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닿은 역에 그 아이도 서서히 진입했다.
내 귓가에 울린 그 아이의 목소리는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했다.
여전히 낮은 톤의 그리고 차분한 조금은 긴장한 목소리.
"응? 너 이 번호 뭐야? 아니 지금 어디야?"
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고 반갑게 물었다.
"나 아직 비행기 안이야. 나 데리러 나온 줄 알았는데... 집인가 보네, 와 윤지아 서운하네"
진철이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것도 비행기 안에서 나에게 가장 처음 전화한 것이라고 했다.
한 달 전 카카오톡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날 오전 도착 비행기로 갈 테니 공항으로 나오라는 그 말.
정말이었구나. 스치듯 한 이야기에 생각해 볼게~라고 가볍게 대답했었다.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솔직이 그 아이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만날 사람들을 다 만나고 마지막에 나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진철이는 가장 먼저 나를 찾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잠에서 완전히 깨버렸지만, 통화가 끝난 후에도 난 이불을 다 걷어내지 않고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몇 년간 연락 한통 없던 옛 연인이 크리스마스 날 아침 공항으로 나오라고 한다면, 진짜 달려 나갈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니다. 대부분 달려 나가려나.
다시 엇갈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 아이의 달콤한 말들과, 기약 없는 약속들을 무작정 또 믿어버리고 빠져들면, 다시는 헤어 나올 자신이 없었다.
진철이는 3년간 연락 한번 주지 않았었다.
그 뜻은 그 아이에게 난 간절함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아이에게 나는 그저 떠올리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사람 정도가 아닐까.
그날 이후 진철이는 내 예상과 달리 매일 아침 전화 했다.
아침마다 듣는 그 아이의 목소리.
3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아이와의 추억들. 다시 떠오르는 장면들.
"그래서 나 언제 만나줄 거야?"
진철이는 아침마다 계속 물었지만, 미루고 미뤘다.
사실 이제 와서 다시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잇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핑계만 대고 미룰 수는 없었다.
'한 번만 만나볼까. 딱 한 번만...'
종우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주었던 상처를 다시 들춰내고 싶지 않았고, 지금 우린 충분히 행복했다.
내가 지금 다시 진철이를 만난다고 해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대학동창으로 만나보는 건 괜찮겠지.’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 약속을 잡았다.
딱 한 번 만이다. 잘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그냥 안부만 묻는 정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12월 28일.
진철이가 한국에 온 지 4일째 되는 날. 우리는 용산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용산행 1호선 급행열차 맨 앞칸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직 저녁 6시가 안 된 시간이었지만 낮이 짧아져 밖은 어두웠다. 그러나 눈 때문에 조금은 밝은 느낌도 들었다.
유독 비 오는 날의 추억이 많아서인가, 이 계절의 비가 내리는 날.
그렇게 우리는 3년 만에 만나는 것이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 아이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악수정도 손을 잡아보는 건 이상한가. 포옹은 더 이상하겠지.
어떻게든 어색할 것 같았다.
신도림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벌써 다 와가는구나.’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지아야, 나 지금 신도림에서 갈아탔어! 넌 어디야?"
진철이는 한국에 있는 동안 안양에 있는 아버지 집에 머물기에, 신도림에서 갈아탄 모양이었다.
"나? 신도림"
우린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이미 같은 열차 안이었다.
"어? 몇 다시 몇인데? 난 10-4 맨 뒷칸이야!"
진철이의 대답을 들으며, 멀리 옆칸 쪽에 서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 1-1 맨 앞칸이야”
같은 열차의 제일 앞과 제일 끝.
"너무 멀다. 그냥 내려서 만나자, 계단 올라가지 말고 내리면 중간에서 만나"
전화를 끈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조금 거세지고 있었다.
그리고 열차는 용산역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다음역은 용산 이 열차의 종착역입니다. 모두 하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언제 봐도 예쁜 한강 다리를 지날 때 종착역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눈 내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같은 공간을 달리고 있을 그 아이를 기대했다.
같은 하늘 아래 끝과 끝의 시차를 두고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이, 내가 먼저 닿은 역에 그 아이도 서서히 진입했다. 천천히 그리고 멈췄다.
문이 열리자 모두가 열차를 빠르게 빠져나가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나는 내리자마자 타고 온 열차의 가운데 지점을 향해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차에서 나와 내 시야를 가렸지만, 이내 조금 지나자 구름이 걷히듯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가 가리고 있던 열차의 전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열차의 맨 끝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가 빠져나간 플랫폼에 단 둘이 남아 서로를 향해 걸어왔다.
열차는 모두 내렸는지 확인하는 방송을 몇 번 더 하더니 문을 닫고 빠르게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진철이의 모습.
빨간 패딩 점퍼에 까만 뿔테안경을 쓴 모습. 사무치게 그리웠고, 원망했고, 이내 감사했던 존재. 그 아이가 나에게로 걸어오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점점 다가올수록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앞섰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플랫폼 가운데서 만났다.
내가 어떠한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진철이는 두 팔을 뻗어 나를 끌어 꼭 안아주며, 인사했다. 자연스러운 허깅이었다.
"뭐야, 윤지아. 왜 이렇게 말랐어. 뭐야. 너 아닌 것 같잖아!"
내가 그랬나? 오랜만에 만난 예전 친구에게서 내 모습이 변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랬나? 너는 좀 찐 것 같은데?"
우리는 서로 달라진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을 올라 역 안 쇼핑몰로 향했다. 저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지 않아 파스꾸찌에 들어갔다. 난 따듯한 카페라테를, 진철이는 아이스 카라멜마끼아또를 주문했다. 여전히 약간 단 커피를 마시는구나. 옛날 생각이 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린 하얗고 깔끔한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외삼촌은 어떤 가게를 하시는 거야? "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내가 물었다.
"일식집 같은 건데, 퓨전 요리를 전문으로 해" 진철이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와 그럼 네가 음식도 만들고 그래?"
의외라는 듯 물었다.
"당연하지, 나 초밥도 잘 만들어!"
요리를 하는 모습이라니.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아직 창밖에는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쇼핑몰의 건물은 둥근 형태로 가운데 가든 같은 광장이 있는데 카페창으로 그곳이 한눈에 보였다. 3층 높이에 이르는 부분까지 계단으로 앉을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띄엄띄엄 연인들이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3년 동안 네 생각 많이 했어. 역시 난 너밖에 없더라"
진철이의 말에, 난 양손으로 잡은 커피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전 연인의 뻔한 레파토리일까.
아니 우린 전 연인이라 표현할수나 있을까.
커피를 마시며 예전 이야기를 나누었다. 축제 때 과에서 주점을 열었던 이야기며, 태국 졸업여행때 탔던 코끼리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냐는 이야기, 경아는 잘 지내냐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키득대다가, 생각보다 우리의 2학년의 추억이 별로 없지 않냐는 내 말에 “ 에이 그래 내가 나쁜놈이다” 라며 다시 용서를 빌기도 했다.
난 아직도 가끔 마비노기에 접속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예전에 진철이와 같이 PC방 아르바이트를 했던 준호도 가끔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엇 준호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나오라고 할까?"
진철이가 갑자기 전화했음에도 준호는 흔쾌히 우리를 만나러 홍대로 와주겠다고 했다.
우린 홍대로 이동하기 위해 카페를 나섰다.
눈은 그쳤지만, 추운 날씨 탓에 꽁꽁 얼어붙어 곳곳이 빙판길이었다.
홍대입구역에 도착한 후부터는 춥다는 핑계, 미끄럽다는 핑계로 우린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렇게 장난스럽게 걷다가 우린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위치한 카페베네로 들어갔다.
거기서 준호를 기다렸다.
오랜만의 만남에 긴장한 탓인지 추위에 지친 탓인지, 나는 조금은 멍하니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진철이는 빨간 패딩을 벗어 나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속삭였다.
"너의 이런 모습이 그리웠어..."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자 준호가 도착했다. 준호는 오랜만에 만난 진철이도, 그리고 나도 굉장히 반가워하며 오랜만에 셋이 뭉친 것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여가며 떠들었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준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더 이상 진철이의 패딩을 덮고 있지 않았고, 진철이의 손을 잡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진철이는 준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에게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난 그 눈빛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다.
"시간 늦었으니까, 지아는 먼저 보내고 우린 오랜만에 PC방이나 갈까? "
진철이가 준호에게 말했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너무 행복해서 시간이 이렇게 된 것도 몰랐다.
예전 청계천 데이트 때처럼 그냥 늦도록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미끄러운 길 때문에 셋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일부러 미끌미끌 장난을 치며 역까지 걸었다.
안양에 있는 PC방을 간다며, 우리는 다 같이 2호선을 타고 신도림까지 왔다. 1호선 갈아타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준 진철이와 준호는 전철에 들어가 손을 흔드는 나를 향하여 얼마나 요란스럽고 시끄럽게 인사를 하던지,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준호도 오늘은 기분이 많이 업된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동창들과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 딱 그 정도였다고 생각했다. 1호선 창밖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 자동차들의 불빛들이 반짝였다. 진철이의 눈빛이 생각났다.
오른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냄새를 맡아보았다.
향수 냄새와 담배냄새가 뒤섞인 그 아이의 냄새.
방금까지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있었던 것이 정말이었다고 증명해 주듯 여전히 그 아이의 향기가 배어있었다.
"우리 주말에 롯데월드갈래?"
준호가 오기 전 카페베네에서 진철이가 말했었다. 여행 준비 핑계를 대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나의 모습에서, 다시 이 아이와의 인연을 잇고 싶지 않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지쳐 기대는 모습이 그리웠다고 한 너의 그 속삭임.
그리고 아직도 나밖에 없다는 그 말들.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머리로는 밀쳐내면서도, 여전히 강력히 내 손에 남아버린 이 향기. 그리고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은 그 목소리.
3년 만에 나타나 언제 우리가 떨어져 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다시 내 마음속을 파고들어 온 아이.
그저 오늘 하루만 오랜 친구를 만나듯 그렇게 지나갔다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오늘의 기억은 오늘만 생각하자. 이렇게 또다시 몇 년간 연락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그 아이와 다시 만났을 땐 오늘처럼 오랜만에 만난 옛연인같이 서로를 사랑했었다는 기억만큼은 떠올리자.
그동안 잘 지냈냐는 인사는 짧게 하고, 짧았던 지난날의 추억들은 길게 회상하자.
그렇게 가끔 일기장을 펼쳐보듯 이야기하며.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때로 돌아가 현재를 부정해도 합리화할 수 있도록.
딱 그런 하루였다. 오늘은.
어쩌면 열차의 맨 끝과 맨 앞에 탄 우리처럼, 우린 항상 적당한 시차를 두고 서로를 그리워할 것이다.
어쩌면 그 시차는 우리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하거나, 또는 영원히 헤어질 수 없게 해 버릴지도 모른다.
따듯했던 그 아이의 손을 잡았던 촉감이 아직 남아있다.
내 작은 방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용산역 플랫폼에서 빠져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걷히고 웃으며 다가오던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은 그렇게 우리가 다시 만나는 장면이 반복하여 떠올랐다.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나 다운모습이었다.
어제 늦게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7시에 눈이 떠졌다. 어제 있었던 일이 사실일까. 정말 있었던 일인 게 맞나?이런저런 꿈속에서 헤매다 깨서인지 아직 꿈속인 것만 같다.
어제 우리의 만남은 현실이었을까.
아이팟 카카오톡을 열어보았다. 맨 위 대화창명이 '진촐이 핸펀' 이다.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촐싹거리기는'
귀여운 대화명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주 잠깐의 일탈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종우에게 아침 인사 카톡을 남겨놓고는 오랜만에 책상정리를 했다.
이렇게나 이른 아침에 눈을 뜨다니.
작은 방의 내 책상은 기다란 책장에 책상이 받침대처럼 기억자의 모양으로 덧대져 있고, 서랍장이 받치고 있는 흔한 디자인의 책상이었다.
조금은 환한 고무나무 색상에 나뭇결이 살아있었다.
책상 너머 난 작은 창으로는 큰 도로변이 보여 자동차 소리가 잘 들렸다.
비 오는 날이면 저 작은 창으로 들려오는 차소리를 좋아했다.
서랍장 위에는 데스크톱 모니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 전 마비노기가 더 잘 실행될 수 있게 아빠가 그래픽 카드도 최신으로 바꿔주셨다.
끊었던 마비노기를 다시 하고 싶어 진 것은 그 아이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끊었다는 표현도 애매하다. 잠시 멈춰둔 게임을 다시 잡은 것뿐이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장난감 상자에 담으며 다음에 또 놀아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다음이란 게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언제든 다시 꺼내면 재개되는 것이다. (결국 그 장난감 인형들은 지금도 내 침대 밑에 있다)
토이스토리의 인형들이 주인을 기다리듯 그렇게 말이다.
멈췄던 무엇인가는 내가 살아있는 한 언제든 재개될 수 있는 것이다.
책상정리를 하다가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2006년의 그 아이와의 추억이 담긴 일기장. 하얀색 바탕에 하늘색 구름 그림이 있는 일기장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펼쳐 보았다.
그 아이와의 시간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는 그 무언가. 손에 잡히는 그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우린 손에 잡히는 추억의 물건은 하나도 남긴 게 없었다.
어제의 일도 꿈인지 생시인지 잠시 헷갈렸을 정도로, 꿈같이 나타나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아이.
한여름 월미도에서 맞았던 소나기만큼이나 언제 왔었냐는 듯 사라져 버리는 아이.
이른 아침, 오랜만에 난 새로운 남색 양장 일기장에 그 아이와 어제 있었던 하루를 기록했다.
새 일기장에 그 아이와의 새로운 사건을 기록하게 될 줄이야.
어제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상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생각난 듯 가방 속에서 어제 내가 계산했던 파스꾸찌 커피 영수증을 꺼냈다. 그리고 다 쓴 일기 옆에 테이프로 붙였다.
주문내역에는 HOT카페라테, ICE카라멜마끼아또가 적혀있었고, 어제 날짜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이것도 추억할 그 무언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추억이라기보다는 증거다. 3년 만에 우리가 정말 만나기는 했었다는 증거.
‘굳이 이럴 필요까지야.’
괜히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그 아이와의 네이트온 대화를 엄청난 양임에도 불구하고 프린트해서 일기장에 붙였던 적이 있었다.
그 시절 나눈 수많은 대화들과, 카페에서의 시간들을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은 내 마음.
손에 잡히는 그 무언가의 형태로 변형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
이렇게라도 붙잡고 추억하고, 기억하고 싶은 내 진짜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아이와의 하루?, 그 아이와의 추억의 물건?
아니면 그 아이의 마음?
부모님과 아침을 먹고, 오후까지 시드니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하게 보냈다.
종우에게서 전화도 한번 왔었다. 종우는 방학기간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다. 오늘도 아르바이트로 지방을 내려간다고 했다. 행사진행을 돕는 아르바이트였는데, 운이 좋으면 연예인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했다. 밥은 꼭 잘 챙겨 먹으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나는 시드니에 관심이 없었다.
가고 싶은 나라로 호주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가보고 싶은 나라 1위는 무조건 영국이었다.
그 아이를 알기 전부터, 어릴 적부터 영국을 가장 동경했다.
동화같이 여왕이 있는 나라. 그 국격에 맞는 국민들의 매너도 멋있었고, 빨간 이층 버스부터 비와 눈이 많이 오는 우중충한 날씨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당연히 영국이 먼저일 줄 알았는데, 할 수없이 정식이가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드니를 선택한 것이다.
정식이는 전문대학 때부터 친했던 다른 과 친구였다.
내가 재수를 한다고 휴학하자, 정식이는 “그럼 나도 할래”라며 가볍게 퇴학해 버리더니 다음 해 서울에 있는 공립대학에 들어갔다.
정식이는 참 쉽게 쉽게 세상을 살면서도 원하는걸 금방 이루는 똑똑한 친구였다.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면, 별다른 조언 없이, 해결책을 바로 제시해 주는 그런 친구.
그런 태도가 부럽기도 했고, 믿음이 가기도 했다.
그런 정식이가 시드니에 가 있으니, 자유여행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지로 시드니를 선택한 것이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점은 호주가 영국령이었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스트리트 이름들도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딴 곳이 많았다.
지난번 사 온 시드니 여행 책자를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트에 정리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종우 아직 아르바이트 안 끝났을 텐데?'
의아해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44 국가코드 영국.
어제 받았던 그 번호. 진철이었다.
"나 준호랑 새벽에 헤어지고 아침에 잠들어서 지금 일어났다. 헤헤"
한국에 온 지 4일째.
어제 하루 나를 위하여 썼으니, 남은 한국에서의 날들은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바쁠 줄 알았다. 항상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또 나를 찾아준 진철이를 보니 이제는 조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아야~ 오늘은 뭐 할 거야? 만나자~"
너무도 당연하게 만나자고 하는 진철이에게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조금 헷갈렸다.
"아.. 그게 내가 오늘은 좀... 피곤해서..."
한 번만 만나려고 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적당히 둘러대며 피했다.
"그래? 그럼 내가 부평으로 갈게~ 6시까지 나와"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3년 만에 나타나 영화 같은 재회를 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냈고, 그것으로 우리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우리 이야기의 마지막페이지는 어제가 아니었나 보다.
부평으로 가는 버스 안에 서서 음악을 듣는 내 표정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어제 그 아이에게로 가던 길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내 표정엔 머뭇거림이 있었고, 약간의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 말해야겠다.
더 이상 나의 일상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으니까. 평온하고 모자랄 것 없던 나의 일상을 위하여. 다시 떠날 그 아이에게 그 어떤 감정도 남겨주고 싶지 않다.
그건 이미 2007년에 다 묻어두었으니까.
그렇다.
이런 결의에 찬 생각은 오히려 지나친 방어였다.
왜냐하면 이 모든 생각은 사실 거짓되었다는 것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그 순간부터 내 모든 세포와 영혼은 그 아이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린 살면서 반드시 만나질 수밖에 없는 소울메이트였기에.
그러나 운명을 거슬러 부인하려 애쓰고 애썼다.
안된다고 그렇게 나를 다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