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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애 Oct 26. 2020

네가 가면 우린 어떡해?

모두가 성장하는 공부방 


말라위에서 내가 보낸 나날들이 7년이 지난 지금도 떠올리면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듯,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변함없이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 11개월을 연장하기로 결정을 한 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언젠간 마을을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 같은 활동가가 없어도, 나이가 지긋한 촌장님들과 함께 공부방을 운영해 줄 마을 교사들을 찾고 양성하는 것이었다. 


서로 간에 팀워크도 워낙 좋고, 마음씨 따뜻한 촌장님들이었지만, 직접 마을 공부방을 매같이 나와서 운영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예를 들어서,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공부방에 필요한 학습 물자 리스트를 정리하였다고 하자. 회의 결과, 노트 200권, 연필 300자루, 분필 6통이 필요하다. 그다음은? 이제 이 물자를 사러 시내에 나가야 한다. 평소에는 나와 힘 좋은 교사들 2~3명과 함께 가는 것이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없을 때에도 누군가는 예산을 관리하고, 필요한 물자들을 사고 나르고, 또 지출과 수입 관리를 기록하고 보고도 해야 한다. 누군가는 공부방 예산을 전담해야 하고, 누군가는 11명의 교사들과 소통하고 그들이 물자들을 책임지고 제공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역할들을 그동안 다 내가 해왔다. 혼자 하는 원맨쇼 사업이 아닌 촌장님들이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자원과 필요한 자원들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지를 찾는 과정을 1년 반 동안 함께 연습했다. 그리고 남은 말라위에서의 11개월은 나 대신해서 촌장님들의 손과 발이 되어 공부방의 사업과 관련한 활동들을 행정적으로 업무를 매일 나와서 봐 줄 수 있도록 기관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매일 마을 공부방에 나와서 전반적인 관리와 운영을 도와줄 수 있는 인재들을 찾는 여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자원활동 교사들도 공부방에서 가르치는 일 이외에도 작은 비즈니스를 운영하거나, 농사일을 겸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여성들의 경우는 아이들도 돌봐야 한다. 결혼을 아직 안 한 젊은 남녀 청년들은 시간적으로 가장 여유가 있지만, 이들도 언제라도 기회만 있다면 마을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공부방에는 어린이집, 방과 후 초등교실, 성인 문해 교실, 그리고 조그만 도서관이 운영되고 있었고, 각 교실마다 마을 교사들이 자기 시간대에 맞게 하루 3시간 정도 일을 했다. 매달 활동비를 얼마씩 주긴 했지만 그리 많지 않은 돈이었다. 


그래도 워낙 마을에 일자리가 없다 보니 근처 고등학교의 현직 교사가 투잡을 뛰겠다며 우리 공부방에 이력서를 낸 적도 있었다. 반대로 우리 공부방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가 근처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우리 공부방에서 일을 그만두고 떠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공부방 교사들이 다른 생계 걱정을 안 해도 될 정도로의 급여를 주면서 안정적으로 공부방을 운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있는 기간 동안만이라도 조금 더 많이 활동비를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언젠간 주민들만 남게 될 것이고, 원조 기관에서 받는 예산이 줄거나 완전히 끊겼을 때를 떠올렸다. 만약에 받던 금액의 절반밖에 줄 수 없다 그러면 남을 교사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주변의 다른 기관들은 마을 교사들의 활동비로 얼마를 주는지 미리 조사하였고, 그 수준에 맞춰 활동비를 지급했다.


몇 번의 워크숍과 트레이닝을 거쳐서 우리는 정규 파트타임 교사들도 찾았고, 교사 역할과 더불어 마을 공부방의 예산, 행정, 사무 등을 봐줄 직원들도 나중에는 다 뽑았다. 마을 교사들과 직원들, 그리고 운영위원회 촌장님들이 다 같이 지켜야 할 공부방 규칙과 정책들도 마련했다. 사람을 뽑는 것에 있어서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중에서도 하루 2-3시간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또 거기서 꿈을 키워서 다른 큰 꿈을 키워가는 교사들도 보았다. 


어떤 교사는 아침에 정규 학교의 담임 선생님보다 자신이 더 좋다며 오후 방과 후 수업을 들으러 점심을 먹자마자 공부방에 달려오는 아이들의 우상이 되고, 또 어떤 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늦은 오후 수업이 다 마친 후에 빈손으로 집에 가지고 않고 교사용 교재를 들고 가 밤새 촛불 아래서 다음 날 수업 자료를 만들어 오기도 한다. 때로는 아이들과 문제로 학부모와 상담을 하다가 혼자 해결하기 힘든 고민이 생기면, 촌장님을 찾아가서 진솔하게 조언을 구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위로도 받고, 때론 자기의 부족함도 인정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다. 


사업적으로 내가 이루고자 한 목표를 달성하고 왔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촌장님들이 운영위원회 모임을 계속하는지, 그들이 손과 발이 되어 있는 젊은이들이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지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엄청난 희망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을에 오래 있을수록 나의 시선이 아이들에서 어른들로 넘어오는 경험을 촌장님들과 교사들과 활동하면서 느꼈다. 어마한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뿌듯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성인이 되어 어느덧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마을을 대표하는 촌장으로서의 위치와 무게를 뒤로 하고서, 새로운 도전과 활동을 위해 다시 배우고, 시험 (?)을 받기 위해서 나를 계발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어렵지만, 누구에게나 그 첫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나가 정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고, 나의 동료들과 촌장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더 우러났다. 내가 없어진다해서 크게 걱정할 것도, 불안 할 것도, 잘못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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