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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호주의 첫인상 5

by 지안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하고 며칠 뒤, 면접이 한두 건식 잡히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가장 가고 싶었던 백팩커스(Backpackers : 게스트하우스와 같이 값이 싼 숙박업소)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위치는 헤이마켓(Haymarket : 시드니 도심에 있는 차이나타운) 근처였고, 사장은 현지인인 곳이었다. 이력서를 제출할 때 프런트 직원이 캐주얼한 복장으로 일하는 것을 보고, 면접 때는 나도 편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 프런트에 도착해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니 직원이 2층 사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사장님은 키가 나보다 조금 작은 백인 중년 남성이었고, 척 봐도 깐깐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사무실은 온통 서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캐비닛이 꽉꽉 차다 못해 서류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방이 전반적으로 어두웠고 퀴퀴한 느낌이었지만, 별다른 악취가 나지는 않았다. 하긴 중요한 건 객실이지 사무실은 아니니까. 내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사장님은 나를 반기며 의자를 하나 내어주고 면접을 시작했다. 그는 면접 내용을 기록하기 위함인지, 면접 시작 전에 자리에 컴퓨터를 켰는데 쿨러가 시끄럽게 돌았다.


나는 한국의 알바 면접과 같은 (그저 대강 인상을 보고 사장이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그러한 면접일 줄 알고 별다른 준비를 해 가지는 않았는데, 면접은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었다.


"자기소개해보세요", "취미가 뭐예요?", "시드니에 온 지 얼마나 됐어요?", "백팩커스에서 일해 본 적이 있어요? 없다면 이용해 본 적은 있나요?"

"워킹홀리데이 워커는 6개월 일하는 게 최대인데, 만약 우리 백팩커스에서 일을 하고, 끝나게 되면 어떡하실 건가요?", "중국어를 얼만큼 할 줄 아는 건가요?"

"숙박업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숙박업이 뭐냐니, 알바생이 숙박업에 대한 철학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걸까.)

"풀타임 근무를 못 줄 수도 있어요(호주는 시급이 워낙 높기 때문에, 시프트를 잘게 나눠서 바쁜 시간대 두세 시간만 알바생을 추가로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도 괜찮나요?"


면접은 대략 30분 정도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질문들을 받긴 했지만, 침착하게 이어나갔다.


"좋아요. 질문은 여기까지 입니다. 당신은 영어를 꽤 잘하네요."

"아, 감사합니다. 저 말고도 다른 지원자들도 영어를 다들 잘하지 않나요?"

"아뇨! 저는 한국인 워킹홀리데이 워커들을 몇 번 고용해서 함께 일해 봤습니다. 다들 영어를 못해서 같이 일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당신만큼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허허허. 면접 결과는 수요일에(면접은 월요일에 진행하였다) 따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기분 좋게 백팩커스에서 나왔다. 전반적인 면접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 이 정도면 합격을 기대해 볼만도 한 것 같았다.




백팩커스에서 면접을 본 다음 날은, 여행사 사무소에서 면접을 보았다. 이번에는 직접 이력서를 제출한 곳이 아니라, 검트리(Gumtree)를 통해 지원한 곳이었다. 사무실은 록스(The Rocks)에 위치했고, 나는 서큘러 키(Circular Quay)역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했다. 록스는 오페라 하우스의 건너편에 위치한 곳으로 오페라 하우스의 전체적인 사진을 찍기에 가장 적격인 곳이다. 그만큼 관광객도 많다.

록스.JPG 록스에서 촬영한 오페라하우스 ©Jian
롟그3.JPG 록스에서 촬영한 하버브릿지 ©Jian

여행사 사무실은 이게 사무실인가 싶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조그만 판잣집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는데, 바로 옆에 음식점들과 노점상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말마다 열리는 록스 마켓(주말에만 열리는 일종의 시장)이 시작되는 곳 근처였는데, 판잣집들 중 몇 개는 창고로 사용되는 듯했다.


사장님은 한국인이었고, 다른 알바생 두 명과 함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듯싶었다. 여행사의 주요 상품은 시드니 시 외곽에 위치한 유명한 관광지인 블루마운틴(Blue Mountain, 시드니 시내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관광이었는데, 단체 혹은 개인 손님을 받아서 사장님이 직접 가이드가 되어 차를 몰고 관광을 시켜주는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보들은 모두 이후에 알게 된 것이고, 그 전에는 그냥 여행사라고만 했지 회사 홈페이지도 알려주질 않으니 규모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사무직에 지원한 것이니 평범한 사무 보조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번에는 정장을 입고 면접에 나섰다.


면접은 최악이었다. 애초에 면접도 아니었고, 한 시간 넘게 사장님이 하는 말만 주구장창 듣다가 나왔다. 면접 내내 내가 한 말은 "네, 네, 아니오, 네, 힘드시겠네요, 네, 네". 이럴 거면 뭐하러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 걸까. 우리 회사가 얼마나 잘 나가느니, 트립어드바이저(여행 상품을 판매하고 평가하는 사이트) 평점이 얼마니부터 시작해서, 내가 알바하는 애들을 위해 매일 커피 한 잔 사준다, 지금 알바하는 학생이 어디 대학교 학생인데 방학 때마다 와서 도와준다, 중국에서 살다와서 중국어도 아주 잘하고 영어도 완벽하다, 우리가 하루에 메일을 천 통 넘게 받는데 이걸 관리를 잘해야 한다, 나는 지금 메일 관리해 줄 알바생을 뽑고 있는데 실수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 실수가 하나라도 생기면 메일 시스템 상 모든 게 꼬여버려서 다시 원상 복구하는데 하루 이틀 걸리는 게 아니다, 지금 홈페이지가 다운돼서 복구하고 있는데 워드프레스(웹사이트를 제작할 수 있는 개발도구)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까지.


도대체 면접자한테 이미 일하고 있는 다른 알바생 자랑은 왜 하는 것이며, 겨우 알바생 두 명한테 커피 한 잔 사준다는 걸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고, 경력자를 뽑는 것도 아니면서 실수는 '하나도' 용납치 않겠다 하고, 워드프레스까지 할 줄 알아야 한다니. 헬조선의 압축판이 여기 있었네. 그러면서 마지막에 나에게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는데,


"우리 지안 씨가, 진짜 여기서 일하고 싶은 게 맞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 아마 그냥 이력서를 막 돌리느라 별로 생각 안 해 봤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집에 돌아가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고, 계속 심사숙고를 해도 그래도 여기에서 일하고 싶다면 그때 알려줘요."


그냥 뽑지 않겠다는 말을 이렇게 기분 더럽게 돌려 말하시는 재주가 있었네요 사장님.


그렇게 한 시간을 낭비하고 사무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첫인상이 많이 별로 였던 건가. 나는 분명 면접을 갔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설교를 한참 듣다가, 너 탈락이야 라는 통보를 받았네. 차라리 대충 형식적으로 몇 가지 물어보고 다음날 탈락 통보를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사람 짜증나게 하는 방식으로 하는 건지. 어쩌면 사장님이 그냥 자기 자랑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저녁이 되고 집에 돌아와서 그 여행사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해 보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실수하지 않겠다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사장님께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답장은 없었다.


수요일이 되었고, 내 메일함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두 곳 모두 탈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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