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일상 6
플랫메이트(Flatmate)에서 내가 찾던 아파트가 사라져 버리고, 나는 허탈함에 다른 집을 찾을 생각도 못한 채 한 시간 정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플랫메이트 어플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가 메시지를 보낸 바로 그 아파트 오너였다! 다행이다. 아마 어플의 오류였다 보다. 받은 메시지의 내용은, 나를 아주 환영한다는 것이었으며, 집을 보러 올 약속을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깊은 안도와 함께 약속을 잡았다.
집을 보러 가기로 한 당일, 오너에게 메시지가 왔다. 저녁 7시 약속이었는데, 마침 그 집을 보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도 있어서, 함께 집을 보아도 괜찮겠냐는 내용이었다. 문제 될 것 없지! 흔쾌히 승낙하고, 시간에 맞춰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로비 앞에서 나와 함께 집을 보기로 한 사람과 만났고, 우리는 함께 집을 보러 들어갔다. 놀라운 점은, 나와 함께 집을 본 남자도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드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고, 이름은 John이라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5살쯤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파트는 플랫메이트에 올라온 사진과 완전히 똑같았고, 똑같이 좋았다. 내가 들어갈 방에는 다른 커플이 살고 있었는데, 나의 입주일 전에 이사를 갈 예정이라고 했다. John도 집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아파트의 오너는, 나와 John이 모두 집을 마음에 들어 하자, 함께 룸메이트로 지내도 괜찮겠냐고, 혹시 서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니, 잠깐 거실을 비워주겠다고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룸메이트가 될 사람과 너무 안 맞으면 한 방에서 살기 힘들 수 있으니,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서먹하게 대화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지안이라고 해요. 혹시 성함이..?"
"아, 안녕하세요. 저는 John이에요."
"제가 원래 레드펀(Redfern) 근처에 살았다가, 좀 시내 쪽으로 옮기고 싶어서 찾아보았는데, 마침 이 아파트가 좋아 보여서 오게 됐어요."
"아~ 레드펀 위험하지 않으세요? 거기 범죄자들도 많다고 하던데"
"저는 사는데 크게 불편한 건 없었는데,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만 많이 만난 것 같아요. 하하하"
"오 그렇구나."
"John은 혹시 룸메이트로서 싫어하거나 하는 것 있어요?"
"아뇨, 저는 좀 무딘 편이라,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요. 지안.. 님은요?"
해외에서 만난 한국인이라 그런지 호칭을 좀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냥 지안이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하하하 여기는 호주잖아요!"
"아, 하하. 네 그러면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부를게요."
"저는... 저도 룸메이트를 크게 가리지는 않는데 한 가지, 시끄럽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끄러운 거면 어떤...?"
"왜, 친구들 불러서 파티한다던가,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생활한다던가, 술 마시고 큰 소리로 통화한다던가 그런 거 있잖아요."
"아! 저는 그러지는 않아요."
"그러면 우리 문제는 없네요?"
"네, 저도 좋아요. 지안도 좋으신 분 같고, 앞으로 같이 잘 살아봐요."
"아 그런데, 혹시 John은 여기 어떻게 찾았어요?"
"플랫메이트에서 봤어요. 제가 사실, 제가 친한 형이랑 같이 생활을 하려고 해서, 두 명이 들어가고 싶다고 오너에 말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그 형이 본드(Bond, 보증금)가 준비가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저만 오게 됐어요. 오너도 급하게 다른 룸메이트를 찾은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보낸 메시지가 잠깐동안 사라졌구나!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내가 오너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직전에, John이 오너에게 두 명이 함께 룸메이트로 들어가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오너는 John의 메시지를 보고, (룸메이트는 두 명만 필요했었기 때문에) 피드에서 글을 내렸다. 와중에 글이 내려간 것이 내 어플 상에서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나는 그 상태에서 메시지를 오너에게 보냈다. 어플이 허술한 것이었는지, 내 메시지도 운 좋게 오너에게 전달되어 버렸다. 이후, John의 지인이 입주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John이 그것을 오너에게 알렸다. 이에 오너는 내 메시지를 보고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일련의 과정으로, 운이 좋게도 나는 마음에 드는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John과 이야기를 마치고 얼마 뒤 오너가 안방에서 나왔다. 우리가 함께 생활하는 것에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우리에게 계약서를 나누어 주었다. 계약서라니! 생각보다 더 본격적인데? 우리는 월세와 본드, 퇴거 일자 등을 확인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다.
오너 부부는, 남편은 프랑스인이었고, 아내는 베트남인이었다. 나와 John은 집에 문제가 있거나 문의가 있을 경우, 주로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 모두 우리에게 친절했으며, 거실의 테이블/TV나 주방을 부담 없이 마음껏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 참고로 주방은 조리대는 벽 쪽에, 싱크대는 아일랜드 형식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요리를 쾌적하게 잘 해먹을 수 있게 깔끔하고 시설이 좋았다. 이 집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이사 전날. 레드펀의 집에서 짐을 정리했다. 다 모으니 캐리어 두 개에 이것저것 넣은 종이백 몇 개 분량이 되었고, 캐리어는 각각 30kg, 20kg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이전 집인 레드펀(Redfern)의 빌라에서 새로 찾은 해이마켓(Haymarket) 아파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지는 않았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였고, 걸어서는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짐이 겨우 캐리어 두 개다 보니, 따로 차를 빌리거나 이사 서비스를 사용하기보다는, 조금 힘들어도 직접 들고 이동하는 게 나아 보였다.
이사 당일, 구름 한 점 없는 무더운 날씨였다. 그날은 일부러 시프트를 비웠고, 이사에 시간을 쓰기로 하였다. 나는 먼저 20kg 캐리어와 종이백 다수를 들고 집을 나섰다. 중간에 종이백 한 개에서 손잡이가 빠져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문제없이 해이마켓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레드펀 집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30kg 캐리어만 단독으로 들고 집을 나섰다.
종이백의 손잡이가 빠진 것이 전조였을까. 캐리어를 끌고 가다가 바퀴가 잘 굴러가지 않는 느낌이 들어, 캐리어를 눕히고 바퀴 쪽을 살펴보았는데, 핸들(캐리어를 쉽게 끌 수 있게 뽑아서 쓰는 손잡이) 쪽의 바퀴 하나가 축이 완전히 망가져있었다. 캐리어 크기에 비해 너무 무거웠던 데다가, 보도블록에서 끌고 오다 보니 노면이 울퉁불퉁해서 바퀴에 무리가 많이 간 것 같았다. 처음 레드펀 집에서 출발할 때는 조금씩 바퀴가 멈칫거리더니, 프린스 알프레드 공원 옆을 지날 때는 아예 바퀴가 멈춰 버렸고(이때부터는 캐리어를 거의 땅바닥에 대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필 핸들 쪽 바퀴가 고장이 나서, 핸들 반대 방향으로는 제대로 끌고 가기도 힘들었다), 센트럴 역 근처에 도착할 때쯤에는 캐리어의 바깥쪽 하드커버가 바퀴 부분부터 찢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캐리어를 거의 두 손으로 들다시피 하여 옮기고 있었다. 들고 2~3분 이동하고 잠깐 쉬고, 다시 들고 2~3분 이동하고 잠깐 쉬고 하는 식이었다. 30kg의 무게는 내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 와중에 거리가 가까운 편이라 우버는 죽어도 부르기 싫었다(차를 타면 정말 2~3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이미 끌고 온 거리가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내가 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레드펀 집에서 출발해 끙끙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가기를 50분 여, 드디어 아파트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옷이 다 땀으로 절여져 있었고, 숨이 차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헉헉대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집에 도착해 방에 대충 캐리어를 팽개쳐 두고 바로 샤워를 했다. 땀을 모두 씻어내고 밖으로 나와서 집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깔끔한 인테리어, 좋은 시설의 주방, 푹신한 침대와 개인 책상, 창 밖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 다시 보아도 좋은 집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오면서 고생한 것을 잊어버릴 만큼. 이제 여기서 사는구나, 새삼 다시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