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첫인상 4
집을 구하고, 통장도 개설하고, 휴대폰도 개통하고. 이제 마음 편히 일자리만 찾으면 되겠다.
호주에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할 때는 크게 세 가지 루트로 나뉜다. 1. 인터넷에서 검색한다. 주로 검트리(Gumtree)라는 사이트를 이용한다. 2. 직접 찾아간다. 실제로 일을 구하고 하고 있는 도중에도 이력서를 뽑아 들고 매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3. 지인한테 부탁해서 꽂아달라고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추천을 받고 들어오는 사람은 최소한 노동을 할 준비와 자세가 검증받은 사람이니까.
나는 호주에 지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1번과 2번 방법을 주로 이용했다. 특히 영어실력을 높이고, 현지에서 일하는 경험을 쌓고 싶었기 때문에, 한국 사이트, 한인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는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주로 검트리를 애용했다. 듣기로는 일반적으로 가게는 정말 정말 최후의 보루로 사람이 너무너무 급할 때만 인터넷을 통해 구인한다고 했다. 그만큼 사기도 많고 일하는 도중에 도망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겠지.
첫 하루 이틀은 주로 검트리를 이용했는데, 메일을 열 건을 보내도 답신이 한 건이나 오면 많이 오는 것이었다. 스무 통 넘게 (이력서와 함께)메일을 보냈지만, 한 통도 답장이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이대로는 가져온 돈만 축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사무용품 매장을 찾아 이력서를 한 가득 뽑았다. 한 200장 정도(나중에 직장을 구하고 절반 이상을 폐기했다). 그리고 발로 뛰며 이력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주요 타깃은 백팩커스(Backpackers : 게스트하우스와 같이 값이 싼 숙박업소)의 프런트 데스크.
가게에 직접 방문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 혹시 직원 구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과정은, 처음에는 굉장히 창피했다. 특히 잘 정돈된 레스토랑이나, 프런트 직원들이 정장을 입고 맞이하는 호텔들은 분위기 상 더욱 그랬다. 직원들의 입장에서야 많고 많은 구직자 중에 한 명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 따가운 시선들을 받으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 민망했다. 그래서 처음 발로 뛰는 구직을 시작한 날에는 정장을 입었다. 알바 자리를 구하면서 정장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헛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그만큼 부끄러웠나 보다.
첫날과 둘째 날은 거의 백팩커스와 관련된 숙박업소들을 찾아다녔다. 이력서를 일부러 한 손에 꺼내 들고 다니며 구직자 임을 한껏 어필하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구인중이신가요?"
"아뇨, 빈자리가 없네요. 유감이네요."
"괜찮습니다. 제가 CV(이력서)와 커버레터를 가져왔는데, 혹시라도 일자리가 생기게 되면 읽어보시고 연락 주세요."
"네."
대부분 이런 식이었고, 설사 자리가 있다고 해도 하우스키핑(고객 퇴실 후 방을 청소하는 업무)이 대부분이었다. 영어를 써서 일을 하고 싶어서 호주까지 왔는데 굳이 하우스키핑 일자리를 찾을 필요는 없기에, 정중히 거절하고 나왔다.
하루는 시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력서를 돌리러 나갔다. 3층 건물의 외벽에 파스텔 톤의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귀엽게 페인트 칠을 한 백팩커스를 찾아 들어갔다. 직장을 찾고 있고, 이력서를 가지고 왔다고 직원에게 말하니, 사장님을 불러오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몇 분 뒤, 사장님이 건물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있으니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알려주었고, 옥상에 올라가니 중년의 금발 여성이 나를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일자리를 구하신다고요?"
"네, 여기 제 CV랑 커버레터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사람을 뽑고 있긴 한데 #@$%! 만 가능해요."
"네???"
무슨 단어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 만 가능하다구요. 지금 집을 구했어요?"
"집이요? 네. 있죠."
"언제 이사하는데요?"
"이사요? 이사 계획은 없어요."
"그럼 유감스럽지만 안 되겠네요. 아마 다른 백팩커스도 대부분 #@$%!으로만 채용할 텐데..."
안 되겠다니 어쩌겠는가. 알겠습니다 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일을 구하는데 집이 있는지 없는지를 왜 물어볼까.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현지 백팩커스 주인들은 대부분 사람을 고용할 때 자기 백팩커스에서 숙박을 하면서 일하는 사람을 위주로 구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용주는 집세 만큼 임금을 덜 지불하고 사람을 쓸 수 있고, 고용인는 집을 구하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서로에게 윈윈인 것이었던 것. 집을 이미 구해버린 나는 숙박업소에서 일 구하기는 좀 힘들겠구나. 그다음 날부터 시드니 도심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모든 일반 매장에 방문해서 이력서를 돌렸다.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