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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맹이 Apr 26. 2024

식이는요~~

    

3년 전 1월 1일 시작된 공황장애를 지금까지 앓아오면서 2년은 참기만 했는데 올해는 증상이 심해져서 심리치료를 시작했다.

치료의 목적은 나를 찾기 위함 인 것 같았다.

내 맘속에 있던 응어리를 다 털어놓는 시간이 많았는데 지금까지 하도 많이 울어서 그런지 정작 전문가 앞에선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담담해진 나를 보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지인들이랑 수다 떠는 정도.

상담을 더 진행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던 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50분 하는 상담이 6주 차 되던 날.

상담 선생님께서 “몇 개월 뒤 몇 년 뒤엔 뭘 하고 싶어요?”라고 질문하셨다.

난 몇 주 뒤에도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좋아하는 물건이 뭐냐고 좋아하는 장소가 뭐냐고 물으면 난 아무것도 없다가 답이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마음이 여유로운 적도 없었고, 행여나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 해도 가지지 못하는 가난이 싫어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살이로 살아간 내게 그 질문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들밖에 없던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20살 대학 입학을 하고 간호학과 특성상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았다.

같은 동기생들끼리 무덤 하나를 빙 둘러 누워 유언을 적은 적이 있다.

난 그날 죽어도 별로 억울할 것도, 별로 살고 싶은 생각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 죽는다고 누가 울어나 줄까?’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냥 싫은 내 모습에 ‘다시 태어나면 지금 보다 나은 사람이겠지’라는 생각만 했다.     

자라면서 놀림을 많이 당했다. 그럴 때마다 자꾸 움츠러들었다.

남 앞에 가면 이름을 말해야 하는데 이름도 이상하고 키도 형제 중에 제일 작고 얼굴도 제일 못생긴 내가 싫었다.

그냥 쳐다보는 친구 눈빛도 날 무시하는 것 같고,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보면 ‘나한테 냄새나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렇게 점점 더 숨게 되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게 되었다.

내일 하고 싶은 것보단 오늘 어떻게든 버티는 삶이었다.     

6주 차 상담을 마친 날부터 몇 날 며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얼까?

생각했다. 진짜 찾아보고 싶었다.

한 번도 바다가 좋다느니, 벚꽃길을 가보고 싶다느니, 눈 내린 길을 걷고 싶다느니.

이런 바람도 없었던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보면 기분이 들뜨는지 뭘 하고 싶은지 찾아보고 싶었다.     

문득 어쩌면 공황장애가 나 자신을 찾아라는 신호?

그 신호를 알아차리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이번이 내가 엄마, 딸, 며느리, 아내가 아닌 나를 찾을 기회라면 더 늦기 전에 남 눈치 본다고 전전긍긍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첫 번째 변화가 나 자신을 옭아맸다고 생각했던 이름 바꾸기였다.

간혹 재미있는 추억을 주기도 한 이름이지만 날 아프게 한 적이 더 많던 이름.

남자 이름이라는 이유로 학교 다닐 때 놀림도 많이 받고, 그로 인해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것부터 자신 없게 만들었던 게 이름이었다.

여자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과 내가 모자라 보인다는 열등감이 늘 짐처럼 따라다녔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티가 내 눈엔 확대경으로 보는 것 마냥 그 부분만 신경 쓰이듯이, 남들은 내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도 없었지만 내가 싫은 것은 바꿔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작명소를 예약하고 이름을 추천받고 법원에 바로 신청했다.

신청서에 개명 이유 적는 란에 길어야 5줄 정도 적을 수 있는 공간에, 난 별지까지 달라고 해서 A4 용지 앞뒤로 빽빽하게 내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적었다.

은식이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살았는지를 줄줄줄 적었다.

개명 허가를 받기 위해 조금은 오버했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동안 받은 설움을 낱낱이 토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2달이 지났다.

문자 한 통이 왔다.

2달 아니 44년을 기다린 문자다.

‘수원지방법원 평택 지법 개명 허가 결정’

법원에 전화해서 언제 결과 나오냐고 계속 물으며 기다린 문자였다.

이름만 달라지면 내 인생도 고속도로처럼 멋지게 펼쳐지겠지라는 설렘으로.     

그런데…

문자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주르륵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결국 “어엉엉” 또 소리 내는 눈물로 터져버렸다.

하루 종일 울었다.

아니 웃다가 울다가 길을 걷다가 또 울다가 운전을 하다가 음악을 듣다가 또 울었다.

개명신청서에 구구절절했던 은식이의 싫은 이유가 오버가 아니라 내 무의식 중의 진심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나 보다.     

갑자기 미안했다. 은식이에게…

남동생을 위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나 스스로 부정하고 싫어해서 미안했다.

남들 앞에서 이름 말하기 부끄러워해서 미안했다.

이름부터 작은 키까지, 당당하지 못하고 주눅 들어 눈치 보고 살게 해서 미안했다.

못생겼다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어쩌라고 그래서 뭐’라고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자책하고 살게 해서 미안했다.

반장하라는 고1학년 2학년 선생님들께 키 작다는 이유로 안 하겠다고 하고는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해서 미안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냄새날 것 같아서 너를 보여주기 창피해해서 미안했다.

천사 병에 걸려서 착한 척, 이해심 많은 척하고 살게 하고, 속으론 썩어가게 해서 미안했다.     

은식이는…

지난 시간 남자 이름이라 놀림당함에도 꿋꿋하게 잘 견뎌 준,

발가락 반이 찢어져도 1등을 위해, 행복해할 가족을 위해 열심히 뛰어 준,

반장은 못 했지만 공부 열심히 해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살게 해 준,

아픈 몸과 마음으로도 분리 수거장까지 뒤져가며 아들 멋지게 키워 내준,

평생 아빠랑 한 말이라고는 “아빠 밥(드세요), 아빠 돈(주세요)”이라는 말밖에 없을 정도로 어색한 사이인데 의료사고로 하루아침에 하반신 마비가 되신 아빠가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잠시라도 아빠를 웃게 해 주려고 43살의 나이에도, 6인실 병실에서 아빠에게 춤을 춰주는,

제일 적게 사랑받고 살았음에도 간호하시는 엄마 힘드실까 봐, 너무 무거워 토할 것 같은 짐을 들고 5개월을 엄마 밥을 해서 매일매일 2시간을 운전해 병원에 갔던,

식구들 생일마다 케이크를 보내준,

갑자기 비가 내린 날, 내 아들은 비를 맞혀도 조카를 데리러 가 준,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팔, 다리가 다 돌아가고 마비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 갈 때도 잘 버텨 준,

부모 욕되지 않게 잘 살아야 한다는 할머니 말씀 한마디를 지키려고 시어머니의 가슴 아픈 말에도 얼굴에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약속을 지켜 낸,     

은식이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은식이는 마음이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다.

은식이는 정말 열심히 산 사람이었다.

충분히 멋지고, 충분히 사랑스럽고, 충분히 소중한 사람이었다.     

죽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도 너 자신을 지켜낸 은식아 너무 고맙다.

그리고 너무 늦게 네 마음을 바라봐줘서 미안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인데 이름만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생각들이 드는 내가, 나도 어색하고 이상하기도 하지만, 어딘가에 묻어두어야 할 이름이라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다.

오늘 하루 정말 원 없이 펑펑 울고 원 없이 미안해하고 원 없이 고마워하자.

그리고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개명이니 만큼 후회하지는 말자.

아니 다시 시작하자.

은식이로 44년 살았듯 지안으로 44년 더 재밌게, 더 당당하게 다시 시작하자.

나를 찾기 시작한 첫걸음이 눈물 나고 어색하고 버겁기도 하지만 계속 변화하고 도전해 보고 싶다.

88살에 은식으로도, 지안으로도 잘 살았다고 말할 그날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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