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CQ에서 2
배스킨라빈스가 유명한 체인이긴 하지만 결국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일 뿐이다. 손님들한테 주문받고! 아이스크림 주고! 돈 받고! 거스름돈 주고! 일은 하나도 어렵지 않겠지? 싶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일을 시작한 첫날, 시프트는 아침 11시부터 오후 5시 까지였다. 매장에 도착하자 세 명의 직원이 나를 맞아주었다. 매니저인 Agnes와 직원인 Melody 그리고 Mandy였다. 영어 이름을 쓰긴 했지만 모두 한국인이었다. 세 명 모두 여자였는데, 매니저님이 말하길 애초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중에 남자가 거의 없다고 했다. 오늘부터 일하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 밖에 없었다.
매니저님은 서빙을 하기보다는 (물론 바쁠 때는 서빙도 돕지만) 그 외에 이것저것 잡다한 일이 많아 보였다. 내 사수는 Melody였는데, 다른 아르바이트생보다는 조금 더 오래 일한 편이었고, 곧 알바를 그만 둘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녀는 (내 기억으로는) 단발에 곱슬머리를 했었고 키는 작은 편이었다. 나는 처음에 당연히 가격을 외우고 아이스크림을 퍼내는 일을 연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가 가장 먼저 시킨 일은 아이스크림의 성분을 외우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배스킨 라빈스까지 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스크림을 많이 즐기고, 배스킨 라빈스의 아이스크림 맛들도 줄줄이 꿰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아르바이트생이 굳이 성분이나 내용물은 외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들었는데, 호주의 배스킨라빈스는 달랐다. 아이스크림이 어떤 걸 베이스로 어떤 게 추가되어있는지, 카페인이 들어가 있는지, 견과류는 없는지, 할랄(Halal,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코셔(Kosher, 유대인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까지도 파악해야 했다. 과연 다문화 국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분을 외우는 것은 예를 들면, '자모카 아몬드 퍼지' 맛은 커피 향이지만 카페인이 들어있지는 않았고, 아몬드 견과류가 있으니 알레르기를 주의해야 하고, '프랄린스 앤 크림' 맛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베이스에 카라멜 시럽이 들어있고, 설탕에 졸인 견과류가 들어있으니 역시 알레르기를 주의해야 하고, '시트러스 트위스트'는 '소베(Sorbet)' 아이스크림으로 락토스-프리(Lactose-free, 젖당이 없는, 즉 우유로 만들지 않은) 아이스크림이며, 비슷한 이름의 '레인보우 셔벗'은 우유가 첨가된 '셔벗(Sherbet)' 아이스크림으로 젖당 소화불량이 있거나, 채식주의자들에게 실수로 서빙하면 안 된다, 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죄다 외워야 했다. 세상에 일을 그만둔 게 언제인데 아직도 이걸 기억하고 있다니! 아이스크림 맛의 종류는 진열되어 있는 31개에, 바로 진열되지는 않지만 유명한 맛이 10가지 정도 더 있었고, 매달마다 그 달의 맛이 1가지 추가되어 꽤 많았다. 나는 그 성분을 모두 외워야 했다.
처음에는 외워야 하는 압도적인 양에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그날 손님이 적어 시간을 두고 조금씩 외울 수 있었다. 비슷한 성분과 맛인데 베이스만 다른 아이스크림이나, 소베-셔벗처럼 용어 혼동이 올 수 있는 것들, 가장 보편적인 견과류와 글루텐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는 맛들을 중점적으로 외웠고, 퇴근 전에 매니저님께 검사를 받았다.
맛을 외우면서 중간중간 아이스크림을 퍼내는 연습도 조금씩 했다. 아이스크림은 어떤 것은 부드럽게 뭉쳐졌지만, 어떤 것은 너무 쉽게 녹아 꾸덕꾸덕한 탓에 쉽게 퍼내기 힘들었고(면접 날 내가 선택한 '월드 클래스 초콜릿' 맛이 딱 그랬다), 어떤 것은 쉽게 얼어서 너무 딱딱해서 퍼내기 힘들었다.
가장 보편적이고 많이 판매되는 아이스크림은 한 스쿱(한국의 싱글 레귤러 사이즈)이며 정량은 114g이었다. 매장 포스기 옆에 조그만 전자저울이 있었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이것저것 퍼보면서 114g이 어느 정도인지 익혀야 했다. 이 작업은 Mandy가 주로 도와주었다. 그녀는 키가 나보다 약간 작고 긴 생머리를 한 여자 스탭이었는데, 몇 번 대화를 나눠보니 조금 내성적이고 조용조용한 성격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정량에 맞게 퍼주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바쁠 때마다 저울에 달아볼 수가 없으니 스탭들은 모두 정량을 감으로 익혀야 했다. 스쿱 중량을 계속 재면서 감을 익히고 있었는데, 매니저 님이 한가한 시간에 잠깐 곁에 오더니 한 스쿱을 퍼서 저울에 달아보았다. 결과는 정확히 115g이었다. 놀라워라.
매니저인 Agnes는 굉장히 자존감 높고 외향적이며 장난도 잘 치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에 남편과 함께 호주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BRCQ에서 비자 지원을 받으며 영주권을 따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빈말로라도 권위적인 사람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스탭들과 빨리 친해지고 장난치며 일을 잘 가르쳐 주고 새로운 스탭들이 빨리 매장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뒤에는 나도 매니저님과 금방 친해져 함께 장난치며 즐겁게 웃으며 일을 다녔다. 비단 BRCQ에서 뿐만 아니라 호주 생활을 통틀어 생각해 봐도 손에 꼽힐 정도로 고맙기도 하고 친밀감을 느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