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투마와의 동거

by 한지애

마을에서 활동가로서 나의 하루 일과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아침 7시 40분 에 집에서 나서고, 8시 정도에 지역 학습마을 공부방에 도착하였고, 11시 반 정도에 오전 어린이집 운영이 끝나면 음리마 촌장님 댁이나 나의 친한 동료 교사 미지네 집에 따라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 2시까지 마을 공부방으로 갔다. 마을 공부방에서 오후 초등학생 방과후 교실과 성인 문해 교실을 운영 했고, 대략 4시 반에 마무리가 되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교사들과 공부방 직원들과 20분 정도 마무리 회의를 한다. 그리곤 부지런히 30 여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의 업무는 끝이 다.


우리 마을은 대부분의 말라위의 농촌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가로등이 없었 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오후 5시 30분 정도가 지나면 급격히 어 두웠다. 이렇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을 하다 보니, 그 이외 시간이 양적 으로는 많지만, 빨래나 청소를 평일에 하기는 힘들었다. 매번 주말이면 몰아서 각종 집안일, 밀린 사업 계획서작성과 사업 실행 후 정산 등 행정 업무를 하 고 나면 어떨 땐 주말도 주말이 아니었다. 아침과 저녁에 혼자 밥을 해 먹는 것도, 혼자 먹는 것에 비해서 불을 피우고, 온갖 재료들을 다듬고 준비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요리도 덜 하게 되고, 내 자신에 대해 서 소홀해 졌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자, 어떻게 내가 힘든 걸 아신 건지 음리마 촌장님께서

내가 살던 게스트하우스에 있던 전기 스토브가 고장이 나서 밥 한 끼를 하려고 해도 항상 참숯으로 불을 피워야 했다. 불 피우는 것만 20분이 넘게 걸렸다.

어느 날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음리마 촌장님은 참고로 9남매의 가장이었고 나를 친자식처럼 챙겨주던 분이었다. 그 제안은 바로 촌장님의 12살 짜리 딸 인 파투마(Pathuma)를 같이 데리고 살라는 것이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더 구 체적으로 설명하면, 사정은 이러하다. 음리마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아침에 초 등학교가 위치한 CCAP 마을(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서 생긴 선교지역이 며, 교회를 비롯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세워졌었다.)까지 5km가 조금 넘는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CCAP 마을에 살기 때문에, 촌장님은 어차피 파 투마도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매일 CCAP로 가야하고, 오후엔 파투마가 우리 마을 공부방에서 방과후 교실을 다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나와 같 이 집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음리마 촌장님은 파투마가 나와 함께 식 사를 하고, 집 청소도 도와주고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무리 이제 12살이 된 파투마라도, 아직 애라는 생각이었 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는 것인데, 과연 내가 잘 키울 수 (?) 있 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파투마를 비롯해 대부분 마을의 아이들은 여자든 남자든 9,10살이 넘으면 집안일, 텃밭일 등 어른들의 일을 돕고 동생을 보살피 는 등 일찍 어른스러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나는 마을에서 몇몇 아이들 과 가깝게 지내며, 주말에는 가끔 아이들을 우리 집에 불러서 다같이 옥수수, 감자, 그리고 고구마 등을 삶아 먹거나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서 먹긴 했지만, 내가 데리고 살았던 적은 없었다.


또한, 내 마음 한 편에서는 또 다른 걱정이 있었다.

‘나를 아동 착취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나는 마을 사람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염려가 되었다. 이렇게 망설이는 나의 마음을 잡아준 것은 파투마의 어머니와 파투마였다. 파투마 어머니, 그러니까 촌장님의 사모님은 너무나 차분하게, 그리고 안정 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걱정하지마. 파투마가 집에서도 잘 했기 때문에, 거기 가서도 말 잘 들을 거야. 나는 걱정되는 게 없는데, 넌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파투마, 너 정말 괜찮아? 엄마 보고 싶다고 우는 거 아니야?”


난 어머니의 말씀에 파투마에게 괜히 말을 걸으며, 나의 이기적이게 보일 수 있는 최종 결정을 계속 미루어 보려고 했다.


“아이, 하나~ 키키키키키히히히히 난 괜찮아요!!!”


세상 진지한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보였다. 그렇게 파투마와 나의 동거는 시작 되었다. 나의 걱정과 다르게, 내가 파투마와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 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제 너 좀 쉬어도 되겠다! 파투마는 좋겠네, 하 나라 지내서?” 하며, 오히려 파투마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와 함께 지내게 되자마자, 이 소문은 온 동네에 다 퍼졌고, 동네 아이들은 아침에 초등학교로 등교하는 길에 우리 집을 지나며, 파투마를 핑계로 나를 불러댔다. 그들의 외 침은 파투마로 시작해서, 하나로 끝이 났다.


CCAP 마을에 위치한 나의 집. CCAP고등학교에서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인데, 나는 저기 왼쪽 창문이 있는 방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내가 사진을 찍은 이 위치에서 나와 파투마를 아침마다 불렀다.


파투마와 함께 살게 되니, 이제 나는 정기적으로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을 사둬 야 했다. 혼자 지낼 때는 매 끼니를 불규칙하게 먹거나 거를 때가 많았다. 솔 직히 고백하자면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게 싫어서, 마을에 내려갔을 때, 주민들 이 주는 음식을 다 챙겨 먹고, 배가 부른 상태로 집에 와서, 그 뒤론 음식을 안 해먹은 적도 많았다. 나는 현지 음식을 정말 현지인처럼, 아니 현지인보다 잘 먹었다. 어떤 외국인들은 비리다고 먹지 않는 민물 생선부터 콩조림, 고기, 야채 등 보통 마을 사람들이 먹는 것은 다 먹을 수 있었다.


파투마와 살게 된 이후부터 아침마다 나는 마을 이웃 아주머니께서 직접 만드시는 툼부와(바나 나 와 옥수수 반죽을 섞어 만든 말라위 현지 도넛) 4개를 사서 따뜻한 차와 함께 아침으로 먹었다. 저녁에는 시장에서 장을 본 신선한 재료들로 파투마와 함께 밥을 차려서 먹었다. 집에 한 사람이 더 생긴 것 뿐인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혼자 지낼 때보다 훨씬 편해졌다. 갑자기 정전이 되어 깜깜해져도, 파 투마와 함께 촛불을 켜 두고는 언제 노트북 배터리가 나갈 지도 모르는 채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오전에 일어나면 파투마는 눈을 뜨자마자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집 바닥 청 소를 했다. 가끔 소통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파투마와 살기 시작한 시기는 2015년 9월이었던 것 같은데, 그땐 내가 이미 현지어를 나름 잘 하던 때였기 때문에 같이 살면서 큰 문제는 없었다(적어도 나에게는! 파투마는 어떻게 생각 하는 지 모르겠다?). 내가 한 현지 음식은 정말 맛이 없었지만, 주말에 쉴 때 는 내가 직접 요리를 해 주었고, 파투마의 친구들을 주말에 불러서 아이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해먹거나, 뒷산에 함께 놀러 가기도 했다. 특별한 날은 시장 에 함께 장을 보고, 5km의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코카콜라 한 병을 사주었 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2016년 1월에 떠나기 전 까지 약 4개월을 함께 지냈 다.


내가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나기 전 날, 난 파투마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 었다. 나는 파투마와 8살 양코와 함께 칠와(Chirwa) 호수에 놀러 갔었다. 아이 들은 한 번도 호수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칠와 호수는 좀바 산에서 송가 니 시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항상 저 멀리서 보인다. 때론 안개에 묻혀서 안 보일 때도 있지만, 난 아이들에게 그 섬 주변과 호수를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정전이 되면 이렇게 방에 캔들을 2~3개 켜 둔다. 캔들은 마을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다. 물론 성냥개비도.

호숫가의 뜨거운 햇볕도 느껴보고, 물에 발을 담가보기도 하고, 칠와 호수 안 쪽의 섬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나오는 것을 지켜 보기도 했다. 그 다음날 파투 마는 원래 살던 음리마 마을의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거대한 짐을 챙겨서 비 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일찍 수도로 올라갔다.


칠와 (Chirwa) 호수에서 섬을 배경으로 점프샷. 파투마, 양코 그리고 나

파투마는 수줍음이 많고, 평소에도 말이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 내 주변 어딘 가에 서성거렸고, 내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 들어주던 그런 아이였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은 전형적인 말라위의 여느 아이 들이나 다름 없었지만, 난 나에게 관심을 사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는 아이들 보다 항상 말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조용히 보고 있다가 손을 내미는 파투마에게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함께 살 면서 더 책임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파투마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투와 함께 하면서 자식을 낳으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약간 하기도 했었다. 오버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만큼 나는 파투마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가 무엇을 하든 항상 신경이 쓰였다. 때론 내가 말하지 않아도 혼자 척척 이것 저것 해내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나 는 그녀가 그렇게 강하게 씩씩하게 커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 모질게 보이더라도, 속으론 마음이 아프더라도 난 나와 짧게 보내는 이 시간 동안 그녀가 여태 동안 가족들과 이웃들을 통해서 보고 배우고, 그렇 게 몸에 익힌 것을 혹여 잃게 될까 두려웠다.


내가 곧 내가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그녀 역시 그녀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내가 떠나고 난 뒤, 마을로 돌아간 파투마의 일상은 조금 적응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나와 단 둘이서 살던 때가 여러 면에서 훨씬 풍요로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괜히 나 때문에 아이의 실제 환경을 거스르고 생활 했던 것은 아니 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나와 파투마가 함께 나눈 시간 속에서 웃 고, 울었던 기억들이 그에 대한 답을 말해줄 것이다.

patuma.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