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호박라떼의 부드러운 거품과 향긋한 내음을 잊지 못한다.
2011년 새해가 밝았고, 난 대학교 3학년. 스물여섯이 되었다.
새해 첫날을 가족들과 보내고 2일 주일 예배 후 가족들과 다 같이 백화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게임을 한 모양인지 남동생은 연신 하품을 해댔다. (심지어 밥을 먹으며까지) 점심식사를 마치고 졸린 동생을 이끌고 백화점을 둘러보았다. 지하 1층을 돌아다니다가, 신나라레코드에서 이것저것 CD를 구경했다. 테스트용 헤드셋을 써 보니 브라운아이즈소울 새 음반이 흘러나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브라운아이즈소울 CD 두 개를 구입했다. 한 개는 내가 갖고, 하나는 진철이에게 줄 것이다.
‘똑같다면’이 타이틀인 새 앨범은 수록곡 전부 다 좋았다. 어느 하나 우리 이야기가 아닌 곡이 없었다.
CD를 사고, 백화점 구경을 하고 있는데 내 베핑이(베이비 핑크색 프레스토 휴대폰)가 울렸다. 국가코드 +44 영국. 진철이었다.
나에게는 설레는 숫자 44.
가족들과 사우나에 왔다며, 저녁때나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저녁에 홍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1월 3일. 진철이가 떠나는 날은 내일로 다가왔다.
오늘이 진철이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날이다.
분명 슬퍼야 하는데, 전혀 슬프지가 않았다. 가방 속에 브라운아이즈소울 CD를 만지작거리며. 네 마음도 똑같겠지.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저녁 약속시간까지 너무 많이 남았다.
조금만 자다가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채 외출복 상태로 그대로 누워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알람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뼛속까지 시리게 춥다. 마치 한겨울 포근한 눈 속에 누워있다가 일어나 시린 느낌.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의 하얀 눈밭이 아름다워 마음껏 뒹굴고 즐기다가 흠뻑 다 젖어버려 행복하게 시린 느낌.
두터운 파란 치마에, 소매가 풍성한 회색 니트를 입었다. 회색 니트는 꽈배기 무늬가 크게 들어가 있었고, 목부분이 터틀로 늘어졌다. 까만 스타킹에 구두를 신었고, 팔부분이 벌룬으로 풍성한 진 회색 반코트를 입었다.
진철이를 만나러 가는 길.
신도림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기 위하여 내렸다. 2호선 홍대입구역 9번 출구는 언제나 붐빈다. 일요일 오후였기에 더욱 그랬다. 줄지어 9번 출구를 올라와서 홍대입구로 가는 골목을 바라보며, 진철이를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트렌치코트 차림의 진철이가 다가왔다.
"오 내 스타일이야. 지아 오늘 너무 이쁜데"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급하게 끈 느낌. 여전했다.
"너도 내가 좋아하는 파란 코트 입구 왔네"
우리는 서로 만족했다. 우리의 기억에 남길 서로의 모습으로 완벽했다.
어디를 갈지 고민하며, 홍대로 올라가는 길.
즐비한 액세서리 상점, 술집들을 지나 작은 길목을 건넜다.
손을 잡고 걷는 홍대의 거리.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약간 언덕진 골목에 위치한 커피프린스 카페로 들어갔다.
“우리 예전에 왔을 때 사투리 쓰던 아르바이트생이 있지 않았나? 잘생겼었는데~”
난 3년 전 같이 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도 모두 좋은 기억이다.
나는 자색고구마라떼를 시켰고, 진철이는 단호박라떼를 시켰다.
진철이는 단호박라떼를 한입 마시고는 맛이 없다고 했다. 궁금한 마음에 나도 먹어보았지만, 난 꽤 맛있다고 생각했다. 외투를 벗자 하늘색카라티에 회색 브이넥 니트를 입은 진철이가 참 단정하게 멋있어 보였다. 정말 빈틈없이 멋있는 모습이었다.
"나 어제 병무청 다녀왔어"
진철이가 단호박라떼를 한입 더 먹더니 역시 별로라는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병무청은 왜?"
내가 조금 놀라며 의아한 듯 물었다.
"한국에서 살려면 군대를 다녀와야 하더라고, 상근의 형태로 가능한지 알아보고 왔어."
별일 아닌 듯 말하는 네 모습을 보니 그 진심이 궁금해졌다.
‘이제는 정말 나에게로 머무려 하는 걸까? 이제 정말 공평하게 너를 선택해 볼 고민을 해도 되는 걸까?’
자색 고구마라떼의 달콤하고 따듯함과 함께 그 아이의 진심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속까지 따듯하고 포근해지는 맛이었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나 하면서 살고 싶다고, 엄마한테 어제 전화로 말했어."
꽤나 진지한 그 아이의 표정. 목소리.
나에게 머물고 싶은 게 진심이라면 받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운명에 순응하여.
오늘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지만, 마지막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덥게 느껴지는 카페 안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키득거렸다.
우연히 가까이 다가온 진철이의 입술이 아주 살짝 내 얼굴에 닿을뻔했다.
지난번 영화관에서 내 손등과 정수리에 해준 키스가 생각났다. 그 입술의 감촉이 아주 잠깐 살짝 스친듯했다.
'키스하고 싶어'
손바닥을 간지르는 그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 가기 전에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언제나 그랬다. 짓궂은 장난들로 나를 무장해제 시킨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해지는 이 단호한 말투. 난 진철이의 그 말투가 좋았다.
"뭔데?"
뭐든 해줄게.라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키스"
그리고 곧바로 내 입술에 단호박라떼의 향기가 닿았다. 갑작스러워 피할 수 없었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의 입맞춤은 가벼운 듯했지만, 충분히 깊은 의미가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흘렀다.
내 모든 것을 내던져 사랑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피하지는 말자. 적어도 이 아이가 한 걸음 다가왔을 때 뒷걸음질 치지는 말자.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단호박라떼향을 느꼈다.
"너네 가게에서 이런 음식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또 이런 거 먹어도 안 지겨워?"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카츠동과 우동을 파는 일식집에 갔다. 진철이는 맛과, 음식을 세팅한 모양 등을 찬찬히 평가하더니, 식당 내부 인테리어까지 훑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어색하고도 재밌었다.
"학생은 돈 쓰는 거 아니야~ "
이번 한국행에서 거의 모든 데이트 비용을 진철이가 혼자 썼다. 학창 시절 진철이에게 매점에서 먹을 거를 사다 바치던 내가 계속 얻어먹게 될 줄이야. 마지막날 저녁만큼은 진철이가 자리를 비운사이 내가 빠르게 계산했다.
"엇 안돼~ " 하며 달려오는 진철이의 얼굴. 예전을 생각하면 정말 낯선 모습이었다.
아직 홍대의 거리는 달아올라있었다. 8시 반이었다.
나는 이제 헤어질까 했지만, 진철이가 못내 아쉬워했다.
그렇다. 오늘이 마지막날이니까. 잡고 있는 손의 부드러운 감촉을 당분간은 느끼지 못할 테니.
아쉬운 마음에 빈스빈스에 들어갔다.
배는 불렀지만, 생크림이 올라간 달콤한 와플을 시켰다. 생크림 위에는 달달한 사과잼도 올라가 있었다. 한입 베어무니 달콤한 사과향기가 퍼졌다. 예전에 대학교 후문에서 팔던 1000원짜리 사과잼 와플이 생각났다. 반으로 접어 나눠먹던 그 맛.
"칠칠맞은 거야? 일부러인 거야?"
진철이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
어리둥절하는 나에게 진철이는 일어나 몸을 굽혔다. 테이블 넘어 진철이의 얼굴이 아니 입술이 다가와 내 윗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다시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생크림 묻었잖아~"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늘 내 눈에는 파란 트렌치코트에 까만 털모자를 쓴 반테안경의 이 아이가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시야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키 작고 예쁜 어린 왕자 같은 이 아이는 아직 내 눈앞에 있다.
그리고 곧 사라질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꿈같은 무엇. 가고 싶지만 선뜻 갈 용기가 안서는 영국이라는 나라.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중심으로 흐르는 세계의 시간 속에서 맞물려 흘러가는 우리의 시간, 그 시차. 국가코드 44. 모든 상황이 다 불협화음으로 위험하게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잡아두고 싶어, 우리는 사진을 더 찍었다.
너와 내가 함께 보이는 앵글. 그 속에 우리를 가뒀다. 파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환하게 웃는 그 아이와 풍성한 회색 꽈배기 니트를 입은 일자 앞머리가 조금은 촌스러운 내가 그렇게 그 순간 박제되었다.
오늘의 이 공기와 함께.
오늘 느낀 모든 우리의 감정들과 함께.
그리고 달콤한 키스의 감촉도 함께.
여느 때와 같이 신도림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마치 내일 또 볼 연인처럼. 가볍게 포옹했다.
그리고 전철에 타기 전 난 처음으로 진철이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진철아. 사랑해" 라는 말과 함께.
난 진철이의 눈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눈빛이었을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도 사랑해 지아야"
지하철에 몸을 싣고 문이 닫힐 때까지 진철이를 바라보았다.
까불까불 춤을 춘다.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스마일 표시를 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를 웃게 하는 아이. 영원히 나를 웃게 해 줄 아이.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지하철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가방에 손을 넣었다. 브라운아이즈소울 CD가 손에 잡혔다.
전해주지 못한 것. 그러나 충분히 전한 내 마음. 처음 해 본 사랑한다는 그 말. 너에게로 가 닿았다.
집에 와 CD장에 나란히 꽂아놓은 브라운아이즈씨디 두장을 바라보았다.
전해주지 못한, 그리고 함께 놓인 그 두장의 CD.
이렇게 계속 같이 보이고 싶다. 사진 속 우리의 모습처럼.
(12월 31일 부평 데이트 때 카페베네에서 나누었던 대화)
"근데 인어공주 스티커를 왜 이렇게 많이 붙였어?"
하버브리지라고 쓰고 별표가 그려진 연습장 페이지에 붙어있는 인어공주 스티커를 보고 진철이가 물었다. 핑크색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빨간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행복해 보이는 인어공주 스티커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인어공주를 좋아했어. 그래서 내 영어이름도 Ariel이라고 하고 다녔지. 지금까지도"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카페베네 안은 조금 한산해졌다. 고요하게 흐르는 재즈.
어렸을 때부터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좋아했다. 아름다운 목소리. 꿈을 향해 부르는 OST. 책과는 다른 결말의 해피엔딩까지. 어렸을 때 난 인어공주의 원작 결말에 대하여 몰랐다. 아니 알았다 해도 내가 기억하는 결말은 디즈니의 결말이었을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인어공주는 결말이 책이랑 다르거든."
진철이는 펜으로 하버브리지 스티커 옆에 진짜 하버브리지를 그리고 있었다. 허접하지만, 나름 비슷하게, 열심히
"안데르센 동화 속의 인어공주의 결말은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물거품이 돼 죽잖아. 그런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인어공주 결말은 왕자와 사랑이 이루어지고 사람이 되어 결혼하면서 끝나."
"아 정말? "
진철이는 아직도 펜으로 낙서를 하면서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난 그게 좋으면서도 슬프더라고. 어린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한 거였겠지만, 결국 그 행복한 결말은 디즈니의 환상이잖아. 현실은 물거품이고."
커피잔에 커피가 거의 다 식어있었다. 나는 더 이상 마시지 않고 커피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좋은데? "
진철이가 말했다.
"뭐가?"
하버브리지 옆으로 오페라하우스까지(냅킨을 그리고 있는 건가) 그리고 있는 진철이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해피엔딩으로 바뀐 거잖아, 난 해피엔딩이 좋더라."
디즈니 영화 앨리스 인 원더랜드에서 모자장수가 한 대사가 생각났다.
"뭐가 환상이고, 뭐가 현실인데"
1월 3일. 오늘 그 아이는 영국으로 떠났다. 두바이를 경유한다고 했다. 공항에서 걸려온 전화를 마지막으로, 밝게 웃으며, 그렇게 떠났다. 해피엔딩이 좋다던 그 아이의 환한 미소.
내가 좋아한 디즈니 인어공주의 결말처럼 우리의 결말은 해피엔딩일까.
내가 쓴 각본에 내가 갇혀버린 것 같았다. 우리의 결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내가 그리는 그 결말은 어떤 모습일까.
법률용어 중에 정지조건(停止條件)과, 해제조건(解除條件)이라는 개념이 있다.
법률행위의 효력 발생에 관한 조건으로 일정 조건이 이루어지면 효력이 발생하는 정지조건과, 일정 조건이 만족되면 모든 효력이 해제되어 소멸되는 해제조건이 있다.
해제조건부 사랑. 그 아이와 허락된 시간은 이렇게 완료되었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에게 그 아이는 환상이었을까 현실의 해제조건부 사랑이었을까.
진철이가 비행기를 타고 9시간 전으로 돌아가는 동안, 쓸쓸한 마음에 싸이월드를 켜 보았다. 진철이의 미니홈피 1월 3일 자 다이어리 글에 New 표시가 반짝이고 있었다.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딱 한 줄. 너무 진철이다워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진철이의 싸이 메인은 어제 빈즈빈스에서 찍은 우리 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바뀐 거잖아. 난 해피엔딩이 좋더라"
또렷이 기억나는 너의 목소리. 그 아이의 미니홈피 메인을 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렇게 항상 같이 보였으면 좋겠다.'
한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 아이는 다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