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목적없는 여행은 공허하기만 할 뿐이야

by 유연

이번 여름휴가를 이탈리아에서 보내기로 한 이유는 생각보다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1년에 한 번 쓸 수 있는 장기 휴가에 평소에 가보지 못한 나라, 이왕이면 유럽 쪽으로 가면 좋겠다 싶었다. 그 중 볼거리도 먹거리도 많고, 물가가 한국과 비슷하거나 살짝 저렴하단 점에서 이탈리아가 가장 적당해 보였다. 평소 영화를 보고 감명 깊었다거나, 예술작품에 대한 조예가 깊어 ‘00 작품은 꼭 내 눈으로 봐야 해!’ 같은 그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큰 고민 없이 택한 그 곳, 어쩌면 이유를 찾는 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조토의 성당에서 바라본 피렌체 전경.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서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다.


대학생 시절과 직장인이 된 지금을 비교해보면, 여행에 대한 마음가짐은 확연히 달라졌다. 대학생 땐 돈은 없었지만 설렘은 있었다. 면세점에서 양손 가득 구매하고, 고급 호텔에 숙박하진 못 하더라도 내가 해외에 발을 붙이고 서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직장인이 되고 난 후 나에게 휴가를 정의해보라 한다면, 해방과 동시에 걱정의 연속이라 말하겠다. 휴가를 떠나기 전엔 눈치밥과 인수인계로 골치가 아프고, 휴가를 떠난 후에도 나 때문에 동료가 고생하진 않을지, 혹시나 누락된 인수인계는 없었는지 등 새로운 걱정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생각을 비우러 떠났음에도 생각을 비우는 일은 좀처럼 쉽지가 않다. 여행 그 자체로서의 설렘을 언제 느껴보았던가.


그래서 직장인의 여행엔 더더욱 목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휴가를 얻기도 힘들거니와 그 기간도 촉박하니까 그 순간 만큼은 최대의 행복을 느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계획을 짠다. 여행책도 보고, 블로그도 보고, 주위에 다녀왔다는 지인들의 조언도 들어본다. 하지만 그렇게 어영부영 남들이 추천하는 대로, 블로그가 알려주는 대로 보고 쫓아가는 여행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여행의 끝은 충만함이 아닌 공허함만 남을 뿐이었다. 여러 번의 여행 끝에 이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지에서 지도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때론 지도 없이 헤메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이다. 남들은 모를 나만의 여정 속에서만 얻게 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휴가의 목적은 없었지만, 다음 번을 위해 이번 여행을 되새김질 해보기로 했다. 나만의 여행으로 즐기기 위해서,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여행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서 그 곳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았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맛보았을 때, 골목길에서 우연히 찾은 상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득템 했을 때,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지역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을 때가 줄지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 걸 보니 참 행복했나보다. 그렇다. 나는 계획한 곳에서 찾은 기쁨보다 계획에 없는 환희를 맞이하는 순간이 더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계획보다 무계획이 어울리는 사람. 이미 검증된 길을 따라가는 것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곳을 일단 뚫고 가보는 모험심 많은 사람. 그게 나였다. 현실에선 이런 내 모습을 절대 발견할 수 없었다. 왜냐면 현실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쫄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지에만 나가면 자신감 만땅의 탐험가가 된다. 자꾸만 일단 부딪혀보고 싶어 진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감이 바닥을 칠때면 자꾸만 해외로 나가고 싶어했나 보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했던 게 오히려 나의 자신감을 업시켜주는 기회이었던 셈이다.


저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목적으로 같은 장소를 찾아온다. 당신과 내가 다르듯이, 여행의 이유도 모두 다를 수 밖에.



이번 여행의 끝자락에서 머리를 스치고 간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바로 ‘돌아갈 자리가 있어서 천만 다행이다…’란 생각이었다. 또 다른 여행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고정 일터가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러웠고 든든했달까. 비록 출근하자마자 그 생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단 사실이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허공에 둥둥 떠있는 이상주의자였던 내가 조금씩 현실세계로 발을 내딛고 있는 중인가보다. 이렇게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가는게 뭐 어떤가. 그런게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고 그런 게 인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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