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박에서 2
양산박에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얼굴을 대충 외웠고, 일도 나름 적응이 돼서 바쁠 땐 확실히 일하고 여유로울 땐 조금씩 쉴 수 있었다.
양산박의 모든 직원들은 주 6일 일을 하고, 하루를 쉬었다. 아무래도 주로 한국인들이 일하고 현지 취업시장을 뚫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 한국 매장으로 일하러 오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직원들은 오히려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시간이 곧 돈이며, 돈을 벌지 못하면 시드니의 살벌한 집값을 감당하지 못했다. 직원들은 크게 점심시간부터 시작해서 밤까지 일하는 풀타임 근무자와, 저녁시간에 시작해서 밤까지 일하는 파트타임 근무자로 나뉘었다. 물론 나같이 겨우 3시간만 일하는 피크타임 근무자는 제외하고. 결국 직원들은 본인들의 저녁 시간을 일에 써야 하는 것이고, 일주일에 한 번, 저녁을 즐길 수 있는 휴가가 있는 것이다.
하루는 테이블 정리 호출이 와서 정리하러 갔는데, 익숙한 얼굴 두 명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오늘이 휴가인 직원 두 명이었다. 약간은 황당한 표정으로(정확히는 쉬는 날인데 자기가 일하는 가게에 온 동료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쉬는 날인데 여길 와요?"
"네! 여기 정말 맛있는 곳이에요. 하하 우리가 평소에 서빙만 하고 먹어보지를 못해서 그렇지."
"아... 정말요? 저 같으면 쉴 때는 절대 여기 안 올 것 같은데."
"나중에 한 번 와보세요. 그런데 결국 한국 친구랑 놀러 가는데 한식이 먹고 싶으면 여기밖에 생각나는 데가 없어요."
시드니 시내에서는 양산박 정도로 규모와 인지도를 갖춘 한식집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고기를 구워 먹는' 식당으로 한정하면 더욱 그랬다. 직원 할인이 있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매니저가 서비스 음료를 준다던지, 서비스 계란찜을 준다던지 이것저것 조금 더 신경 써 주기도 해서, 쉬는 날이어도 직원들이 종종 저녁을 먹으러 온다고.
열심히 일을 하던 어느 날, 8시 반쯤. 손님들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고, 테이블 정리도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30분만 더 일하면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세팅하기를 몇 번, 홀을 담당하는 형이 나를 불렀다. 그 형은 양산박에서 꽤나 오래 일한 직원이었는데, 첫날 면접을 보러 레스토랑에 방문했을 때, 나를 매니저에게 안내해 준 직원이기도 하다. 키는 180 정도에, 한쪽 다리에 문신을 종아리까지 새겼고, 항상 헝클어진 머리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 장난치는 걸 좋아해서 직원들은 물론이고 손님들에게도 유머러스하게 서빙하는, 뭐랄까.. 레스토랑에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했던 형이었다.
테이블 급하게 정리할 게 있나 보다 싶어서 쟁반과 걸레를 들고 찾아갔는데, 아직 손님들이 잘 식사 중이었다.
중국인 여성 세분이었고, 형은 간단한 중국어로(아마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어쩌다 외운 단어들이지 싶다) 손님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야, 지안아. 이분들한테 '커아이'라고 해봐."
"네? ...아시는 분들이에요?"
"아냐 아냐. 그냥 해봐 '커아이'."
"형, 저 중국어 할 줄 아는데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커아이는 중국어로 귀엽다(Ke`ai,可爱)라는 뜻이다. 아마 장난치면서 나를 당황시키고 손님들을 웃겨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지, 미안해요 형. 그 형은 떨떠름하게 다른 테이블을 서빙하러 갔고, 나는 손님들에게 '저 직원이 나에게 중국어를 말하게 해서 장난을 치려고 했는데, 아마 내가 중국어를 못 하는 줄 알았나 보다.'라고 설명해 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한 번 해줄걸 그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