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행위 사이
철학의 갈래에서도 인식론과 존재론이 큰 두 갈래로 존재한다.
Epistemology, 인식론은 이념과 개념 등 어떤 틀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느냐에 관한 것이라면 ontology, 즉 존재론은 우리의 존재 형식과 양식에 관한 것이다.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기원은 매우 다른 갈래에 '존재'한다. 인식을 하기 위해선 존재가 선행되는데, 존재만으로는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우린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무엇을 믿는가를 인식론에서 구체화하게 된다.
그동안 어떤 식으로 우리가 존재해왔고,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인식론을 넘어서서 어떤 행위를 하며 우리가 살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 비생명체가 어떤 행위성 또는 행위력을 갖는지에 대해서까지 논의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브런치에 이런 지루하고 개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은 글을 쓰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나만큼 우리가 하는 일상 속의 행위, 예를 들어서 아침에 일어나고 눈을 뜨고, 무언가를 보고, 또 만지고, 또 먹는 그런 행위들이 어떻게 우리를 만들어가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꼭 모두에게 똑같은 결과나 관점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상의 행위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무언가를 할 때, 우리가 의식대로 하는 것 같아도, 많은 일상의 보편적인 행위는 큰 의도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고 되돌아보면 결국은 우리의 어떤 식으로의 가치 판단에 의해서 그런 반복적인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 사회가 변하는 것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을 새로운 개념, 용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때 일어난다. 국제 결혼, 게이, 동성애, 범세계주의관, 기후 변화, 차별금지법 등의 것들이 그런 맥락에서 발생하지 않는가? 사회는 항상 무언가를 계속 유지하려는 것과 변화하려는 것 사이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세대 간의 격차와 교류 사이에서 그것은 계속 회자되고 질문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나 너무나 지루해서 더이상 필요 없는 것 같아도 아직까지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어떻게 탈북민을 바라보는가, 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관한 것일 것이다. 최소한 통일이 되기 까지는, 아니 어쩌면 통일이 된다면 더 큰 사회적 쟁점으로 화두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삼만 여명의 탈북민들에게 대한민국 사회가 강요하는 여러 가지 규율과 가치는, 개인적으로는,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남한 사회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윗 마을'에서는 아직도 간직하고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한반도에 대한민국만 존재한다면 이런 관행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어떤 식으로의 통일을 그리고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방식은 일방적인 강요가 아닌 상호 이해와 존중을 통해서 가장 안전하고 신뢰가 있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에게 탈북민이 가져오는 가치와 그들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지금 내가 하는 박사 과정도 그러한 여정의 일부인데,,, 독일 지도 교수와 매우 국제적 배경을 갖고 있는 다른 박사생 동료들에게 나의 관점을 100퍼센트 공감하도록 하기에는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는만큼 시도해보고 싶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10년이 걸리든 3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나는 내가 믿는 그 길을 계속해서 밀고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