대화창이 켜졌다.
"지아야 왜 아직도 안자?"
"너는, 집에 왜 안 들어갔어? 지금 어디야?"
일단 그게 제일 중요했다.
"나는 방황 좀 하고 있지.ㅎㅎ"
진철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오랜만에 찾은 한국에서 한밤중 혼자 길거리를 헤매는 그 마음. 처음 보는 모질게 말하는 내 모습을 보고 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안해. 기분 좋게 만나고 기분 좋게 헤어졌으면 될걸. 내가 괜한 소리 해서..."
방황하고 있을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했다.
"아니야. 네가 미안할게 뭐가 있어. 넌 잘못한 게 없어..."
진철이는 애써 괜찮다고 했다.
"네가 한 말 다 사실이지 뭐. 내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
라디오에서는 아까 그 사연자의 신청곡이 흐르고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가 부르는 발라드곡이었다. 모르는 곡이었다.
늦은 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차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가 섞였다.
차 소리가 멈추고, 작은 방에 고요히 흐르는 음악 속에서 내 타자소리만 타닥타닥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흐르는 눈물은 내 볼 위에서 차가워졌고, 가슴은 더 뜨겁게 만들었다.
애절한 목소리의 예쁜 발라드곡이 흐른다.
그리고 내 마음도 이제는 더 이상 절제하지 말라고, 터져 나온 눈물이 부추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말하고 싶다.
절제하고 선택한 단어들이 아닌, 지금 이 눈물처럼 그냥 튀어나오는 그런 말을 내뱉고 싶다. 다행히 메신저로는 우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카페에서 못했던 말, 아니 3년 전에 못했던 그 말. 내 진심을 이제는 쏟아내야 한다.
곪아터진 눈물이 터져 나오듯 솔직하게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을 숨길 수 없다고.
"진철아. 아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말 못 했는데, 지금이라도 할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모니터가 흐릿하게 보였다.
"난 지난 3년간 네가 너무 그리워서 억지로 잊고 행복한 척했던 것 같아.”
난 차분하게 타자를 처 내려갔다.
“물론 종우랑 행복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야. 그냥 네가 주었던 그 행복은 너만 줄 수 있는 거니까.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전해지는 그런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대화창 하단의 알림 메시지는 계속 진철이가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고 떴다가, 멈춰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네 페이스북에 글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혹시 나를 그리워하는 글이 올라오지 않을지, 가슴조리며 봤고. 이내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고 그렇게 살았어. 아마 넌 모르겠지."
진철이가 말을 잇기 전에 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작정이었다.
"2007년 내가 울며 하지 못했던 말. 그리고 떠나기 전 부평에서 네가 하려던 말을 내가 하지 말라고 막았던 그 말, 서로 전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전달받았던 그 말. 서로의 처지 때문에 더 큰 상처가 될까 봐 섣불리 서로 알아도 모르는 척했던 그 말."
"........... 지아야"
진철이가 끼어들었다.
"그 말. 이제 해야겠다. 난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했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나는 다 쏟아냈다.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쏟아 나오는 눈물처럼.
"그렇게 나를 잘 알면서, 지난 3년간 내가 널 생각하지 않았다고?..."
진철이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혼자 네 사진을 많이 꺼내보고, 그리워했는데, 연락하고 싶어도 시차 때문에 못하고, 방해될까 봐 못하고,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진철이의 메시지를 읽으며 눈물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너를 모르는 척해달라고.. 차라리 우리가 만나지 않았었다면 좋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 나 그 말이 너무 아파서, 이렇게 상처받은 적은 처음인 것 같다. "
눈물이 흐르는데 입가엔 미소가 띠어졌다.
그랬구나.
다시 처음부터 만났어도 또다시 사랑에 빠졌을 것 같다.
소울메이트는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되어있으니까.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대해 달라는 것이 제일 큰 상처였다는 네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따듯해졌다.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에 상처 입어줘서, 모순적이게도 기뻤다.
"나 혼자 술이나 마실까 하다가. 원래 술 잘 못 마시는 거 알잖아. 그래서 그냥 PC방 온 거야."
피식 웃음이 났다.
2006년 1학기 종강파티 때 맥주잔 가득 소주를 먹고 구토했던 진철이가 떠올랐다.
그날 맞은 보슬비도. 그리고 무릎을 꿇어했던 고백도.
"지아야. 너 우는 거 아니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서로 보이지 않아도, 영혼이 연결된 우리는 그랬다.
지난 3년 그렇게 서로 연결된 마음을 무시하려 애쓴 게 신기할 정도로.
"미안해. 그 말 진심 아닌 거 알잖아. 너한테 상처 준 게 미안해서 자꾸 눈물이 멈추질 않네"
처음부터 만나지 않은 것처럼 이라니.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처음부터 원하는 대학에 한 번에 들어갔었다면,
또는 그 후 재수에 성공해서 항공과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었다면,
너와 만날 기회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우리의 찬란한 기억들의 페이지가 애초부터 빈 페이지였다면
생각만 해도 어지러워진다.
"울지 마. 지아야. 네가 울면 내 마음은 더 찢어질 것 같아."
라디오 DJ는 음악이 끝나고 다음 사연을 읽고 있었다.
"얼굴 보고 얘기하면 우느라 전하지 못할 것 같아서 지금 다 얘기할게."
난 차분히 키보드 위에 내 마음을 전해 나갔다.
"넌 항상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에 있었어. 심지어 휴대폰도 없어서, 내가 필요할 때 너를 찾을 수도 없었지. 언제나 네가 먼저 연락을 줘야지만 만날 수 있었고. 항상 기다리는 쪽은 나였어. 그리고 그렇게 네가 떠난 후 남겨진 난 너를 추억할 물건 하나 남은 게 없더라."
"내가 학생 때 돈이 없어서 그랬지, 너한테 사주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진철이가 끼어들어 변론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에 데리러 나오라는 너의 말에, 예전처럼 또 쪼르르 달려 나가 기다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내가 너무 바보 같더라. 다시 예전처럼 넌 떠날게 분명하고. 남겨져 울며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건 내쪽일 뿐, 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스북에 친구들과 환하게 웃는 사진들을 올리며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하게 살 테니까. 그래서 한 번만 만나고 말려고 했던 거야"
엔터를 누름과 동시 진철이가 갑자기 내 사진 한 장을 전송했다.
"- 이진철 님이 사진파일을 전송하였습니다-"
그 사진은 예전 진철이의 휴대폰으로 을왕리에서 찍었던 내 사진이었다.
" 내가 이 사진을 보며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넌 아마 모를 거야. 얼마나 망설였고, 이번 한국행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2007년 내가 떠날 때 네가 울던 그날. 난 결심했어. 다시 돌아올 땐 널 책임질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데리러 오겠다고. 아니 그냥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나라인 한국에서 살 방법을 찾겠다고. 그런데, 졸업 후 취직도 못하고, 그냥 외삼촌네 가게를 도와주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너한테 다시 나타나도 되는 건지, 법대생이 된 너에게 당당하게 나타나도 나를 다시 좋아해 줄지 자신이 없더라."
어느덧 눈물이 멈췄다. 대화창 위에 웃고 있는 내 사진이 보인다.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21살의 내가. 행복하지만 슬퍼 보이는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며 이제는 온전히 행복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넌 나랑 살아야 할 운명이야."
진철이가 운명이라고 말했다.
운명. 거스를 수 없는.
굳이 그 단어를 쓰지 않아도 아주 예전부터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인정하고 있었던.
진철이에게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라고 타이른 후 컴퓨터를 껐다.
라디오는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쏟아 낸 눈물 후 보인 내 마음의 텅 빈 바닥에는 운명이라는 두 글자만 남았다.
‘그래.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자.’
한 번도 그래보지 못했으니까.
한 번도 마음껏 그 아이를 사랑해 보지 못했기에, 보낼 수 조차 없었으니까.
내 있는 힘껏 마음을 다 쏟아부은 후 남은 운명이라는 단어에 순응해 보자.
다음 주에 다시 그 아이가 떠날 때는 아무런 미련조차 남지 않도록,
눈물로 보낸 2007년과 달리 웃으며 보낼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껏 사랑하자. 그렇게 다짐했다.
그날 오후 진철이는 전화로 오늘은 오랜만에 만난 친가 가족들과 모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 올해의 마지막날인 31일에 만나자고 했다. 월미도에서 올해의 마지막 해를 보자고.
나도 그날 오후는 가족들과 집에 있었다.
오랜만에 여행책자를 보지 않았다.
그저 오롯이 다음날 만날 진철이와의 하루를 준비했다.
내일을 생각하니 벌써 행복해진다. 그리고 오랜만에 가뿐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