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박에서 3
양산박에서 일한 지 3주쯤, 시간은 10월을 향해 갔고 날씨는 점점 따뜻해졌다. 양산박에도 한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직원들의 포지션을 살짝 개편하면서 피크타임 근무자들이 불필요해졌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고기를 굽는 직원과 테이블을 정리하고 세팅하는 직원이 음식을 서빙하는 것을 나눠서 가져가게 되었다. 동시에 레스토랑에 캐셔가 일을 그만두면서, 내가 캐셔직으로 포지션이 바뀌게 되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콜롬비아 친구는 테이블 정리를 그대로 하면서 음식 서빙도 진행하게 되었다.
포지션이 바뀌면서 가장 큰 변화는 근무 시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피크타임 근무자들이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면서 모두 파트타임 근무자로 전환되었다.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원래 3시간이었던 근무시간이 6시간으로 늘었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양산박에서 캐셔는 계산 외에도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와인을 준비하고, 식수를 채우고, 각종 소스를 리필하고, 부족한 밥과 밑반찬을 준비하고, 컵, 잔 등의 작은 용기들의 설거지를 했다. 식당에서는 이 포지션을 바(Bar)라고 불렀다. 아마 와인을 준비하는 것 때문이겠지. 바에는 단 한 사람만 근무했다. 그 말은 즉 근무 중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고, 사수 역시 없어서 이전에 바를 해 본 직원에게 하루 동안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3시간 근무에서는 가게가 열심히 돌아가는 도중 들어와 여전히 바쁠 때 퇴근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지만, 6시간 근무로 바뀌면서 식당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녁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밑반찬과 공깃밥을 세팅하고 청소하는 것, 10시 반쯤부터 시작되는 마감 준비와 청소 같은 것들이었다. 바 포지션은 식당이 한창 바쁠 때는 한가한 편이었다. 준비되어있는 일들을 시간에 맞게 하면 되었고, 기껏해야 물을 열심히 채워 넣고 설거지를 조금씩 하는 것들이 주 업무였다. 오히려 오픈 준비와 마감 준비가 많이 바빴다. 잡다한 일들을 하려면 잡다한 준비가 필요하다. 잡다한 일을 수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잡다한 일을 준비하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하나 제대로 확인하고 준비해 놓지 않으면 정작 일을 할 때 한두 가지가 꼬이게 되고, 이는 더욱 바빠진다는 걸 의미한다.
하루 만에 어떻게 그 많은 업무들을 다 외우랴, 결국 몇 번의 실수가 있었다. 하루는 주방 설거지 공간이 바빠서 잠깐 씻어야 할 김치통을 싱크대 옆에 놔두고 다른 일을 먼저 했다(그렇다, 나는 김치통을 비우고 씻는 일도 했다). 그러다가 주방 쪽 마감이 다 끝나버렸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다른 준비를 계속하였다. 결국 양산박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직원 중 한 명인 HJ형이 김치통을 나 대신 설거지하고 설거지 싱크대까지 모두 청소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다른 직원에게 들었다. 또 하루는 주방에서 준비해 준 양상추, 양파절임, 고추 등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용기를 착각해서 잘못 넣었다. 결국 11시에 퇴근하지 못하고 용기들을 다시 씻고, 채소들을 맞는 용기에 다시 넣어 정리했다. 이때도 HJ형이 도와주었다.
HJ형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양산박에서 가장 오래 일 한 직원인 것 같았다. 일을 시작하고 첫 하루이틀은 그를 보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잠깐 휴가를 썼다고. 그는 밝은 갈색머리를 했고, 옆머리가 긴 머리스타일을 유지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지만 몸이 다부저 보였다. 얼굴에서 특히 코가 날카로워 보였는데, 이는 그가 가진 딱딱한 인상을 조금 더 강조시켰다. 형은 유머러스하기보다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웠지만, 새로 들어온 직원인 내가 실수하더라도 다그치지 않고 부드럽게 알려주고 함께 도와준 사람이었다. 덕분에 긴장하지 않고 일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참 고마웠던 사람이다.
양산박은 계산을 할 때, 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손님이 직접 카운터로 와야 했다. 그런 손님들을 맞고 계산을 도와주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참 여러 종류의 손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대부분은 술에 살짝 취해서 기분이 좋은 상태로 계산을 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미니멈(카드로 계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격)이었다. 양산박의 미니멈은 (내가 기억하기로는)50불이었는데, 일반적인 식당을 생각했을 때는 꽤 높은 편이었다. 고기 1인분이 약 15~16불 정도였으니, 혼자이거나 둘인 손님들은 50불을 넘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몇몇 손님은 개의치 않고 현금을 꺼내 주었지만, 컴플레인을 거는 손님들도 있었다. 미안해요, 어쩌겠어요 저는 그저 알바생일 뿐이고 회사 방침이 그렇다는 걸. 매니저가 직접 와서 컴플레인을 해결한 적도 있었다.
계산에서 또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페이패스(NFC를 이용해서 카드를 기기에 대기만 해도 결재가 되는 시스템, 삼성 페이와 비슷하다)를 가능하면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내가 바 포지션을 시작한 첫날 나를 교육한 직원이 알려준 것이었다. 페이패스를 쓰면 수수료가 더 나가는 걸까? 어차피 같은 카드인데. 그래도 사용하지 말라고 하니 굳이 손님들에게 페이패스를 권하지는 않았다. 사실 호주의 대부분의 신용/체크카드는 페이패스 기능을 지원하기 때문에 계산을 할 때 손님들은 카드를 기기에 대려고 하는 준비를 한다. 나는 굳이 그 카드를 받아서(정확히는 약간 힘을 줘서 카드를 뺏어와서) 포스에 연결된 결제기기에 꽂아 넣었다. 짜증 나는 건, 카드 마그네틱 부분과 IC칩 부분을 많이 안 써서 그런지 에러가 엄청나게 많이 뜬다는 것. 그렇게 되면 양해를 구하고 페이패스로 다시 결재를 시도해야 했다.
나중에 양산박을 그만두게 돼서 새로 온 바 직원을 교육하고 있었는데, 다른 직원에 와서 말해주길 그냥 페이패스 사용해도 된다고. 세상에 내 스트레스는 무얼 위한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