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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애 Oct 28. 2020

위대한 돈의 매길 수 없는 가치

30만 원으로 프로젝트 꾸미기 

2년 반의 활동 기간 동안 세 번을 날아간 것도 부족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두 번 더 말라위로 날아갔다. 


무턱대고 갈 만큼 용기는 없었다. 두 번 다 현지에서 친분이 있던 지인들과의 인연 덕이었다. 첫 사연은 말라위의 음주주 Mzuzu라는 도시에서 백패커스를 운영하는 한국인 지인과 미국인 남편이 자리를 잠깐 비워야 해서 내가 강아지 두 마리와 백패커스를 봐주게 되었다. 나만의 백패커스를 갖는 로망을 가져 본 나는 두 달간 이를 맛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곤 그리 큰돈은 안 되지만 (비행기 값도 다 안 되었지만, 한국에서 방학 동안 쓸 생활비를 생각하면 이래 저래 손해 보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들의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다.  


운영을 봐주던 백패커스의 리셉션 입구 한쪽에는 로컬 단체에서 여성들이 직접 만든 인형이며 재단한 옷가지들을 팔고 있었다. 관광객이나 외국인이 많다 보니, 현지 단체를 대신해서 백패커스에서 팔아주고 나중에 단체에서 팔린 물건 값을 수거해 갔다. 말라위의 국가 수입에 가장 기여를 하는 것이 담배 산업 다음으로 관광업이다. 말라위 호수며 산이며 아프리카 대지의 아름다움을 오밀조밀하게 갖추고 있다. 그래서 백패커스나 시내 기념품 샵에는 이렇게 아프리카 전통 천이나 자연을 소재로 만든 수공예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공부방에도 재봉 기계가 있는데…’ 

코끼리 인형을 만들고 있는 엄마 무릎 위에서 잠든 사무엘 

다른 기관들에서 기발하고 신선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는 '우리 마을 주민들도 저걸 할 수 있을까? 하면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다음번에 저기 단체에서 수금을 하러 오면 한번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 나는 마을 여성들에게 재봉 기술을 가르치고 직접 만든 수공예품들을 시내 관광 업소에다 납품을 담당하시는 기관 직원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50대 초반의 중년 여성이었으며, 우아한 롱치마에 정갈한 재킷을 입으셨다. 빽빽한 그녀의 검은 머리가 어느덧 수북했으나, 곱게 가다듬은 그 결은 매우 곱고 부드러워 보였다.  


동경과 호기심의 눈빛으로 나는 이미 마음속으론 ‘이 분과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백패커스 라운지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재봉 사업의 여정에 대해서 듣고, 또 내가 좀바에서 하는 일들에 대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다. 외국 단체나 개인들이 이끄는 사업이 아닌 현지인들이 그것도 마을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서 진행하는 사업은 매우 보기 힘들다. 여기 단체도 처음에는 일본 단체에서 도움을 주어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마을 공부방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우리 공부방에도 재봉 기계가 4대가 있고, 재봉 교실도 한 번씩 운영했던 적이 있었는데, 모든 재봉사가 재봉사 선생님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업을 체계적으로 이끌어줄 강사를 찾지 못해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좀바에 같이 가서 일주일 정도 워크숍을 진행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음주주 시내에서 좀바 시내까지만 최소 8시간에서 10시간을 야간 버스를 타고 달려야 한다. 거기서 다시 마을까지 들어가는 것은 택시를 타도 3,40분은 걸리는 긴 여정이 된다. 반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간절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럼요, 왜 안 되겠어요? 근데 저 혼자는 가서 다 가르치기 힘들고, 저희 동료도 한 명 같이 데리고 가도 될까요?”

“아 선생님, 물론이죠! 정말 감사드려요!”


이렇게 쉽게 된 것인가? 


말라위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돈이었다. 성심껏 도와주는 분들도 계셨지만 대게는 내가 돈이 많은 자선 단체 직원이라 생각하기에 ‘이번이 기회다! 뽕을 뽑자!’ 하는 마음으로 필요 없는 것 까지 계산을 해서 나에게 비용을 청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여기 재봉 선생님께 제안을 드릴 때도 비용을 여쭤보시면 답변을 드리려고 미리 생각을 해 두었다. 그런데, ‘얼마 줄 수 있어요?’를 끝내 묻지 않으시는 것이다. 나중에 프로그램을 함께 짜면서 내가 갖고 있는 예산을 대충 공개를 했고, 두 선생님은 평범한 보수를 기쁘게 승낙하셨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나는 두 분의 인건비와 숙소 및 교통비, 일주일 동안 참여자들과 워크숍을 하며 먹을 점심, 그리고 재봉 교실에 필요한 자재값까지 모두 해결하는데 내가 갖고 있는 예산 30만 원이었다. 30만 원이 우리 돈으론 큰돈이 아니지만 여기서도 이 정도 워크숍을 하기에 많은 예산은 아니다. 정말 미니멀 저 예산으로 진행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마을 공부방을 통해서 평소 워크숍을 할 때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돕고, 준비하는 거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번 워크숍도 내가 심지어 마을에 없었어도 전화 통화만으로 주민들이 이미 현장 워크숍 세팅을 다 마련해주었다

점심시간에 사무엘 (어머니가 재봉 수업에 참여 중)을 봐주시는 재봉 선생님 


강사분들과 밤에 음주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갔다. 한 보따리씩 이것저것 가르쳐 주려고 챙기신 짐과 일주일치 개인 짐, 여유 있게 차량으로 편하게 모시지 못하고 이렇게 장시간 야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무엇 하나 하려고 하면 여기선 이렇게 다 아날로그 식이어야만 하는지...  갑자기 이 답답한 현실에 혼자서 회의적 질문을 속으로 하기도 했다. 버스가 움직이고, 텁텁하고 답답한 버스 안을 시원한 바람 하늘이 씻어주었다. 내 마음의 회의감도 강사들에 대한 미안함도 훌훌 털어 버렸다. 그저 감사함 만이 남을 뿐이다. 이런 환경을 다 받아들이고 나와 8시간 동행을 해주는 그들에게. 그리고 적은 예산으로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음에. 그리고 아침에 해가 밝으면 곧 좀바에 도착해 있을 우리의 이른 앞날에 말이다. 


첫날부터 6명의 어머니 참여자들과 마을 촌장님들은 먼 길에서 오신 2명의 강사들을 따뜻한 시골 마음으로 환영해주셨고, 양 쪽 다 남과 북쪽 말라위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정작 재봉 수업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두 지역 다 현지 공용어인 치체와 외에 남과 북의 다른 지방 부족 언어를 사용했기에, 수업에서는 현지 공용어인 치체와 밖에 쓰지 못했다. 그런 상황도 그렇게 웃기셨는지, 북에서 오신 강사분들이 남쪽의 지방 부족 언어 중에 몇 가지 아는 단어나 표현을 말하면 모두가 빵빵 터져서 웃으시다가는 우리 촌장님들도 질세라 북쪽의 지방 언어를 유창하게 뽐내셔서 모두를 또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다. 우리가 다른 지방 사투리를 흉내 내며 남을 웃기는 것과 비슷한데, 단지 차이점은 사투리가 아니라 다른 언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 고난도 (?) 모방이라 할 수 있겠다. 

수업료를 내지 않는 대신에 일주일 동안 지각하지 않고, 과제도 빠지지 않고 해오며, 점심은 공부방에서다 같이 만들어 먹는 것에 동의를 하고선 6명의 어머니들이 참여했다. 오전 4시간을 이용한 워크숍은 오후에 방과 후 수업이 있을 때는 마을 내 한 이웃의 큰 마당으로 다 우르르 몰려가서 남은 활동을 정리하고, 과제도 강사들의 도움으로 해결하곤 했다. 그렇게 그냥 순전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기획해서 만든 이 일주 일자리 워크숍이 이렇게나 큰 우정과 열정을 만들어 낸 것 같은 기분에 삼십만 원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일주일 간 배운 것 만으로 양질의 수공예품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재봉 기술에 관심이 많던 어머니들 중에 몇 분이라도 실력 있는 외부 강사들로부터 가장 잘 나가는 인형과 아이템들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말라위를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또 다섯 번이고 다시 날아가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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