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박에서 4
양산박에서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여 쯤 되었을 때, 나는 이미 내 몸이 꽤나 망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주 72시간이라는 많은 노동시간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양산박의 노동 강도가 생각 이상으로 강했던 탓도 있었다. BRCQ에서의 일은 아이스크림 성분을 외우고 각종 디저트 레시피를 외우면 더 이상 어려울 일이 크게 없었다. 손님을 맞고 필요한 아이스크림을 서빙하고 돈 받고 보내는 것이 결국 내가 BRCQ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이었지만, 양산박에서는 단순히 계산을 하는 일 외에도 각종 잡일들이 많아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나는 하루 동안 집을 나서면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앉아 있는 시간이 없었고, 살도 계속해서 빠지고 있었다.
BRCQ에서 일한 지 한 달쯤 되던 날, 사장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 제안을 하나 주셨다. 지금 BRCQ에서 거의 주 6일 고정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나와 매니저님 그리고 Hannah라는 직원이었는데, 매니저님은 미들 타임인 12시~오후 6시 정도에 주로 일했고, 나는 오픈 조라서 10시부터 오후 4시, Hannah라는 직원은 오후 5시 ~ 마감까지 일을 주로 한다고 했다. 문제는 Hannah가 어번(Auburn)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장에서 가장 가까운 서큘러 키(Circular Quay) 역부터 어번 역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40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는데, 마감을 마치고 퇴근을 하면 지하철 막차시간이 항상 아슬아슬했다. 사장님은 그나마 가까운 곳에 사는 내가 마감 조에 들어가고, Hannah를 오픈 조에 넣어 혹시 지하철을 놓쳐 집에 못 가게 되는 불상사를 막고 싶어 하셨다. 또한 내가 13불로 하루 6시간만 일을 하게 된다면, 그만큼 생활비가 부족해 지므로, 내 시급을 약간 올리고, 시간을 주 54시간 가까이 배정해서 양산박에서 버는 수입을 어느 정도는 메꿔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3주째 이어지는 주 72시간 노동은 몸도 마음도 힘들었고, 수직적이고 경직된 양산박의 직원 문화보다는, 그냥 내 할 일 편하게 하면 별다른 터치가 없는 BRCQ가 더 일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또 BRCQ에서 일하면서 만난 직원들도 훨씬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BRCQ는 일을 하며 영어를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나는 결국 양산박에 사직 의사를 밝혔고, 두 명의 바 포지션 지원자에게 하루 간격으로 인수인계 작업에 들어갔다. 매니저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한 뒤, 일을 하며 중간중간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말해주었다. 모두들 꽤나 아쉬워했던걸 보면 그래도 내가 일을 하면서 어디 모나게 행동하지는 않았나 보다.
인수인계를 받으러 온 새 직원들은 두 명 모두 여성이었다. 첫 번째 분(아쉽게도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니 A 씨라고 하자)은 키가 나와 비슷하게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분이었다. 손님을 대할 때 영어도 적당히 했고, 무엇보다 기억력이 매우 좋으셨던 것 같다. 바 포지션은 이것저것 잡일을 기억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들을 하기 위해 각종 도구, 식재료의 위치는 물론이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까지 얼굴과 역할까지 빠르게 익혀야 했는데, A 씨는 내 상상 이상으로 일에 빠르게 적응했다. 일머리가 좋다는 건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두 번째 분(역시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으니 B 씨라고 하자)은 평범한 분이었다. 마찬가지로 여성 분이셨고, 보통 키에, 어깨에 조금 닿지 않는 곱슬머리를 하신 분이었다. 영어는 조금 버벅대는 부분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필요한 부분에서 몇 가지 단어만 알려주면 금방 익혔고, 잡다한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하루 만에 외우지는 못했으나 하루만 더 일해본다면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을 거라 판단되었다(사실 이게 정상이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매니저가 따로 불러 두 지원자가 어떠냐 물었는데, A 씨는 바로 일에 투입되어도 문제없을 것 같고, B 씨는 하루만 더 배우면서 일하면 문제없을 것이라 대답해주었다. 매니저는 혹시 B 씨가 걱정되면 내가 하루 더 같이 일하며 가르쳐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거절했다. 이미 마음이 뜬 곳에서 질질 끄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무엇보다 에이스인 HJ형이 옆에서 친절히 도와주고 알려주니 굳이 내가 필요할 일 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인수인계가 모두 끝나고, 양산박의 마감마저도 끝나고 나는 직원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했다. 보통 워킹홀리데이로 알바를 구하는 사람들은 한 직장에서 3~4개월 이상 일하는 경우가 적다. 대부분 캐시 잡이라서 퇴직금이나 세금같이 머리 아픈 일 없이 바로 그만두고, 새로운 더 좋은 조건의 일을 찾으러 다닐 수 있기 때문인데, 독특하게도 양산박에서 3개월가량 일 한 나는 아직도 직원들 중에 막내급이었다. 다들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일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처음에는 워낙 실수도 많았고, 일머리가 없어서 작은 타툼도 몇 번 있었지만, 다른 직원들의 따뜻한 배려로 그래도 어느 정도 일을 해 나갈 수 있었다. 다들 아쉬워하며 배웅해 주는 걸 보니, 그래도 내가 마냥 건성건성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열심히 일 해 왔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울컥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안녕, 양산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