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아침 10시에 눈을 떴다.
긴장이 풀려서인가, 늦잠을 자버렸다.
진철이와는 12시까지 부평에서 만나기로 되어있으니 아직 준비할 시간은 적당한 편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둔 아이팟의 홈버튼을 눌러보았다. 진철이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카카오톡을 열어, 잘 잤냐고 인사를 보내놓고,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거울을 들었다.
운 것에 비해 생각보다 눈이 많이 붓지는 않았네.라고 생각했다.
눈보다는 머리가 문제였다. 감기기운이 있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볍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데 아이팟에 노란 알림 창이 떴다.
"나 이미 부평이야. 아침에 일찍 깨져서 그냥 나왔거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하게 씻고 빠르게 머리를 말렸다. 긴 웨이브머리가 오늘따라 더 잘 안 마르는 것 같았다.
까만색 폴라티를 입었다.
2010년의 마지막날. 31일.
함께 하지 못했던 한 해의 마지막날을 그 아이와 함께 보낸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정류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다 이내 멈춰 택시를 잡았다. 약속시간에 웬만하면 늦는 일이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타본 게 언제 적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부평 북부광장이요."
오랜만에 맡아보는 택시 냄새.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이렇게 서두르는 내가, 그리고 이렇게 설레는 이 상황이 모든 게 어색하다.
오늘도 종우는 아르바이트를 간다고 했다. 31일인데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종우에게 괜찮다고 나도 오늘은 친구 만나러 나갔다 올 거라고 했다.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를 가는지 종우는 딱히 묻지 않았다. 11월에 처음 진철이에게 연락이 왔을 때 종우에게 얘기는 했었다. 요즘 진철이와 카톡을 주고받고 있다고 신경 쓰인다면 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종우는 한결같이 나를 믿는다고 하며, 상관없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온 후 처음 만나러 갈 때에도, 종우는 다녀오라고 했었다.
"네가 가진 추억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만나고 와도 괜찮아. 믿으니까"
하지만 종우는 내가 그날 딱 하루 만난 것만 알고 있다.
엊그제의 일은 알지 못한다. 아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 감아주는 것일 수도 있다.
종우는 군대에서 다쳐 국군수도병원에서 수술을 했을 때에도, 나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던 아이다. 그 넓은 마음은 적은 말수만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그런 종우의 배려와 믿음에 대한 배신도, 죄책감도 전부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마음이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음 주면 떠날 아이니까. 잠깐뿐이니까.
내 가슴은 그렇게 죄책감을 밀어냈다.
차창밖으로 아침의 한산한 거리가 스쳐 지나간다.
"너는 나랑 살아야 할 운명이야"
진철이와 엊그제 했던 네이트온 대화가 떠오른다.
볼이 조금은 달아올랐다. 만나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조금은 혼란스럽다.
딱 다음 주까지 만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만, 후회 없이.
택시는 부평역 광장 앞 맥도날드 앞에서 나를 내려줬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나온 곳.
한번 힐끗 쳐다보곤 계단을 향해 뛰었다. 아침이라 맥도날드 안은 한산 해 보였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와, 지하 분수대 앞으로 왔다. 언제나 사람이 붐비는 곳.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거나, 헤어지는 곳. 진철이는 어디 있을까. 두리번거리던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까만 털모자에 찐 파란색의 더블버튼 트렌치코트를 입고, 깃 뒤를 살짝 세운 채,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 아이.
그 순간, 난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반했던 것 같다.
다시 반테안경으로 바뀐 모습에 2006년 사랑에 빠지게 한 그 미소가 그대로 떠올랐기에.
그 장면은 2006년과 같이 영화 속 슬로우가 걸린 장면처럼 천천히 다가와 나에게 각인됐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
그렇게 난 3년 뒤인 지금 현재에 이 아이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 것이다.
진철이는 어느덧 옆으로 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더니, 지하상가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많이 기다렸어?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지하상가를 걸으며 묻는 나에게 진철이는 자연스럽게 잡은 손을 풀어 내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냥 이것저것 구경했어~ 우리 어디 갈까?"
우리는 미로 같은 지하상가를 빠져나가기 위하여 지상이랑 연결되는 싱크빅문고를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책방이었지만, 부평에서 약속이 있을 때면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리곤 했다. 책내음을 맡으며 계단을 오르면, 부평 문화의 거리로 나갈 수 있다. 외부로 나가는 문을 열자마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리듯 불어왔다. 그곳은 바람골이기도 했다.
"카페베네 갈까? "
내가 건너편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길을 건너 1층에 크게 자리 잡은 카페베네로 들어갔다.
우리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소파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진철이는 자연스럽게 내가 앉은 방향의 의자에 따라 앉았더니 예쁜 파란 코트를 벗어 반대쪽 소파에 놓았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지아 오늘도 이쁜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가 더 멋있는데? 안경도 예전처럼 바꿨네"
우리는 사랑스럽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눈빛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2006년 봄. 강의실에서 핑크색 카라티를 입고 내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눈빛.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맑은 눈동자.
나는 가방에서 연습장과 펜을 꺼냈다. 그리고 삼성 디카를 꺼냈다. 전면부를 터치하면 셀카모드로 전환되는 카메라였다. 시드니여행을 위하여 구입한 것이었다.
엊그제의 네이트온 대화 이후 난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진철이가 한국에 있을 때 지난 2006년 못했던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같이 사진 찍기가 그중 하나였다.
"아니 너랑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더라고, 그게 항상 그렇게 서운했었어."
사실이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일부러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마지막에 울지 않기 위하여, 내 마음을 다하여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같이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 그럼 100장 찍자!"
진철이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까만 모자에 까만 아디다스 저지 차림의 진철이와 까만 폴라티에 까만 긴 웨이브 머리의 내가 디카 앞 전면부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함께 보였다.
"아주 시커멓네 둘 다"
우린 키득거렸다.
우리는 같이 찍은 사진을 넘겨보며, 사진 속 서로의 모습을 칭찬해 주기도, 놀리기도 했다.
"근데 연습장은 뭐야?"
진철이가 줄무늬 없는 무지 연습장을 스르륵 넘기며 물었다.
"아 시드니 여행계획 짜는 연습장이야! 그냥 이것저것 끄적이려고 가져왔어."
거짓말이었다. 그 아이와의 수업시간에 했던 낙서의 추억들이 떠올라서 그냥 닥치는 대로 나오기 직전에 가방에 넣은 것이다.
"오 그래? 내가 도와줄게!"
진철이는 펜을 집어 들고는 빈 페이지를 찾아 낙서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뾰족한 세모턱에 쌍꺼풀 눈, 일자 앞머리, 긴 머리는 위에는 직선으로 어깨 아래부터는 웨이브를 구불구불 넣은 내 얼굴이었다.
"완성!"
진철이가 외쳤다.
"이게 뭐야... 설마 나야?"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 아이가 그려준 내 얼굴.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너의 시점에서 본 내 모습을 마주하니, 지금 이 시간도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린 연습장에 이것저것 느끼한 멘트를 주고받으며 낙서를 했다. 예전에 일어청강시간에 교과서에 서로 낙서를 하며 키득거리다가, 교수님께 혼났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행복감. 네가 있는 앵글의 이 풍경. 온전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지아야 너네 어머니가 나 싫어하시겠지?"
낙서를 하던 진철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럼 좋아하겠냐?"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핀잔을 주었다. 진철이의 입은 치아를 다 드러내게 크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애꿎은 테이블 위 연습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 한국에서 영어강사나 하며 살까?"
진철이는 연습장에 끄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라는 두 글자를 쓰고는 네모 박스 테두리를 긋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 머물고 싶은 걸까. 나에게 머물고 싶은 걸까.
만약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종우가 떠올랐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허락한 나에 대한 일탈에 한계가 사라진다면. 난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진철이는 아직도 '한국'이라는 글자에 겹겹이 네모박스를 긋고 있었다. 묵묵히 말없이. 나도 아무런 말을 해주지 못한 채 그 두 글자만 바라보았다.
카페베네 자체 라디오 방송의 시그니처 로고송이 울려 퍼졌다. 12시가 넘었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이런저런 쇼핑으로 가게 안을 들락날락거렸다. 진철이는 한국까지 와서 조던 운동화를 봤다. 이곳 저것 기웃거리다가 배가 고파진 우리는 오랜만에 같이 점심을 먹었다. 만날 때마다 좀처럼 밥을 같이 먹는 일은 잘 없었다. 평소에 종우랑 자주 가던 철판볶음밥 집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오늘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근데 오늘 너무 추운데 월미도는 그냥 가지 말까?"
볶음밥을 우물거리며 내가 제안했다. 월미도에서 한해의 마지막 일몰을 같이 보는 것.
앞으로 매년 마지막 날 그곳에서의 일몰이 떠오를까 봐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이와의 월미도의 추억은 한여름 소나기로 우산 속에 갇혔던 장면 하나로만 기억하고 싶기도 했다.
진철이는 나에게 여름이었다. 겨울의 추억은 사실 종우와 더 많았다. 진철이가 무모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이라면, 종우는 차갑고 한결같이 지켜봐 주는 달과 같았기에.
"그래 너 오늘 너무 춥게 입었으니까. 그러니까 감기에 걸리지"
진철이는 아침에 만났을 때부터 계속 내 옷이 얇다며 구박했다.
우리는 밥을 다 먹고, 롯데시네마로 향했다. 따듯하게 영화나 보기로 한 것이다.
진철이와 봤던 영화는 2006년 여름의 괴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번엔 무슨 영화를 볼까 살펴보다가, 본인이 나오는 영화를 봐야 한다며 차태현이 나오는 헬로우고스트를 보자고 했다. 차태현 닮았다고 했던 말은 영원히 써먹을 기세였다. 그러나 정말 많이 닮긴 했다.
2006년 여름 부평 스타벅스에서 고등학교 친구를 불러 진철이를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진철이가 커피를 가지러 간 사이, 내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지아야. 진짜 차태현이랑 똑 닮았다. 너한테 잘하고 잘생기고 합격이야!"
그 친구는 그 이후 나에게 이런 말도 했었다.
진철이와의 제한된 인연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나를 향해.
"지아야, 이런 사랑은 다른 사람들도 평생에 한번 겪을까 말까 하는 조금은 특별한 경험인 것 같아. 지금은 세상의 시선이나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너 마음이 가는 대로 해 봐."
영화시간까지는 30분이 넘게 남았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 쪽에 위치한 오락실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평소에 종우랑 자주 오던 곳.
보글보글은 내가 진철이보다 훨씬 잘했다. 계속해서 500원짜리 동전을 넣는 진철이에게 동전 좀 그만 쓰라며 핀잔을 주며 웃었다.
그 자존심 상해하는 표정이란.
마비노기를 할 때 계속 몬스터에 맞아 죽는 나를 지켜주겠다며 멀리서 뛰어오던 진철이의 캐릭터가 생각났다.
그러나 보글보글은 각자도생. 어떻게 그러냐며 따지는 진철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영화시간이 다 되었다.
진철이는 콜라를, 나는 팝콘을 들고 상영관 앞에서 기다리며 한 면 가득 벽에 붙어있는 심리테스트를 바라보았다. 헬로고스트의 주인공들이 붙어있었고, 말풍선에 심리테스트 질문과 Yes/No 선택에 따라 다른 다음 질문들로 가도록 되어있었다.
"오 우리 이거 해보자!"
진철이가 콜라를 든 손을 뻗어 벽의 심리테스트를 가리켰다. 나는 잠자코 그 벽을 바라보았다.
진철이는 팝콘을 들고 있지 않은 쪽의 내 손을 잡더니 맨 위에 질문을 가리켰다.
"나는 사랑에 올인하는 타입이다. 예쓰!!!!! 다음질문!! "
진철이는 신나서 외치며 내 손을 잡은 손으로 화살표를 따라 아래로 내려와 다음질문을 읽었다. 내 눈도 진철이의 대답과 같은 아래 질문으로 내려왔다.
"나는 한번 헤어졌던 사람과 다시........ "
진철이가 질문을 읽다가 멈췄다.
그 질문은 '나는 한번 헤어졌던 사람과 다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였다. 진철이는 내쪽을 쳐다보지 않고 벽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내 재치 있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잡은 내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흠, 이건 아닌 것 같아!~ No! 자 다음질문!!!! "라고 말하며 No가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의 질문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한번 헤어졌던 사람? 일까. 우리는.
아마 진철이의 머뭇거림과 나의 머뭇거림은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영화는 재밌었다. 역시 차태현이 나오는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이다.
이번에는 가족영화였는데, 마지막 반전 포인트가 조금은 슬프지만 감동적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진철이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계속 춥지 않냐고 속삭이며 물어봐 주었다. 난 스크린만 바라보며 조용히 끄덕였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진철이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따듯한 입술의 감촉이 손등에 잔잔히 퍼졌다.
그해 부평역 광장에서 나누었던 키스가 생각났다. 그 부드럽고 혼란스러웠던 감촉은, 비와 젖었던 바닥처럼 촉촉했다.
진철이는 이내 내 손을 뒤집더니 손바닥을 펼쳐 보이게 하고는 손가락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옛날 강의시간에 했던 우리의 대화 방법. 오랜만이었다.
"키스하고 싶어."
진철이는 그렇게 썼다. 난 펼쳐져있던 손을 간지럽다는 듯 가볍게 주먹 쥐었다.
진철이는 이내 다시 내 손을 펼치게 하고는 다시 썼다.
"키스하고 싶어."
난 나에게 글씨를 쓰던 진철이의 손을 펼쳐놓고는 이렇게 썼다.
"너 감기 걸려."
진철이가 내쪽을 쳐다보았다. 난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진철이는 다시금 내손을 펼치게 해 놓고 이렇게 썼다.
"괜찮아."
이내 우리는 잠잠히 영화에 집중했다. 집중하는 척했다. 옛날 생각이 잠깐 났던 것 같다.
그해 여름 키스를 나누었던 그 장면.
생각해 보니 그때도 난 감기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이후의 개강파티. 차가워졌던 그 아이. 빛을 잃었던 그 눈빛.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가, 인정했다가 괴로워하며 보낸 2학기의 그 차가웠던 겨울.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난 그 아이에게 고개를 돌려주지는 않았다.
그해 여름 그 아이가 멀어진 이유는 그 키스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번에도 키스를 하고 나면 그 차가운 눈빛이 다시 떠오를 것만 같았기에, 그렇게 진철이의 다가오는 입술을 밀어냈다.
영화가 끝나고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우린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까"
진철이가 먼저 일어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스크린을 향해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며, 그 아이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내가 기대 있던 그 어깨.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에게 허락된 이 아이와의 시간이.
후회는 없을 거다. 미련도 없을 거다.
네 손을 잡은 이 순간만큼은 난 완벽하게 행복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