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크리스마스 아침. “엄마, 보고 싶었어요.”라는 사랑 가득한 인사와 함께 눈을 뜬다. 아침형 아이여서 나보다 먼저 눈을 떠 옆에 누워 뒹굴거리기를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 품에 파고들어 만지작거리는 순간이 행복해서 그렇다는데, 덕분에 나까지 아침형 인간이 되어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이의 얼굴에 볼을 맞대어 비비며 피곤하지만 다정한 하루를 시작한다. 잔뜩 상기된 얼굴의 아이가 거실로 걸어가는 발걸음에, 내 심장 소리도 같이 박자를 맞춰 두근거린다. 과연 아이의 소원은 이루어졌을까. 결과를 이미 아는 남편과 나는 입가에 커다란 미소를 걸고 아이의 눈빛, 손짓, 발을 구르는 모습을 눈에 담는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셨어요!”
선물을 받으려 가을부터 약속을 잘 지키는 아기가 되겠다며 하기 싫은 양치질도, 목욕도, 밥을 앉아서 먹는 것도 열심히 해냈다. 당연하게 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어른도 귀찮은 순간이 있듯이 아이도 하기 싫은 날이 많았을 거다. 그걸 이겨내고 받은 선물이니 얼마나 소중하고 귀할까. 종일 선물을 가지고 노느라 밖에도 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평소 장난감을 사달라고 말하지 않고, 조르지도 않는 아이라 방방 뛰며 온종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 한편이 시큰했다.
아이가 노력해서 얻은 선물의 기쁨을 함께 느끼는 중, 불현듯 나에게도 크리스마스 선물이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우스운 생각이 스쳤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는 비밀의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른도 선물이 필요한데. 열심히 약속을 지키면 받을 수 있나요?’
얼토당토않은 물음을 던져본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하얀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걸음걸이를 늦추게 만든 그날이 떠올랐다. 누런 서류 봉투에 완성된 대본을 넣고, 꽉 쥔 손으로 들고 우체국으로 가던 그날처럼 눈이 내려주면 좋았을 텐데.
희미하게나마 마침표를 찍은 날이 드디어 왔었다. 더 이상은 수정할 수 없는 시간의 마지노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쇄해서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소리 내어 읽고, 마지막까지 오타를 찾고, 문장의 호흡을 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완전해지려 만든 대본을 종이로 출력해 누런 봉투에 담았다.
물고기가 되고 싶은 기울어진 화장실 속, 은수의 세계가 담긴 봉투를 들고 남편의 회사에서 나와 발걸음을 옮긴다. 계단을 내려가고, 기다란 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기다리는 모든 순간이 은수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정말 보내줘야 할 때구나.’
부서지는 햇살에 눈을 살짝 움츠리듯 감았다 뜬다. 우체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 앉으니, 마치 귓가에 음악이 흐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그러던 차에 벌써 내려야 할 정거장이다. 하얀 눈밭에 발길을 내리며 차분히 걷는다. 그저 우체국에 우편을 부치러 가는 것뿐인데 왜 이리도 손을 꽉 쥐게 되는 건지. 봉투가 어디로 달아나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크게 부는 것도 아닌데. 아마도 이 손안에 담긴 간절함이 쏟아져 내려 사라질까 봐 봉투 끄트머리가 구겨질 정도로 꽉 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 얇은 봉투 안에 지난가을과 겨울, 모든 애틋한 밤이 들어있다.
문을 열고 우체국 안으로 들어선 순간. 거짓말처럼 요동치던 마음의 파도가 잠잠해졌다. 꽉 쥐었던 손도 힘을 풀어 가볍게 봉투를 들고 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택배 상자를 포장하는 소리. 다음 해의 달력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대화 소리까지. 그 일상의 소음 속에서 오히려 마음속에 고요함이 스며든다. 창구 직원에게 봉투를 건네고 빠른 등기인지 확인한 후, 우체국 달력을 받아 들고 나왔다.
이날의 집으로 돌아오는 발자국이 크리스마스인 오늘까지 이어진다. 그날의 간절한 소원이 꽉 쥐어진 손에서 등기로 보내진 봉투에 담겨 선물 같은 소식이 돌아오길. 기적인지 알면서도 괜히 기대를 해보는 거다. 그저 크리스마스니까. 하루쯤은 원하는 소원을 떠올려 봐도 괜찮은 날이니까.
평온한 날을 보내며 가족과 함께 웃음을 지은 것으로도, 집안으로 돌아와 하루의 작은 행복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잠이 들기 전에 좋아하는 책을 아빠의 목소리로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모든 것이 크리스마스의 기적임을 안다.
그러니 소원은 소원대로 접어두고 이 기적을 고마워하는 것으로 발자국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