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짐

by 한지애


짐’이라는 표현이 맞는 지 잘 모르겠다.

아니면 ‘책임감’이라고 표현 해야 할까?


가끔 우리에게 의무는 아니지만 왠지 꼭 해야만 하는 일 같은 책임감이 느껴지는 일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삶에서 아이들이 어느 정도의 노동을 하는 것은 가족으로서의 도리이며, 아이들이 충분히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노동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텃밭에 나가서 밭을 일구는 것, 공동 수도 시설에 가서 물을 기러 오는 것, 시장에 가서 그날 저녁에 먹을 반찬거리를 사 오는 것, 가계의 소득을 위한 도넛 또는 얼음 주머니 팔기, 그리고 산에 가서 나무를 캐거나, 지푸라기 뭉치 모아 오기, 점심이나 저녁 식사 준비하기, 옥수수 제분소에 가서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 오기 등 몇몇 생각나는 예를 들 자면 이러하다. 어쩌면 한국 사람들에게 ‘아동 노동’이라는 것은 오로지 부정적인 인식으로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문명인이기 때문일까? 그것은 우리는 실제 사람들의 삶을 대상(object)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주로 어른들은 농사를 짓거나, 상대적으로 소수의 성인들이 상인 또는 공무원 등의 ‘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 온 가족이 서로 협력하고, 때론 허기 진 배를 함께 굶주리며 달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반가운 상황은 아니지만, 많은 가족들이 이 배고픔을 함께 견뎌 냈다. 가족들 사이 끈끈한 유대와 암묵적인 책임감을 나누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아이들의 노동을 요구하는 것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책임감이 ‘짐’으로 전락하는 것에는 그 강도와 양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몇몇 가정에서는 아이들 의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또래 친구들을 만날 기회를 빼앗아 버린다. 아이들의 노동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불시에 일어난다.


우리 센터 바로 뒷 편에 살고 있던 아니(Annie)의 경우가 그러했다. 아니는 재혼 가정에서 살고 있었고, 아니의 새아빠는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 아니의 엄마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송가니 시장에서 토마토 장사를 하 셨다. 그래서 아니 어머니는 장날에는 시장에 가서 일을 하시느라 가정을 돌 보지 못 했고, 그 이외의 날에는 시장에 팔 토마토를 싼 값에 대량 구매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 직접 가야 했기에 집을 돌 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니 의 집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 메이비(Maybe)까지 있었다. 아니의 집 안일은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시작되었다. 지난 날 저녁 설거지, 두 여동생 학교 보낼 준비 시키기, 동생들이 학교에 가면 집 마당 쓸기, 때에 따라 빨래 까지 모든 일이 아니의 몫이었다. 아니의 어머니께서는 자주 아프셨다. 두 집 살림을 하셨던 아니의 새아빠는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 집에 들리곤 하셨다. 아니는 당시 13살이었고, 말라위에서 13살이면 보통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나 이이지만, 학교 결석이 잦았고, 매 학년 말 진급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던 아니는 초등학교 3학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아니는 자신의 이름과 ‘엄마’라는 단어 이외에 제대로 쓸 줄 아는 단어가 거의 없었다.


음리마(Mlima) 마을에 사는 크리포드(Chriford)는 2015년에 15살이었는 데, 아직 7학년이었다. 말라위는 초등학교가 8학년까지 있기 때문에, 크리포드가 7학년 시험과 8학년 시험도 한번에 통과한다고 해도, 그는 16살이었다. 안타깝게도 크리포드는 그 해 진학시험에 불합격했고, 한 해 더 7학년을 다녀야 했다. 크리포드네 가족은 대가족 중에서도 대가족이었다. 그는 8남매 중에서 5번째 자녀였다. 8남매 간 나이 차이가 꾀 나서 그의 누나들의 자녀들과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크리포드네 가족은 결혼한 누나들이 외가 가까이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대가족처럼 보였다. 크리포드네 큰 형들은 다들 다른 도시나 송가니 시장 주변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있는 누나들이 남자 들의 몫까지 해야 했었다. 그래서 좀바(Zomba)산에 땔감을 구하러 갈 때면 크리포드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좀바 주변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좀바 산에서 벌목을 하기 때문에 남들이 많이 가는 시간에 가면 산으로 한참을 계속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크리포드네는 새벽 3시나 4시에 산으로 간다. 그 시 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저마다 벌목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새벽 일찍 10km가 넘는 거리를 무거운 땔감을 운반하는 일을 하다 보니, 해가 뜨기 시작 할 무렵 크리포드는 피곤해서 학교에 안 가기 일쑤였다. 어떨 때는 누나들을 대신해서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나가서 크리포드네 집 앞에 운영하는 작은 구멍가게에 필요한 자재들을 싣고 다녀야 했다. 크리포드가 학교를 자주 못 가는 데는 이러한 이유들이 늘 있었다.


IMG_6491.JPG 좀바산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풍경. 그냥 등산만 해도 힘든데, 아이들은 머리에, 어깨에 목재를 가득 싣고 내려 온다.



마을에서 아이들이 어른들이 노동을 하는 것을 보고 자라면서, 때론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행동을 따라 하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삶을 가꾸어 나가는 방법을 배운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설거지, 저녁 요리, 동생 어린이집 마중 나가기 등을 일찍이 했었다.


마을에서 노동에 메여, 학교까지 못 가는 몇몇 아이들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다. 또 내가 아는 것이 절대 다가 아니기 때문에, 나 역시 어느 정도 외부인으로서 이들의 삶을 계속 지켜보고, 때때로 기회가 될 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해해 보려고 할 뿐이다.


어찌되었든,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희생하면서 해야만 하는 현실은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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