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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13. 2016

두려움이란 이름의 공포에 대하여

영화 <싱글맨>(2009)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사로잡혀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시는 부모님을 대면하거나 갑작스러운 지인의 부고를 들을 때면 죽음이란 존재가 마치 코 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상상이 만들어낸 공포심은 생각보다 꽤 컸다. 상상 속에선 그 슬픔을 미리 경험해볼 수 있으나, 가끔은 그것이 너무도 현실처럼 느껴져서 힘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다는 상실감,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무서웠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라고 했지만 사실 모든 사람은 혼자가 되는 걸 무서워한다. 이건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인간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있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철저히 혼자로 살아가는 건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옛 속담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지 않나. 아무리 혼자가 익숙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이들의 급작스런 부재는 견디기 힘들다. 영화 <싱글맨(A Single Man)>은 그 고독이 주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줄거리

미국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 조지(콜린 퍼스)에겐 16년간 함께 동거해온 연인 짐(매튜 구드)이 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짐을 떠나보낸 후 그에게 하루하루는 의미 없는 삶의 연속일 뿐이다. 조지가 느끼는 짐의 부재로 인한 슬픔은 마치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며 느끼는 공포감과 비슷하다. 숨이 턱턱 막히고 세상은 한없이 어둡게만 느껴진다. 살아갈 이유를 잃은 그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 죽음뿐이다. 주변을 하나둘씩 정리하고, 죽음을 연습하기도 한다. 그러던 그의 앞에 어느 날 조지를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제자 케니(니콜라스 홀트)가 나타나고, 조지의 심경에 작은 변화가 생겨난다.



고독이란 이름의 두려움

A Single Man. 영화 제목 그대로 조지는 혼자가 되었다. 동성애인 짐을 잃은 그에겐 아무도 없다. 영국을 떠나 홀로 미국에 왔으니 연락을 하는 가족도 없고, 짐의 가족들조차 그를 연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대학교수라 할 지라도 성 소수자인 그는 늘 사회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낸다. 그래서 외롭다. 그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이가 없기에.


성 정체성을 알게 되기 전 한때 잠시 연인 사이었던 찰리(줄리안 무어)가 곁에 있지만 짐의 빈자리는 그녀로 메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지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혼자였던 찰리가 이 영화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두 번의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었지만 모두가 그녀를 떠났다. "사실 난 누구와도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리처드도 날 사랑하진 않았던 것 같아. 내 겉모습 말고 말이야."라고 말하던 찰리의 눈빛이 한없이 공허해 보인다.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누군가를 갈망했고, 그가 행여나 떠나버릴까 전전긍긍했을 찰리가 보인다. 함께였지만 늘 혼자였던 그녀.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누군가를 갈망한다. 외로움을 사람으로 이겨내려 하는 찰리. 악순환의 연속이다. 근원적인 외로움은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자만이 함께일 때 행복할 수 있다.




쓸모 있는 것만 원하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조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학생들을 마주하는 수업시간이 두렵다. 사회에 나가서 쓸 일이 없는 조지의 문학 수업은 학생들에겐 그저 '필요 없는 수업'일뿐이다. 조지는 동료 교수인 그렌에게 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외국어로 수업하는 것 마냥 멍하게 날 쳐다보는 게 보여." 성의 없는 수업 태도와 지루하다는 표정들은 조지를 더욱 외로움의 끝으로 몰아넣는다. 어쩌면 존재의 이유를 부정당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돈이 되는 것들만 높이 평가되는 현실에서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은 종종 무시당하거나 낙오자 취급을 당한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철학과 인문학은 퇴출 대상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엔 생각보다 돈이 되지 않는 일들이 중요할 때가 많다. 감성적인 일이 이성적인 일보다 화폐 수단으로써의 가치가 덜하다고 해서 쓸모없다 말할 수 없다. 타인과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너무도 삭막하지 않은가? 인간다움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건 조지와 같은 감상주의자에겐 그 어떤 것보다 큰 공포일 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감상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하라는 그렌의 말에 조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감상 없는 세상이라면 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문득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에 끝까지 음악을 연주했던 8명의 악사들이 떠오른다. 그들 덕분에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의 공포가 조금은 덜해지진 않았을까.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 이미지로부터 탈피를 원했던 콜린 퍼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 영화로 그는 제66회 베니스영화제에 이어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까지 모두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영화 <싱글맨>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 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처음 <싱글맨> 대본을 받았을 때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 보았을 때, 이 영화가 대사로 진행되는 작품이 아니라 배우가 채워 넣어야 할 빈 공간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콜린 퍼스가 말했듯 이 영화에는 대사가 많지 않다. 응축된 대사와 배우들의 눈빛, 세련된 미장센이 전부이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여전히 흥미로운 영화임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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