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주는 의미는 머무는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안식을 주는 곳이 집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처럼. 너무 편하면 몰두할 수 없어 집 밖을 나가서 카페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좁은 칸막이 사이에서 일하는 시간은 조금은 압박감을 느낄 수 있고, 반복되는 일을 하는 직업을 가졌을 땐 머리를 식힐 곳이 절실해진다. 좋은 회사, 훌륭한 복지, 쾌적한 일터를 가졌다면 조금 더 나을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이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잠깐의 환기를 위해 숨을 고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화장실’이 아닐까.
영국에서 ‘기울어진 변기’를 도입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변기 좌석을 13도 정도 기울여서 앉아 있으면 다리에 힘이 들어가 5분 이상 버티기 힘들게 만든 구조. 명목은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휴식 시간을 줄여 생산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무서웠다. 사람이 생산하기 위한 도구로, 일하는 시간에 맞춰 굴러가도록 하는 부품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같은 인간이 고안한 것인데, 그는 화장실이 휴식의 공간이며 시간을 낭비하는 공간으로 인식해서 그렇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인 독립을 위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도 있지만, 아주 조금은 ‘나라는 사람이 여기에서 원했던 일을 하고 있어요.’라는 자아의 외침도 있는 것인데. 생산성만을 위한 가치관이 입혀지니 그 외침을 묵살한다는 잔인함이 서려 있는 거다.
화장실. 은수가 일하는 공간으로 정해진 세계다. 희곡 안에서 은수는 과장으로서 화장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며 생산성 지표를 통계 내는 일을 맡는다. 배설하는 시간조차 초 단위로 쪼개어 효율을 따지는 숨 막히는 관리자. 이렇게 극의 인물이 겪어야 할 상황 설정을 하면서도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었다.
“여보 이게 말이 될까? 화장실 쓰는 시간까지 감시하고 통계 낸다는 게 설득력이 생길까?”
사람을 기계 부품처럼 대하는 설정이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라 관객들이 몰입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앞섰던 거다. 하지만 기울어진 변기 기사를 보내 준 남편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의 생각이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네.”
남편의 담담한 말. 차라리 상상 속의 세계라면 웃고, 슬프고 끝났을 것을.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는 현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기울어진 각도를 보며 문득 처음 <물고기가 되고 싶어> 희곡을 쓰고 싶게 만들었던 기사로 접한 죽음이 떠올랐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먹는다는 유명한 베이글 가게. 그곳에서 일하던 젊은 직원이 과로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는 소식. 다시 글로 옮겨 담아도 슬픔이 가시지 않는다. 화려한 핫플레이스의 뒷면에서 그는 잠시라도 편히 쉴 곳이 있었을까.
어쩌면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기울어진 화장실’ 아니었을까. 다리에 잔뜩 힘을 주지 않으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 잠시 숨을 고르러 들어간 화장실에서조차 빨리 나가라며 등을 떠미는 13도의 기울기. 그 청년을 죽음으로 내몬 건 과도한 업무량이기도 했겠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숨 쉴 ‘평평한 10분’조차 허락하지 않은 가파른 경사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가치가 생산성이라는 숫자 앞에서 어떻게 지워지는지 여실히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화장실은 가장 작고, 꼭 필요한 공간이다. 잠시나마 솔직하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잠시 멈추어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성역이어야 한다. 그 당연한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까움이라는 미련을 찢어 은수의 세계를 과감히 무너뜨렸기에 비로소 다시 지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 폐허 위에 단순히 잘 쓰인 글이 아니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을 세워야 한다. 존엄이라는 마땅히 있어야 할 당연함을.
무너뜨린 세계를 글로 다시 짓는 동안, 은수가 일하며 점심을 먹고 볼일을 보는 화장실은 일도 휴식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혼란이 뒤섞인 두려운 공간이 되어버린다. 은수의 입에서 “물고기가 되고 싶네요”라는 말이 나오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작은 화장실 칸에 머물며 당신의 다정한 말을 듣고, 밥을 잘 먹지 걱정해 주고,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물고기라면. 그런 물고기라면 차라리 물고기가 되고 싶네요.”
차라리 물고기가 되고 싶다고 선언한다. 기울어진 변기 위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모두에게 물고기가 유영할 수 있는 부력과 다정한 말, 작은 쉼, 따뜻한 밥 한 끼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절박한 신호다.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부품으로 전락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