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CQ에서 16
2019년 2월 어느 날, 사장님이 곧 떠나갈 Agnes 매니저님을 대신할 새 매니저를 구했다고 했다. 이름은 Hailey, 여자였고, 호주에서 꽤 오래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밤에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했고, 낮에 BRCQ에서 매니저로 일 하고 싶어 했다.
모든 사회가 그렇고, 집단이 그렇듯, 이미 굳어진 체제에 새로운 사람이, 그것도 새로운 상사가 들어와서 적응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Hailey는 과거 몇 년 전에 Agnes와 이미 함께 BRCQ에서 일해본 적이 있는 직원이었다. 그래서인지 Agnes매니저님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있던 시점인 2월달에는 생각보다 가게일에 잘 적응하는 듯 했다. 문제는 Agnes매니저님이 가게를 떠나간 후에, 기존의 직원들(Hailey가 일했던 시기는 한참 전이라, 2019년 2월 당시 가게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 중에는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과 약간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해와 오스트레일리아 데이(Australia day, 호주의 건국 기념일로, 가장 큰 국경일 중 하나이다) 때 엄청난 강도로 노동을 했는데, 사장님이 그에 대해 어떠한 적절한 대가도 없었기 때문에, 이미 가게 운영방식에 학을 떼기 시작한 시점이라서 가게가 어떻게 돌아가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내게 주어진 일만 잘 마무리 하자는 마인드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 온 Hailey에게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됐든, '손님을 맡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이런 큰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운영방식을 제시해 줄 인물도 아니었거니와, 매니저라고 해봐야 그냥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더 늘어나는 것뿐이었다. 아 물론 그녀가 일하는 방식에 짜증 나는 일들이 몇 가지 있기는 했는데(대표적으로, 손님들이 늘어나고 바빠지면 갑자기 서빙을 멈추고 쓸데없는 매장 내부 정리를 시작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다른 직원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불평 몇 마디 하는 게 다였고, 그녀와 직접적으로 부딪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녀를 영 좋게 보지 않았다. 새로운 상사가 으레 그렇듯 그녀는 기존에 오래 일했던 직원들과 암묵적인 서열정리에 들어가려고 하는 듯했다. 특히 Jin과 자주 부딪히는 편이었는데, 나는 딱히 그녀의 방식에 직접적으로 태클을 걸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Hannah 누나 역시 4월 즈음에 비자가 만료되어 어차피 일을 곧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크게 일을 벌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Jin은 BRCQ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 했어서 그런지 특히 그녀와 갈등이 잦았다. 여담으로 Jin 역시 그 성격 때문에 매장 내에 그를 영 좋게 보지 않는 직원들이 많았는데, 그 직원들은 갑자기 나타난 Hailey 편에 선 것도 아니었다. 그냥 둘의 기싸움을 지켜보면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었달까(나도 그랬다).
결국 Hailey는 두 달을 못 넘기고 BRCQ를 떠났다. 사장님 설명으로는 우리 가게를 메인 잡으로 하지 않고, 서브로 진행하면서 매니저를 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긴 했는데, 뭐, 기존 직원들의 텃세도 아마 꽤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Hailey가 떠나가고, 우리는 두 달 정도 매니저 없이 그냥 매장을 운영했다. 직접적인 돈 결제나, 현지 업체와 미팅이 필요한 일들은 사장님이 맡아서 했고, 손님을 맞고 서빙하는 것과 아이스크림 재고관리를 나와 Jin 그리고 Katie누나가 소폭 맡아서 진행했다. 운영에 큰 무리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4월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매장 운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형태로 일하고 있었던 데다가, (사장님께 미안한 말이지만) 그다지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던 상태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2019년 3-4월에 새로 들어온 직원들 이름이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새 직원으로 C 씨가 들어왔다. C 씨는 여성 분이었고, 호주에서 오래 산 것은 아니었지만, 호주 영주권을 따기 위한 단계를 밟아 나가는 중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C는 처음에는 단순히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사장님과 비자 서포트에 대해 따로 딜을 했는지, 매니저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둘씩 맡아서 천천히 진행했다. 사장님도 Hailey때의 직원들의 텃세를 기억하고, 그녀가 매니저로 일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암묵적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중요한 일들을 하나둘씩 시키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 달 정도 지나자, 직원들이 큰 불만 없이 C를 매니저로 인정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2019년 5월 말이 되었는데, 돌연 C가 매장을 그만두겠다고 나에게 슬쩍 말해주었다. 놀라서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사장님과 비자 서포트 그리고 임금에 대해 협상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다. 결국 그녀는 6월 초에 매장을 떠났다. 매니저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 걸까.
나는 2019년 6월 19일에 BRCQ를 그만두었다. 비자 만료까지는 여전히 두 달 정도 남았지만, 6월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직원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는 탓에, 굳이 시드니에서 두 달 더 있을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일찍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일을 그만두기 며칠 전, 사장님이 또 새로운 매니저를 구해왔다고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남성분이었는데, 6월 말부터 일하기로 해서, 나는 잠깐 면접 보러 왔을 때의 얼굴만 보았고, 통성명도 하지 못했다. 날렵해 보이면서도 미소가 얼굴에 묻어있는 분이었다. 과연 얼마나 오래 매니저로 일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