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에서 이사이아 베를린', 세일라 벤하비브 교수
벤하비브 교수는 2장의 시작 소주제를 터키계 유대인인 본인의 뿌리와 그 역사에 대한 고찰로서 시작한다. 우리가 유럽계 유대인들의 운명과 역사에 대해서 잘 아는 반면에 터키계, 아랍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게 사실이다. 어쩌면 유럽의 역사도 그렇게 깊게 들어가기에 이쪽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모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우리가 놓여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브런치 편에서 다루는 제 2장은 "동질성과 차이성: 정치적 근대성에 비추어 본 인간 존엄성과 전통적 주권" 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벤하비브 교수는 1492년 스페인의 통일과 카톨릭을 국교로 강요하며 유대인을 비롯해, 무슬림에 대하여 개종 또는 추방을 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을 시작하여, 이후 스페인에서부터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 등으로 유대인이 이동을 하고, 가장 우호적이었던 오토만 왕국으로도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재정착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해서 1992년에는 유대인의 터키 정착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축하인 동시에 또한 스페인에서 처음부터 망명을 가야했던 기억을 다시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부가적으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스페인에서는 당시 쫓겨낸 유대인 후손들에게 손쉽게 (?) 스페인 시민권을 신청 (귀화) 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어서 그 의도가 진정한 사과인지 정치경제적 의도가 숨어있는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기도 했다. 관련하여 아래 기사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비슷하게 포르투갈에서도 이 법을 실시하고 있는데, 실제로 베를린에서 내 짝의 첼로 학생 중 한명인 이스라엘 친구가최근 법 개정으로 포르투갈 시민자가 되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911766.html
아무튼, 오늘날 터키계 아랍계 유대인들의 뿌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벤하비브 교수에 의하면 이렇게 카톨릭 중심으로하는 스페인 왕국의 정책으로 인해 당시 오토만으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한편, 벤하비브 교수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환대 Hospitality'를 보여준 오토만 제국을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고 제시한다. 즉, 환대는 '외부인 outsider, visitors'에게 베푸는 개념이기에, 얼마나 베푸느냐, 즉 시민권을 얼마나 부여하고 인정하느냐에 대한 주권적 힘과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는날 난민과 이민자들에 대한 국가들의 시선과 정치적 의견들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터키는 세계 2차대전 히틀러에게 전쟁 동참 제의를 받는데, 당시 터키 공화국에 새롭게 부임한 지도자는 다시 불안정한 혼돈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전쟁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독일 나치에게 무기를 제공해준다. 그럼으로써 터키로 정착한 유대인들 역시 정치범 수용소를 가야했다는 점을 명확히 벤하비브 교수는 언급하고 있다. 벤하비브 교수는 자신의 자서전적 배경을 소개하며, 제 2장 제목의 일부인 '동등성과 차이성'이 유대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준다. 즉, 그들은 정착하게 된 사회에 동질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약자/ 위험에 처하는 존재로서 영구적으로 머물어, 결국은 차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벤하비브 교수는 유럽중심의 유대인 역사와 유산이 터키계 유대인인 자신을 포함해 아랍에 정착한 유대인 집단들의 경험과 유산에 대해서도 정의를 부여하는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할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발견과 연구가 필요한 것을 이야기한다.
벤하비브 교수는 그에 반해 독일계 유대인 출신의 철학가, 사상가, 정치가, 작가들의 활동과 업적들이 그만큼 15세기에서 서서히 시작해 19세기 세계1,2차 대전을 겪으며 분산된 정체성과 주권국가에서의 시민성을 어떻게 조화해 나가며 모순을 극복하려는지에 대해서는 진실되고, 독특하며, 깊은 탐구의 가치를 지님을 인정한다.
이를 위해 첫 장에서 언급했던 두 유대인 사상가를 보다 깊게 들여다보는데, 바로 라비 루카스 Rabbi Luca 와 모리츠 골드스타인 Moritz Goldstein 이다. 첫장에서는 이 둘이 이방인으로 내몰린 유대인의 위치에 대하여 그들의 과거,현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입장이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을 강조했던 반면, 이번 장에서는 비록 다른 접근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둘이 궁극적으로 시도하고자 한 것에 본질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점에 해석의 초점을 두고 있다.
라비 루카스는 유대교의 전통적 가치와 그를 보존하고 이어나갈 수 있는 집단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과거 성경에 나오는 유대교에 대한 강조가 아닌 동시대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의 학문, 철학, 역사등의 분야에서의 업적과 우수성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살아남는것이라 했다. 특히, 루카스가 추구하고자하는 '과학'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아는 '과학'과는 내용상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과학과 같은 논리적인 방법으로 유대인의 정체성과 기원을 세우고, 그 안에 '근대성 modernity'를 강조함으로써 유대인의 존재적 가치를 더 세련되게 하고자 노력했다.
한편, 골스타인은 “ 독일 유대집단체의 딜레마. 도발적 수필에 대한 이야기 German Jewry’s Dilemma. The Story of a Provocative Essay,” 라는 책을 통해서 '과학'과 '예술' 및 '문학'을 대조하며, 민족적 과학은 없으나 민족적 예술, 민족문학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며, 민족적 예술과 문학은 결국 '고향에 있음'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구 반 (half) 타자인은 제외된 자이며, 집이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며, 서구유럽 문화속 유대계 사람들에게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는 것이 제한적이게 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유럽에 거주하며 갖게된 '독일성'을 완전히 지울 수도 없음을 명시한다. 그들에겐 유대 문화만큼이나 독일 문화도 그들의 반(half)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이냐 문학, 예술이냐 그 작업의 질과 성격은 다르지만, 골스타인은 유대인들의 공적 공간 public sphere 이 만들어질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루카스는 유대인의 '언어 launguage'가 필요함을 이야기하며, 그들이 유럽땅에서 갖고 있는 ' 독일의 독일인들과 동등한 시민으로서는 같지만 문화적으로 기원적으로 다름'의 딜레마를 어떻게 조율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필력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문화적으로 주류와 그렇게 크게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하부 대중성을 창조하는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정치적 경험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치적 근대성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벤하비브 교수는 그렇지 않으며, 이를 가로막고 있는 정치적 근대성에 대한 모순Paradoxes of Political Modernity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간다.
즉, 여기서 정치적 근대성의 모순이라는 것은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경험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출현오늘날 근대주권국가가 시민들이 동등하게 갖는 시민권에 대한 존엄성과 국가의 주권, 즉 이 두가지의 이중적 정당성 사이에 발생되는 것이다. 벤하비브 교수는 한나아렌트, 한스 켈센, 레오 스트라우스와 헤르츠 라우테르파츠트 등의 유대 정치 및 법 사상가들을 언급하며, 이 정치적 근대성의 역설과 그 문제를 설명한다.
한번 언급하기도 했던 한나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 역시 이 맥락에서 나타나는데, 한나 아렌트는 근대성의 이러한 정치적 역설을 모든 사람들에게 '권리를 가질 권리'를 존중되어야한다는 요구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권리를 소유하는 개인은 결국은 그 권리를 떠받들고 보호할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현실과 자각에 마주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 의미는 국가의 주권이 그렇게 해석될 경우에는 어떤 특정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애초에 그 국가에 속하는 것이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어떤 이들의 '권리를 가질 권리'에 대한 부정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에 더 심각성을 띠게 된다. 아렌트에게는 독일계 유대인의 시민권 상실, 그에 따른 타 국가로의 망명, 그리고 결국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것들이 실제 사례로서 뒷받침을 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위치에서 아렌트가 생각해낸 개념은 '의식적 왕따 conscious Pariah'이고, 이는 골스타인이 설명한 영구적 반(half) 타자성에 대한 대안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이는 자신의 정체성의 타자성 otherness를 지배 문화에 의식적 반하는 순간들로 오히려 전환해 냄으로써,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그 싸움을 통해서 타인에 의해 부정당한 자기존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 국제법학자인 켈센의 관점으로 넘어가서 이 역설을 해석해보자.
한스 켈센은 아렌트가 국제법과 조약에도 회의적이었던 것에 반해서, 국제법과 국내법은 상호보완적이며, 어떤 법이 더 맞는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주권의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화적으로나 미신같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기관이나 최종 결정자로 인식된 것의 정당성 기반하에 국내법이 수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본규범 Grundnorm이라고 주장한다.
한나 아렌트와 한스 켈센은 근대 주권국가의 인권에 대한 존중과 법의 규칙을 정당성의 팽팽한 구조와 경계 안에 포함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정치철학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칼 슈미츠Carl Schmitt 와 마찬가지로 레오 스트라우스 Leo Strauss는 주권의 정치적 신학에 메여있는 근대 주권국가의 모순성적 구조에 대하여 주장하였다. 그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자연적 힘에 대한 독력으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그들의 인생에 대한 지침이 없이도 '선함 the good'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그의 주장의 독창성은 정치를 다시 신학과의 관계를 다시 도입했다는 것에 있다고 벤하비브 교수는 평가한다.
이런 역설, 모순을 꼬집는 것에서 나아가서 벤하비브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바로 민주적 정당성과 그 난제라는 소제목을 가지고서 오늘날 헌법구성의 민주적 정당성이 보편적 인권 주장과 특정 문화적 국가적 정체성 사이의 긴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즉, 민주국가는 특정 국가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입법을 하게 되고, 그 입법 과정과 명시 자체가 '경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자유주의 Liberalism 와 민주주의 Democarcy 사이의 역설, 이는 인권의 관점에서 민주적 다수인 스스로의 의지를 제한하려는 것과 동시에 민주주의들 내에서의 내적 역설, 즉 민주주의 국가들은 민주적으로 그들의 시민권의 경계에 대하여 직접 범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국제사회 맥락에서 다자간 벤하비브 교수는 이러한 주권국가의 한계와 모순이 1948 세계 인권선언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을 통한 다자적 국제관계 질서가 해결 방안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하며 소장을 마무리 한다.
그다음 소장에서는 이번 2장에서 벤하비브 교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 할 수 있는 사법생식성: 노모스 (법)와 폭력 Jurisgenerativity: Between Nomos and Violence이다. 벤하비브 교수는 이전 소장 마무리에 언급했던 다자적 새로운 국제 질서가 기존 자유민주주의 주권국가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길 중에 하나로 이 사법생식성과 민주적 반복 democratic iteration 을 가지고 온다. 먼저 사법 생식성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는 로버트 코버 Robert Cover 가 처음 만들어낸 개념으로서, 법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법 그 자체가 조절 할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의 맥락 속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해석들' 없이는 '법칙들'은 없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법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과 맥락 속에서 확장되고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의 공적 영역에서의 연계를 장려하고, 곧 다가올 정의에 대한 기대감과 존재하는 권력의 관계에 개입한다. 무엇보다도 법은 정치적인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오히려, 법은 정치를 가능하게 하나, 마찬가지로 이에 의해 수정된다.
벤하비브 교수는 코버의 사법생식성에 대한 개념과 주장이 유대인들, 타자들,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는 자들에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법과 동시에 주권을 훼손시키거나 반역하지 않는 방안을 찾고자 노력했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한편, 민주적 반복은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타자들, 유대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해석적 원리들과 경쟁하는 관점에서 다수의 반복을 통해서 창의적으로 적용하고, 법적인 의미를 변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럼, 벤하비브 교수가 마지막 소장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바로 위에서도 기존에 존재하는 법과 주권을 흔들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활용하고 독창적으로 자신의 타자적 정체성을 오히려 이용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기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확장된 정신성 the Enlarged Mentality 라는 소장 제목으로 제 2장을 마무리한다.
벤하비브 교수는 이방인, 타자, 이민자들을 받아주는 국가들이 이들을 '손님'과 '환대성' 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유럽의 융합적 정체성들의 복합성을 대하는 것에 부적절한다고 지적하며, 다문화 multiculture 역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태도를 심어주기에는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벤하비브 교수는 우리게에 필요한 문화란 타자성을 느끼는 자들도 그럼에도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 내에서 다수성에 대해 인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문화는 우리가 타인의 입장에 서보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거리를 줄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거리 사이를 협상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장려할 수 있다. 이는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존중을 바탕으로 보편적 인류 존엄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다.
마지막에서 벤하비브 교수는 스콧 핏츠게랄드 F. Scott Fitzgerald의 이중적 상상력 double vision이라는 용어가 어쩌면 영구적 반유대인, 의식적 왕따와 같이 비슷한 의미이지만 덜 자기비판적 표현이라 하며, 이러한 입장에 처한 개체들이 어떻게 동질성과 차이성을 통해서 우리의 공유된 인류애의 근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장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