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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애 Oct 26. 2020

나를 상처 주는 것들

상처를 희망으로 바꾸는 힘 

마을에서 활동가로 살아가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당연한 것이 나에겐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나에겐 당연한 것이 주민들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문화 차이에서 오기도 하고, 구체적으로는 문화라는 이름 안에 포함된 반복적인 일상에서 오는 것들이다. 때론 노골적이고, 또 때로는 아주 미묘한 문화 차이 속에서 외부인인 나는 그들의 가치와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외부인인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데, 그중에 가장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

“기브 미 마이 머니(Give me my money, 내 돈 주세요)!”

“기브 미 머니 (Give me money, 돈 주세요)!” 


나:

"나 너한테 줄 돈 없어" 

"그 말은 어디서 배웠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얘!" 

"왜 내가 너한테 줄 돈이 있다고 생각하니?" 


매일같이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매번 다른 아이들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돈을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 매우 드물게 어른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이 아이들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왜 이런 말을 '나'에게 하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가르쳤단 말인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 표현을 쓰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또는 어른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외국인이어서, 정답이다.  


영국 식민 지배 이후에도 삼십 년간 일당 독재를 거친 말라위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매년 손에 꼽히고 있다. 국제 원조가 국가 예산의 60%를 차지할 만큼 ‘도움’이 없이는 나라의 살림을 꾸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대도시부터 작은 시골 마을까지 보이지 않는 원조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한국 전쟁을 겪은 후 60년대 우리나라 소년, 소녀들이 서양인을 보면 다 미군인 줄 알고 ‘기브 미 초콜릿’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는 초콜릿이 아닌 돈이나 하다 못해 연필 한 자루라도 실용적인 것들을 묻는다. 


말라위 화폐인 말라위 콰차이다. 20콰차는 우리 돈으로 30원이고, 말라위의 가장 큰 지폐는 2000콰차로, 우리 돈 3000원이다. 


독립을 하고 지난 60년이 지난 오늘날 다른 이웃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말라위의 자립의 속도는 더디었다. 그동안 선의로 가난한 마을을 돌며 식량도 나누어주고, 학용품도 사다준 외국 단체나 개인들은 정부를 대신해 또는 정부와 손을 잡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들이 당시에 베푼 선의는 분명 배고픈 이들에게 잠깐의 풍만함은 주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 곧 떠나는 사람들이었고, 그걸 받는 마을 주민들은 세대가 지나서도 그곳에 머무른다. 거기서 이야기가 반복되고, 퍼지면서 자선 단체나 선교 단체의 선행은 그들이 원치 않은, 예상치 않은 하나의 행동방식과 관례를 만들어주고 갔다. 


마을에 2년 반 정도 있다가 간 것은 참 잘한 것 같다. 만약 내가 첫 5개월 활동을 끝내고 돌아갔다면, 아마도 난 '하나'로 기억되지 않고, 수많은 자선 단체에서 나온 외국인 봉사활동 자라는 버블 속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 것이다. '기브 미 머니'는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말이지만 나와 상대의 사이에 거대한 원조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벽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아직 돈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에 앞서 자기 자신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인지에 한참 배울 아이들이 별 생각하지 않고 이런 말을 내뱉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돈'으로 본다는 생각은 나에겐 상처가 되기도 했다.'나에게 해맑게 달려온 이유가 무엇이라도 얻어 내려는 마음으로 온건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아이들에게 방어 태세를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브 미 머니' 같은 말들이 정말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바라고서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론 다행인 것 같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습관적으로 무의식에 외국인을 보면 그냥 내뱉고 보는 그런 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과거의 관행을 따라 하면 나에게도 당장 주민들의 마음을 사기에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방식대로 계속했다면, 누가 마을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 길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같을지라도 장기전이다. 인생은 장기전이지 않은가? 사람의 관계도, 한 마을의 발전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질이 아닌 마음과 정성을 보여주고, 함께 그 힘을 기르는 연습을 하는 게 나에겐 마을 활동가로서의 역할이었다. 


그것이 결국은 교육의 힘인 것 같다. 모든 참여하는 개개인이 학생이 되고, 선생이 되고, 서로 성장하도록 있어주는 것 말이다. 기다려주는 것 말이다. 이는 때때로 더디고, 그 안에서 마찰도 생기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움직임은 자발적인 힘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작은 몸짓이다. 작은 몸짓이 모이고 모여 다시 조금 더 큰 덩어리가 된다. 덩어리는 더 단단해져 마침내 스스로 마을을 이끌 것이다.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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