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밤이 긴 겨울

by 지안의 문장


해가 늦게 뜨는 겨울 아침엔 아직 밤의 어둠이 물러서지 않고 있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차가운 겨울이 가야 따스한 빛을 받을 수 있을까. '빛'이라는 단어는 홀로 있을 때에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짙은 어둠이 깔려야 말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짙은 어둠 아래 오랫동안 있다 보면 작고 희미한 불빛조차 소중해지는 것처럼.


아마도 이번 겨울의 밤은 온 땅을 덮을 이불자락 위로 한 땀 한 땀 손으로 기워 넣을 실처럼 다가오려나 보다. 그렇게 짙고, 느리게, 오랫동안 머무르려 한다. 다시 빛을 찾아갈 여정을 떠나라고 등을 떠민다.


실패. 탈락. 불합격.


수없이 만난 단어들인데 다시 또 만나려니 마음이 시려오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합격이라는 단어를 만난 사람이 있으니 나에게는 불합격이라는 단어가 찾아왔겠지. 그렇다고 멀뚱하게 앉아서 시린 마음의 구멍만 들여다보고 있을 틈이 없다.

그 감상에 젖기도 전에 아이 밥은 뭘 먹일지 메뉴를 고르고, 장을 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해야 할 일'들이 멈추지 않는다.


‘아이 입술이 자꾸 터서 립밤을 사야 하는데, 전에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뭐가 좋다고 추천해 주셨지? 아 맞다, 비판톨.’

‘수건을 거의 다 써가는 거 같은데 빨래도 싹 다 돌려야겠다.’

‘브런치에 올릴 글도 써야 하고, 준비한 새 프로젝트도 해야지.’


겨울의 긴 밤이 찾아오기는 하는데, 그 긴 밤을 채워 넣을 것들은 차고도 넘친다. 예전의 나였다면 마음이 시려오는 겨울밤을 그대로 안은 채 잠들어버렸을 거다.


‘진짜 나는 아무것도 안 되네. 이 길에는 빛이 없구나. 그만하자. 재능이 없었던 거야.’


생각의 꼬리를 돌돌 말고 있었을 거다. ‘두려움’ 이걸 그저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내가 조금 더 좋은 이유는, 그저 다시 해야 할 일을 해치우며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 점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당장 앞에 있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걸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 점이 지금에서야 좋다. 그때의 긴 밤에는 막막해서,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모른 채 흘러갔는데.


‘다시 할 용기.’


이 말을 갖고 살게 해 주었다. 아이를 키우면 내 세계에 실패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계획대로 이뤄지는 건 별로 없고, 하나라도 있으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이 될 정도로 망망대해에서 작은 배에 올라 노를 젓고 있는 기분이다. 그런 틈에서 건져 낸 말이다.

“그냥 다시 하면 돼. 어차피 다 처음이야.”


우울함이 밀려와 눈물로 지새우는 밤 안에서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냥 다시 하면 돼. 이번엔 할 수 있어.”


그런 기나긴 밤들이 쌓여 이 순간까지 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나만의 식탁에서 고요함을 다시 마주하며 깊숙이 묻어 둔 희곡을 쓴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나라는 독자를 위해 에세이를 쓴다. 어릴 적에는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정말 배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시간을 떠올리며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신춘문예 당선은 되지 않았다.


기다렸던 소식이자 소원이기에 이 겨울의 밤이 시린 것은 맞다.


그렇다고 이 겨울의 밤이 오기까지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희미한 불빛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된 것이고, 금방 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놓고 주문을 외울 수 있었던 거다.


온 땅을 덮을 이불의 실을 꿰맨다는 마음으로 한 땀씩 앞으로 가다 보면 ‘다시 할 용기’ 이 주문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음을 알게 될 순간이 올 것이다. 어떤 빛은 짙고 짙은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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