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말라위에 지내면서 ‘엄마’라고 불렀던 분들이 몇 명(?) 정도 계셨다. 말라위 현지어로는 ‘아마이(Amayi, Mother)’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는 나의 첫 번째 그만큼 가장 애뜻한 아마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3년 8월 14일, 마치 첫 사랑을 본 것처럼 그녀를 처음 만난 그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녀의 선한 인상과 몸에 베인 온화한 성품은 이후에 그녀를 알고 지내면서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모성애까지 더해져서, 그녀는 내가 아는 여성 중에 가장 강한 사람 중 한 명이 다. 그녀는 누구보다 따뜻한 분이었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녀의 성품 자체가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함께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민망하지 않도록 이미 들었던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 마냥 반응을 하셨고, 당신의 무릎이 안 좋은지 오래였지만 집에 찾아 온 방문객이 떠날 때면 맨 발로 나와 큰 길 입구까지 배웅을 해주셨다. 마을 공동 행사에 먼 손님이 오면, 손님들을 위해서 따로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을 보따리에 싸 오셔서 대접 하셨다. 젊은 교사들 앞에선 권위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항상 먼저 듣고 이해하고자 하셨다.
아마이는 냔다마(Nyandama) 마을의 촌장님이셨다. 냔다마 마을은 옆 음리마 (Mlima) 마을이 인구가 많아지면서 10여 년 전에 분리되어 만들어진 마을답게, 마을 주민들은 서로간 친척 관계에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냔다마 마을도 우리 공부방에 오는 지역 주민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에, 냔다마 촌장님은 자연스럽게 마을 공부방 운영위원회의 임원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촌장님들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 공부방에서 성인 문해 교실의 교사로 활동했다. 사실 냔다마 촌장님은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문해 공부를 마쳤고, 그런 경험을 살려서 마을의 어머니들에게 글과 산수를 가르치겠다고 자원봉사로 지원 한 것 이후로, 지금까지 쭉 그녀는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동료 교사와 수업중인 모습 수업 후 학생들과 함께
나는 마을 내 어르신들과는 영어보다 치체와(Chichewa, 말라위 공식 언어)로만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어른들에게 영어로 말하는 것은 버릇이 없고, 그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난 현지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던 때에도 그냥 현지어로만 이야기 했다. 특히, 아마이와 대화할 때는 더 그랬다. 손짓, 발짓, 미소로 우리는 소통을 했다.
아마이는 마을 공부방에서 나를 만나면, 조용히 나를 부르시곤 말씀하셨다.
“이번 주말엔 뭐해, 집에 있을 거야? 우리집에 와, 네가 좋아하는 토바 (Tobwa, 현지 곡물음료) 만들어 놓을게.”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냔다마 마을까지는 3km 정도를 내려가야 한다. 하루는 말로만 간다고 하고, 귀찮아서 가지 않았다. 난 속으로 아마이는 원래 친절하신 분이라 그냥 인사치레로했던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월요일에 나는 공부방에서 아마이를 만났고,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왜 안 왔어? 바빴어?”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애교를 부리며 대답했다.
“네, 잠을 너무 많이 잤어요!”
나를 민망하게 하지 않으시려고, 아마이는 빠진 앞니 두 개를 훤히 보이시며, 크게 웃고 마셨다. 난 아마이가 정말 나를 기다렸을 것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아예 약속을 안 하거나, 아니면 반드시 지켰다.
주말에 아마이 댁에 놀러 가면, 냔다마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아이들을 다 만 날 수 있다. 냔다마 마을에는 유독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냔다마 어머니의 멀거나 가까운 친척들이다. 우리는 아마이 집 앞에 멍석을 깔고, 아마이가 내주는 주전부리를 함께 나눠 먹었다. 짐베(Nzimbe,sugar cane, 사 탕 수수), 은데자(Ndeza, ground nuts, 땅콩), 치낭과(Chinangwa, Casava, 카사바), 파파야, 망고 같은 제철 과일부터 내가 좋아하는 토바 음료나 수제 와인이나 보드카 등 없는 것이 없다. 물론, 술은 아이들 빼고 나에게만 주신다.
보통 초등학교 정도 다니면, 사탕수수 정도는 다 이로 껍질을 벗겨서 먹을 수 있다. 초반에 내가 사탕수수 껍질을 벗기지 못 할 때, 사진에서처럼 아마이는 일일이 칼로 껍 질을 다 벗기고 속 알만 나에게 주셨다.
알고 보니, 아마이 댁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또 있었다. 아마이는 집 에서 술을 양조하셔서 주로 마을 성인 남자들을 대상으로 조그만 비즈니스를 하고 계셨다. 아마이는 투잡을 뛰고 계셨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마이의 남편은 내가 ‘아꼬꼬(Agogo,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한 번 말라리아로 크게 고생을 하셨었는데, 그때 내가 염소 고기를 사 간 이후로 나와 할아버지는 더 가까워졌다. 할아버지는 내가 갈 때 마다, 맨발로 뛰쳐나오 시며 듬성 듬성 남은 이빨 사이로 환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아마이 뿐만 아니라 아꼬꼬도 몇 가지 소규모 비즈니스를 하고 계셨다. 첫 번째 비즈니스 물건은 바로 아꼬꼬가 직접 키운 담배이다. 이 담배를 말린 후에, 다 쓴 연습장 이 면지에 하나씩 돌돌 말아서 낱개로 파신다.
아꼬꼬와 아마이 !
송가니 시장에만 가도 공장에 만들 어진 담배가 한 개피당 100mk(Malawi Kwacha, 약 200원)에 파는데, 아꼬꼬가 직접 말아서 만든 이 담배는 그것의 반 값밖에 안 했으니 마을 청년들에겐 인 기 만점이었다! 두 번째 비즈니스는 바로 커피이다. 촌장님 댁 마당에는 커피 나무가 있는데, 그 커피 열매를 직접 말리고, 볶고, 갈아서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팔고 계셨다. 난 그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 1 봉지에 20 콰차(약 40원)에 파는 것을 내가 갈 때 마다 10 봉지씩 주곤 하셨다.
직접 집에서 만든 술과 커피,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그만 비즈니스이다.
처음 몇 번 아마이 집에 초대 받 아서 갈 때는 죄송한 마음이 컸다. 왜냐 하면 아마이댁의 오리가 매일 알을 낳는 것도 아닌데, 내가 갈 때 마다 오리 알을 두 개씩 삶아 주셨었다. 내가 아니 었으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를 주고 팔 수 있는 것들을 그냥 막 주셨으니 속으로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한 번씩 아마이 집에 가지 않으면 내가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어느새 초대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오른쪽 위 절인 생선 반찬, 시마(옥수수가루로 만든 말라위 주식), 그리고 아래에 오리알 무려 3개나 볼 수 있다! ! !
“집에 우파(Ufa)남아 있어?”
아마이는 내가 먼저 말 하지 않아도 우리 집에 우파(Ufa, 옥수수 가루)가 남아 있는지 물어보셨다. 혼자 살고 있고, 따로 농사를 짓지 않는 나를 생각하셔서 저녁에 밥을 해 먹을 거리가 있는지 주기마다 물어보셨다. 난 참 복 받았다. 아마이 뿐만 아니라 여러 촌장님들께서 우리 집에 우파가 남아 있는지 걱정해 주셨었다. 덕분에 난 늘 잘 먹고, 건강했는지도 모른다. 어떨 때는 정말 집에 우파가 하나도 안 남아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마이는 내가 집 에 올라 갈 때, 손자들에게 부탁을 해서 자전거 뒤에 20kg 정도의 우파를 챙겨 주셨다.
“너무 많아요 아마이! 조금만 줘요!”
“에이, 다른 게 없어도 우파는 집에 항상 있어야 하는 거야. 많이 있을수 록 좋은 거지 뭐!”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정말 바빠서 내가 나를 못 돌본 경우 1,2번을 제외하면 집에 먹을 것이 없는 적은 없었다. 먹을 반찬은 없더라도, 우파는 항상 있었다. 사실 아마이의 우파 챙겨주기는 오래 전 시작되었다. 몇 년 전, 아마이의 아들 중 한 명이 교통사고로 아들 셋과 아내를 먼저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이 후로 홀로 아들 셋을 키우는 며느리가 가여워서, 아마이는 매 해 옥수수를 수 확하면 꼬박 7km 거리에 있는 그들의 집을 찾아가 옥수수를 나눠주고 있다고 하셨다. 하루는 아마이를 따라서 같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엄마와 세 아들은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아마이를 통해서 그 가족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난 그 가족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 며느리와 손자 셋을 몇 년째 뒤에서 지켜주고, 옥수수라도 보태어 도움이 되고 싶은 아마이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오랜만에 방문한 할머니 앞에서 너무 반가워서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손자들과 시어머니를 마치 친정 어머니처럼 어려움 없이 편하게 대하는 며느리를 보면서 사그라졌다. 그들은 가끔씩 서로 왕래할 수 있음에, 그리고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 고, 또 그것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아픔과 상처가 쓰라리고 고통스러움을 그 속에서 함께 견뎌내고 아파할 수 있는 것이 그 상처를 덜 느끼게 할 수 있음을 아마이를 통해 배웠다.
한 번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집에만 누워 있었다.
나를 집에 와서 보고 간 미지를 통해서 아마이가 나의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8시 좀 넘은 시간, 나에겐 더 자고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 때, “’똑똑” 누가 방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아마이가 이마에 송글 송글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시며, 손녀 조이스와 함께 서 계셨다. 조이스의 손에는 그녀에겐 다소 커 보이는 보자기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은 옥수수를 보자기에 싸 오셨다.
아마이가 사는 냔다마 마을에서 우리집으로 오려면 거리가 3km인 것을 제외 하고도 산길을 따라서 오는 내내 오르막 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시장을 가려고 해도, 산에서 내려 가는 일이 더 많기 때문에, 그날 우리 집을 온 것은 정말 나를 보기 위해서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 하셔서 오신 거였다. 그 땐 ‘감사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 문 앞에 서 있는 그 얼굴을 본 순간부터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어떤 뜨거운 것과 뭉클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아마이가 나에게 보여 준 사랑만큼 그녀에게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에게 아마이는 정말 말라위에서 나에겐 정말 엄마 같은 존재였다.
평생 농사짓고 불 피우고 일하느라 거칠어지고 다 갈라진 손, 두툼하고 다 까진 공룡 같은 발바닥, 문간 사이로 지 나가는 주먹 만한 바퀴벌레를 나를 위해서 거침 없이 그 맨 발로 잡아 주시던 아마이가 너무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