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영화 스토리가 다소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든 대학은 서울로 가겠다고 결심한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소박한 꿈(?)을 이룬 대학생이 되어서도 난 부모님의 품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 난 철 없는 아이였다(그렇다고 지금은 철이들었단 말은 아니다). 19년 동안 항상 내 옆에 있던 익숙한 것들로부터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라는 울타리는 나에게너무 익숙해서 그 자리에 뿌리 박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지금처럼 있을 것만 같았다. 위치를 바꿀 수도 없고 바꾸려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 집 붙박이장처럼.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취업을 했다. 처음 경험한 사회의 민낯은 혹독했다. 매일 저녁 고된 노동 후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부모님 생각을 했다. ‘아빠, 엄마는 이보다 더 힘드셨겠지… 그렇게 번 돈으로 날 키우셨겠구나…’ 자녀가 직장인이 되면 부모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고 하더니 내가 딱 그랬다. 갑자기 집을 떠나 혼자 살아온 몇 년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대학 입학을 위해 상경하던날 내 뒷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셨다는 엄마가 떠올랐다. 멀리서말 없이 뒷짐지고 버스가 떠나는 걸 바라만 보시던 아빠가 떠올랐다. 감정이 북받쳐올라 울컥했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그날 저녁 전주행 버스표를 바로 끊었다.
한껏 격해진 감정 때문이었는지 전주에 내려와서 뵌 부모님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그렇게도 새까맣던 아버지 눈썹에서 익숙지 않은 하얀 눈썹이 보였다. 근육이 빠져 힘없어 보이는 엄마의 얇은 다리가 보였다. 두 분 얼굴에서 늘어난 주름 개수가 내가 떠나온 햇수와 비례하는 것 같았다. 함께하지 못한 그 동안의 시간들이 서글퍼졌다. 젊고 건강하실 때 더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지만 그에 비해 함께 나눈 추억은 한없이적었다.
두 분과의 시간이 어쩌면 많이 남지 않았을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분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였다. 갑작스럽게 두 분을 떠내 보내게 되더라도 조금이나마 덜 후회할 수 있도록. 여행도 다니고 사진도 많이 남겨놓아서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을 많이 만들어 놓겠다고 홀로 다짐했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는 평범한 독일인 노부부 트루디(아내)와 루디(남편)가 주인공이다. 장성한 자녀들이 모두 독립해서 떠나고 시골 집에 남겨진 건 둘 뿐이다. 어느 날 아내 트루디는 남편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는다. 남편과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보내기로 하고 베를린에 사는 아들 집에 방문한다. 자녀들과의 행복한 추억을 남편에게 심어주려 했지만 이미 자신들의 가정도 생활도 있는 자녀들에게 부모님의 방문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결국 두 사람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고, 그 전에 잠시 들른 발트해 바닷가에서 아내 트루디가 남편보다 먼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트루디는 겉보기엔 우스꽝스러운 화장과 몸짓으로 춤을 추는 일본 무용 ‘부토’ 댄서가 되기를 원했다. 결혼 후 그는 아내의 꿈을 모른 척 했다. 그것 말고도 분명 그녀가 남편에겐 내색하지 않은 수 많은 희생이 많았을 것이다. 루디는 뒤늦게 자신 때문에 꿈도 미래도 모두 포기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꿈을 대신 이뤄줄 수 있는 곳으로 떠나기로 한다. 그녀가 생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후지산이 있는 일본으로 말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의 도쿄는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아내를 잃고 방황하는 루디를 더욱 처연해 보이게 만든다. 조금씩 잊혀지는 그녀를 떠올려보려 유흥업소에서 다른 여성의 품에도 안겨보지만 오히려 더 서글퍼질 뿐이다. 그는 아내의 옷을 입고, 아내가 가보고 싶어했을 법한 곳을 다녀본다. 아내가 평소 자주 만들던 요리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점인 후지산에서 아내의 영혼을 느끼며 아름다운 부토를 춘다. 그녀를 기억하기 위한 그만의 마지막 추모식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상실, 죽음이란 단어를 모른 채 살고 싶다. 오늘과 분명 다를 바 없다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내일이 사랑하는 이가 사라질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벌써 저릿해온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일까.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도 가능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싶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갑작스런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과연 난 ‘그래, 그 동안 충분히 준비해왔던 순간이야. 후회는 없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준비해야만 마음 편히 보내드릴수 있게 될까?
사실 아쉬움이 남지 않는 이별 준비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후회가남지 않기 위해 부모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겠다 한 나의 목표는 애초에 전제가 잘못 되었다. 아쉬움도 후회도 어찌 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영화는 그래서 떠난 이가 남겨놓은 것에 주목한다. 어차피 잘 해드리지 못해 후회하고 슬퍼할 거라면 떠난 이가 남긴 추억을 부둥켜안고 슬퍼할 테다. 어차피 잊지 못할 거라면 떠난 이가 남긴 흔적을 옆에 두고 함께 살 것이다. 어차피 미안하게 될 거라면 늦게라도 사랑하는 이가 원했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싶다.
루디는 아내가 남기고 떠난 기모노와 하늘색 스웨터, 긴 월남치마에서 그녀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품은 채 남은 시간은 아내가 되어 살기로 했다.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가 가보길 원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아마도 아내의 환한 미소를 기억해냈을 것이다. 그녀가 추고자 했던 춤을 대신 추면서 아내의 숨결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남겨진것들 속에서 루디는 그렇게 떠난 아내를 느꼈다. 그리곤 더는 아쉬움 없이, 미안함 없이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로 눈을 감았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그 순간이오게 된다면 부모님의 무엇을 품어야 할까. 모르겠다. 그치만 아마도 아빠의 흰머리를 감추어줬던 염색약을 볼 때면, 엄마의 얇은 다리를 감싸주었던 고무줄 바지를 볼때면, 화장대에 놓인 아이크림을 볼 때면 정말 많이 슬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