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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그 흔한 약속

첫눈 오는 날 너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매년 자동갱신 되어버렸다.  

by 윤지아 Dec 18. 2024

새로 이사 온 내 자리는 창가 앞이었다.

그 조그만 창은 노트북보다 약간 높을 뿐이었지만, 좀처럼 내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창밖풍경이라곤 옆 건물의 회색벽과 하얀 샷시 창틀뿐이었다. 다만 오후의 화사함이 서서히 어둑해지는 시간의 흐름만은 느끼게 해 주었다.


다음 주에 있을 중요한 계약건의 검토였다.

워드 창 서너 개를 켜 놓고 분주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떤 문장은 지우고, 어떤 문장은 새로 채워 넣으며, 수천 개의 까만 글씨들이 눈앞에 내렸다.

그러다 무심코 올려다본 그 작은 창 프레임 안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숨이 막히게 촘촘히 수억만 개의 하얗고 포근한 눈송이가 끊임없이 내렸다.

까만 글씨들로 가득했던 내 눈에 하얀 눈송이들이 가득 스쳐 지나갔다. 내려오는 눈송이 하나가 떨어져 시야에서 사라지면 또 다른 눈송이로 옮겨가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올해 첫눈이네'

작년 이맘때와 마찬가지로, 결국 그렇게 또 난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려냈다.


"첫눈 오는 날 명동역 밀레오레 앞에서 만나는 거야. 어때?"

그 아이는 나에게 목도리를 막 벗어준 차여서 추웠는지 빨개진 손을 숨기듯 주머니 속에 넣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게 말이 되냐? 여기서 첫눈 오는 날, 거기서도 첫눈이 오겠어?"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핀잔주었다.

"당연하지.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린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거잖아."

그리고 조용히 그 아이는 내 손을 자기 주머니에 넣어 따스한 핫팩을 꼭 쥐여주었다.


그때 내가 손에 쥐었던 그것은 지금 추운 사무실 키보드 앞에서 내가 쥐고 있는 것과 같은 온도였을 것이다.


다시 내 눈엔 검은 글씨들이 쏟아지고 있다.

2조 계약기간 부분만 벌써 몇 번째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계약서 검토에 도무지 진전이 없음은 저 숨 막히게 내리는 첫눈 때문일까.

제2조 계약기간 : 본 계약의 계약기간은 1년으로 한다. 단, 계약 일방당사자가 계약종료의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 한 본 계약은 1년씩 자동 연장된다.

첫눈이 내리는 날에 만나자는 그 약속은 그 해에만 유효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매년 갱신되는 것이었을까. 그 아이의 무응답은 우리의 약속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까. 그저 날인하기 전 찢긴 계약서처럼 무효였던 것일까.


그해 첫눈 오던 날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는 것이다.

내가 맞았던 그 해의 첫눈은 아마 그 아이의 나라에도 내렸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첫눈이 내리고 있을까' 라며 궁금해했을 것이다. 이미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버린 그 아이를 그저 지금처럼 대책 없이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추억했을 것이다.


"당연하지,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린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거잖아."

나는 다시 시선을 올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같은 하늘아래 이 눈은 공평하게 그곳에서도 내려질까.  

그리고 첫눈이 내리는 날 그 아이도 그날의 약속을 한 번쯤 떠올려 줄까.


그래. 이러려고 그랬나 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 아닌, 매년 첫눈 오는 날 나에게 너를 떠오르게 하기 위함이겠지.


참 잔인한 사람이다.

참 다정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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