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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가줄래?

시드니 일상 5

by 지안

"Jian. 우리 이야기가 좀 필요해."


2019년 2월의 어느 날, 마스터*가 집에서 쉬고 있는 나를 불렀다.

*집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다.


"응, 무슨 일인데."

"Jian. 혹시 이 집에서 언제까지 머무를 예정이야?"

"안 그래도 이사를 생각하고는 있었어. 구체적인 날짜는 따로 정하지 않았는데, 왜?"

"그게..."


마스터는 말 끝을 잠깐 흐리더니, 집이 처한 사정을 말해 주었다. 요는, 집 전체를 렌트해주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 룸메이트는 베트남에서 온 학생이었는데, 이 친구가 친구를 세 명 더 데리고 오고 싶어 했으며, 지금 집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집 전체를 계약하고 싶다고 하였다.


내가 레드펀(Redfern)에서 사는 집은 마스터와 오너*가 다른 사람이었다. 마스터는 오너에게 2주에 한 번 집세를 내며 집 전체를 빌렸고, 높은 집세를 감당하기 위해 함께 집을 쉐어 할 사람을 따로 구한 것이었다. 나는 마스터에게 집세를 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이중 계약인 셈인데, 시드니의 집값이 워낙 높았던 지라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런 식으로 계약하여 방을 쉐어 하는 것이 꽤 흔했다.

*집의 실제 주인이다.


베트남 룸메이트는 현재 마스터를 대신하여 집의 마스터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었고, 그 말은 즉 현재 세를 들어 살고 있는 다른 세입자들은 모두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맞아, 심지어 나도 나가야 해. 오너가 이미 그 베트남 친구랑 계약을 하기로 했대."


멀쩡히 살고 있는 집에서 나가라니?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화가 나고 답답했겠지만, 그때 나는 왜인지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곧 다른 집을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반면해 마스터는 나에게 정말 정말 미안해했다.


"Jian, 정말 정말 미안해. 혹시 다른 집을 찾거나 할 때 내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해. 너는 정말 깨끗하고 조용하고, 보기 드물게 좋은 룸메이트였는데. 이렇게 떠나가게 해서 정말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아니 뭐, 괜찮아, 어차피 곧 이사 가려고 했으니까. 일정이 좀 앞당겨졌다고 생각할게. 너는 어디로 갈 예정이야?"

"나는 사실 시드니를 떠날 예정이야."

"오? 다른 도시로 갈 거야?"

"타즈매니아(Tasmania)로 갈 거야."


타즈매니아는 호주 대륙 동남쪽에 위치한 큰 섬이다. 그런데 인구는 매우 적어서, 한적할 시골 같은 곳으로 알고 있고,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호주에 일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많이 가지 않는 곳으로 알고 있다.


"타즈매니아? 멀리 가네, 왜 하필 거기야? 멜버른이나, 브리즈번이나 다른 도시도 많은데"

"아, 나는 호주에서 영주권을 따려고 하고 있어서, 타즈매니아로 가는 게 영주권 취득에 유리해서 가는 거야."

"아, 그렇구나."

"지안, 너는 어디로 이사 갈 거야?"

"나는.. 아직 잘 모르겠네. 챗스우드(Chatswood)? 치펜데일(Chippendale)? 좀 안전하고 사람 많은 곳으로 가고 싶어."

"치펜데일이 좋다더라.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 조용하고. 혹시 다른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그는 나에게 위로의 의미로 맥주를 한 병 쥐어 주었다.




레드펀에서 걸어서 출근하다 보면 프린스 알프레드 공원(Prince Alfred Park) 옆을 지나가게 되는데, 공원 입구 쪽에 광고 현수막들이 한두 개씩 걸려있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이사 요청을 받고 얼마 뒤, 나는 그곳에서 '플랫메이트(Flatmate)'라는 집 구하는 플랫폼 광고를 볼 수 있었다. 집을 구하거나, 함께 쉐어 할 룸메이트를 구할 수 있는 어플였는데, 새로 생긴 듯했다.


프린스 알프레드 공원(Prince Alfred Park) ©Jian


어차피 집도 구해야 하겠다, 플랫메이트에 들어가서 이곳저곳 뒤져보았다. 기왕 이사하기로 한 것 월세를 조금 더 지불하더라도 시내에 더 가깝고 시설이 괜찮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었다. 레드펀의 집도 시설이 안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빌라였는 데다가 거실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프라이버시가 조금 없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찾아본 결과, 헤이마켓(Haymarket)에서 근사한 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아파트는 방 2개, 거실, 화장실 2개로 구성되었는데, 아파트 전체를 빌리는 것은 아니었고 오너 부부가 함께 살 룸메이트를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오너 부부는 안방에서, 룸메이트 두 명은 다른 방에서 생활하고, 네 명이 거실을 함께 쓰는 형태). 인테리어도 깔끔했고, 위치도 센트럴(Central) 역 바로 앞인 데다가, 근처에 울월스(Woolworth, 대형마트)도 하나 있어서 살기에는 정말 좋아 보였다.


센트럴(Central) 역. 큰 시계탑이 인상적이다. ©Jian

문제는, 집세가 비싸다는 것이다. 한 주에 270달러, 집세는 2주에 한 번 내야 했으므로 2주에 540달러가 필요했다. 당시 나는 BRCQ에서만 일하고 있었고, BRCQ의 월급만으로는 약간 힘든 가격이긴 했다. 물론 그동안 모아 둔 여윳돈이 있었기 때문에 감당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 보니 한 달에 몇십 불 정도씩 지출이 더 많은 상황이었다.


나는 하루 정도 기간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플랫메이트에서 다른 집들도 찾아보았고, 검트리(Gumtree)*에서도 집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만한 집을 찾기 힘들었다. 월세가 비싸긴 하지만 내 수입에 비해 비싼 것이지, 시세를 고려하면 합리적인 금액이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이 아파트로 마음이 기울어서, 오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략적인 내 상황을 설명하고, 입주가능한 날짜를 알려주었다.

*호주 최대의 매매/구인구직 사이트이다.


하루 뒤, 메시지에 답신이 없자 플랫메이트에 다시 접속해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드에서 내가 찾은 아파트를 찾을 수 없었다. 보낸 메시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심지어 메시지를 보낸 오너의 계정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마음에 들었던 아파트가 갑자기 증발해 버리다니. 캥거루가 곡을 할 노릇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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