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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애 Feb 15. 2021

모두가 여성이 되기를

노마딕 주체성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예전부터 늘 많았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자유를 꿈꾸고 실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무엇이든 하고, 어디든 가고, 사랑하는 이를 보살피고 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까지 흔히 행복한 삶이란 경제적 자유라는 전제 조건을 달고 있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박사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변적 철학과 꺼림칙한 정치 사이를 오가며 타인들의, 여성들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 특히 집안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면서 온갖 유혹 (유튜브, 인스타, 각종 자극적인 뉴스들) 속에서 - 백 퍼센트 뿌리치지 못하고 허우적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사회적인 개인적인 문화적인 인문학적인 것들의 가능성은 그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런 말을 했을 때 '공감하고 들어주는 사람들'이 '꾀나'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개인의 삶의 질과 감수성에 온기를 더해주는데, 그에 반해 아직도 마음이 영 찝찝하고 들었을 때 '내 일이 아닌데'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보통 정치적이거나 전문가들만 아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래서 후기 구성주의자/ 후기 모더니스트들의 연구와 인식론, 존재론, 그리고 그 안의 생성된 개념들이 새롭고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결론적, 분석적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주목하여 어떻게 사회라는 것이 우리의 인식, 정체성, 주체의식과 상호작용하며 다양하게 복수적인 의미로 확장시켜나가는지, 어떤 것은 활성화되고 어떤 것은 사라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리좀이란 개념과 노마디즘을 통해 로지 브라이도티는 들뢰즈의 여성 되기를 되짚어본다. 

남성성, 여성성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제시했던 유동적, 변동적, 외부를 향한 욕망들에 초점을 두고서 새로운 모습의 주체들의 다양한 존재와 창조를 원했던 들뢰즈는 나중에 페미니스트들에게 역사적 여성의 투쟁을 외면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여성 되기가 만약 실제 '성'이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라면 그들의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이도티는 들뢰즈가 말하는 여성 되기에서 여성은 우리 사회 내에 '타자' 또는 '소수자'로 존재하는 모든 주체들을 대변한다고 설명한다. 


서구 철학을 공부하면서 재밌는 점, 특히 동시대 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재밌는 점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상, 주체, 행위자를 우리나라의 맥락에서 적용해 볼 때이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 약자, 다수가 아닌 자들은 누구일까? 그 범위와 위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브라이도티는 크게 이민자, 망명자, 성적 소수자, 유색인종계, 전쟁 피해자 등을 언급했다. 


내 연구의 초점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탈북 여성들이다. 그들 안에서도 '잘 사는 사람' 1부터 '못 사는 사람 1'까지 당연히 나눠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성들을 집단으로 정의한다면 그들이 북한을 떠나 지금은 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것이며, 이 안에선 중국에서 머물 당시 인신매매, 중국에서 만든 가족 내 폭력 등의 경험이 있는 이들을 또 하나로 묶어줄 수 있을 것이며, 이들 중 북한으로 북송되어 다시 어렵게 탈출해 한국에서 사는 이들도 하나로 묶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나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노마딕, 즉 유목민적 주체성이란 비유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브라이도티는 이 과정을 지도화하는 것이라 말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이들의 사회적-정치적 공간을 더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들의 지점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저항의 형태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들을 노마딕 주체라 하는 것은 그들의 지점이 그만큼 안정적이거나 고정된 위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표가 변화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상대주의에 빠져 그들의 현실적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라 비판하는 자들도 있으나, 뭉퉁그려 한 집단 내 세부적 카테고리들을 고려하지 않고 구름에 둥둥 떠다니는 것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보다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타자의 지점이 되지 않고 사유하는 것에 대해선 고대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오면서 그 의미와 가치가 줄어들었다. 나중에 괴테 역시 예나 전쟁을 가까이서 보았으나 참전하지 못하고 글을 쓴 것에 대해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고 떳떳해하지 못했다. 폭풍우 속을 바람 한 점에 흔들리지 않고 유유히 걸어가는 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동시에 여기에 깔린 암묵적 전제: '탈북 여성들은 다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다.'는 반드시 경계되어야 하고, 그 경계의 존재도 직접 연구를 해봐야만 아는 것이다.


갈 길이 멀고, 나 역시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에 어느 때보다 관심이 많은 나날들이지만 내 삶의 목표와 가치를 알고 실천하며 살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다. 





<그림: 파울라 모더손-베커, 자화상,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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