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첫인상 3
가장 급한 통장 개설과 휴대폰 개통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모텔을 떠나기 전 앞으로 살 집을 알아봐야 했다. 호주에 오기 전 카페와 설명회를 다니며 조사해본 결과, 시드니는 집값이 상당히 비싸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파트타임 워커들은 대부분 셰어하우스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이 셰어하우스도 시설이 영 좋지는 않기 때문에 집을 구할 때 기대를 모두 버리고 가격에만 집중하라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한인 셰어는 보통 '호주나라'라는 한국어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았고, 현지인이 운영하는 곳은 검트리(Gumtree)라 불리는 호주 최대의 매매/구인구직 사이트를 이용했다. 나는 전형적인 집돌이여서, 밖에 나가서 뛰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도 잘 안 마시고. 그래서 집을 구할 때 무조건 개인 공간이 있는 곳으로 구했다.
그런 점에서 한인 셰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최악의 집이었다. 괜히 사람들이 닭장이라고 표현하는 게 아니었구나. 약 30평 정도 되는 아파트에 안방에 이층 침대 두 개, 작은방에 이층 침대 2개 혹은 이층 침대 하나 + 싱글 침대 하나, 가장 작은 방에 이층 침대 하나. 더 심각한 곳은 여기에 더해서 거실에 싱글 침대 한 두 개 까지. 한 공간에 무려 7명~12명까지 함께 살고 있었다. 짐은 죄다 베란다에 처박아 놓았고, 개인 물품들은 침대 위에 놓고 생활. 화장실 하나를 보통 4~5명 심하면 7~8명이 함께 사용해야 했다.
물론 도심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집 월세가 비싸서 최대한 공간을 나눈 것 같은데, 이렇게 개인 공간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 싶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그나마 사정이 좀 괜찮았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 통칭 '스트라')는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한인타운이 위치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도심 아파트 4인실 이층 침대와 같은 가격에 싱글 침대 2개가 있는 2인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스트라는 너무 멀다. 시급이 무려 18불(2018년 기준) 인데 출퇴근에 한 시간 씩이나 쓸 수는 없다. 시간이 곧 돈인데.
나는 결국 한인 셰어를 포기하고 검트리를 열심히 뒤졌다. 어쨌든 일자리를 구할 때는 도심을 위주로 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 가격에 도심지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레드펀(Redfern) 지역에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가격도 주당 160불로 괜찮은 편이었고, 거실 셰어긴 하지만 커튼으로 구분이 되어있어서 개인 공간도 충분히 보장되는 곳이었다. 책상도 있다. 집돌이에게는 책상이 필수지, 노트북 해야 되니까. 드디어 살 곳을 찾았나? 싶어 얼른 약속을 잡고 방문했다.
레드펀에 도착해서 약속한 집으로 이동했다. 역까지 대략 도보 2분, 역 바로 앞에 큰 아시아 마트도 하나 있었고, 경찰서도 바로 근방에 있었다. 근처에 괜찮은 공원도 하나 있었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니 마스터(집주인, 혹은 집주인을 대신해 집을 관리하는 사람)가 마중을 나왔다. 키 2m 정도에 약간 마른 백인 남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슬로바키아에서 왔다고 했다(그의 독특한 발음의 영어를 알아듣기가 꽤 힘들었다). 집은 아주 깨끗했다. 안쪽에 방이 하나 있고, 거실과 부엌이 연결돼 현관으로 이어져 있는 구조였는데, 거실과 부엌은 커튼으로 공간을 분리해 놓았다. 방에 마스터를 포함한 두 명, 거실에 두 명이 함께 사는 구조였고, 현재 거실에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 가격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라니. 비록 거실이긴 해도 커튼으로 확실히 막혀있었고, 마스터와 그의 룸메이트는 평소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참 좋은 조건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채 갈까 봐 그날 바로 집을 계약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마스터는 엄청난 깔끔쟁이였는데 욕실 바닥에 물자국 하나 용서치 않았다. 뭐, 더러운 것보다는 깔끔한 것이 낫지.
그렇게 집을 구하고 모텔 체크아웃을 한 뒤, 이사를 했다. 같이 거실에서 살게 된 룸메이트는 대만에서 온 남자였는데, 말을 걸면 지나치게 경청하고 분위기가 나긋나긋한 사람이라 뭔가 친구처럼 장난치며 대화하기가 조금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마스터는 2m 정도 되는 큰 키에 슬로바키아 백인 남자였고, 베이커리에서 일한다고 했다. 마스터의 룸메이트는 태국인이었는데, 어찌나 일을 많이 하는지 집에서 거의 보지를 못할 정도였다.
나는 계약을 맺고 본드(Bond 보증금)를 바로 냈다. 그리고 짐을 모텔에서 가져오기 전에 마스터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는 다른 곳보다 집세가 싸네? 스트라나 챗스우드(Chatswood,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주거지. 도시 중심에서 북쪽으로 지하철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도 이 정도 방 구하기 힘든데"
"아, 그래도 괜찮아. 여기 예전에는 좀 위험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뜻밖의 대답이었다. 도심에 가까운 빈민촌 같은 곳이었구나 여기. 치안이 안 좋아서 가격이 쌌던 거였다.
"언제부터 괜찮아졌어?"
"한 3-4년 전부터? 옛날에는 역 주변도 조금 위험했는데, 이젠 좋아졌어. 레드펀 공원 뒤쪽으로만 가지 마. 거기는 아직도 조금 위험하니까."
2m 장신의 백인 남자가 느끼는 '안전함'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레드펀 공원 뒤쪽으로는 절대 가면 안 되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레드펀 공원은 레드펀 역에서 거리가 조금 있었는데, 그 뒤로는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가 몇 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