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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맹이 Apr 26. 2024

단감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앞에는 5일마다 장이 열렸다.

시골 동네에서 유일하게 볼거리가 많은 날이었다. 그땐 대형마트 같은 것도 없고 우리가 놀거리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5일장은 늘 기다려졌다.

그중 우리가 제일 좋아했던 달고나 파는 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연탄불에 달궈진 달고나를 평평한 판에 뒤집어 놓았다. 그런 다음 물고기나 새 모양 같은 틀로 찍어서 주셨다. 참새 같이 모여든 우리는 뾰족한 클립이나 이쑤시개로 모양틀을 파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성공해야 하나를 더 공짜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5일마다 한 번씩 먹는 달고나를 다들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 아주머니 얼굴은 꼭 달고나 같이 검었다. 우리끼리 “달고나를 너무 많이 드셔서 얼굴색이 그런 걸 거다”라며 웃기도 했다.

 달고나 아주머니 옆에는 항상 쫄쫄이를 구워주시는 아저씨가 계셨다. 노란색과 주황색이 섞여 있는 쫄쫄이를 연탄에 살짝 구우면 쫀득쫀득하니 맛이 일품이었다.

 신기한 장난감을 파는 아저씨도 계셨다. 달리는 말 장난감, 호루라기처럼 불면 동그랗게 말린 비닐이 쫙 펴지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장난감도 있었다.

 시장 구석에는 “뻥이요” 소리와 함께 뻥튀기가 와르르 쏟아지는 기계가 놓여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항상 귀를 막곤 했었는데 막 쏟아지는 뻥튀기는 뜨거우면서도 정말 맛있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그 맛이 너무 좋아 “뻥이요” 소리가 들리면 다른 곳에 있다가도 우린 그곳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렇게 5일마다 우리는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신이 났다.

봄 여름 겨울 다 행복했던 5일 장이었다.     

 하지만 난 가을만 되면 그 장을 구경하지 못했다.

울 엄마가 단감을 몇 자루씩 들고 와 학교 정문 옆 바닥에 앉아서 그걸 팔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교하는 친구들과 우르르 나와서 나는 장이 있는 곳과 반대편인 집으로 뛰어갔고 단짝이었던 친구는 자기 엄마 가게가 있는 장 쪽으로 뛰어갔다.

친구 엄마는 사장님이라 가게 안에서 장사하시는데 울 엄만 길바닥에 앉아서 장사를 하셨다. 친구 엄마는 쉴 때도 따뜻한 방에 앉아서 쉬셨는데 울 엄마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겨우 신문지 몇 장 깔고 계신 게 다였다. 친구 엄마는 손님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데 울 엄마는 아줌마라고 불렀다. 가끔은 끼니로 국수를 드시고 계시다 급하게 내려놓으며 단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엄마를 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 모습이 친구들에게 창피하진 않았다. 지금도, 그때도 내 감정이 부끄러움은 아니다. 나물 파시는 할머니들 사이에 젊은 우리 엄마가 앉아 계시는 모습이 애처롭고 불쌍해 보였다. 그런 엄마 모습에 속도 상하고 자꾸 눈물이 났다.

그래서 가을에 열리는 5일 장은 절대로 구경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갔다.     

 그날은 집에서 하루 종일 빨리빨리만 외쳤다.

빨리빨리 감이 다 팔려서 울 엄마 얼른 집으로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아니면 비라도 흠뻑 내려서 울 엄마 장사 그만하고 집으로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가슴 졸이며 빌고 또 빌었다. 저녁이 다 돼서도 엄마가 안 오시면 나 혼자 학교 앞으로 다시 걸어가 엄마가 보이는 건물 옆에 숨어서 엄마를 쳐다봤다. 야속하게 남아있는 감을 나라도 먹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엄마는 그렇게 5일에 한 번씩 감을 팔고 다른 장에서는 고추를 파셨다. 고추 파시는 모습은 볼 수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루 종일 단감을 팔고 집에 오신 엄마의 다리는 항상 퉁퉁 부어있었다. 힘들다는 말씀 한마디 안 하셨지만 초등학생(국민학생)이었던 나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힘에 겨운지..

그렇게 싫은 가을의 5일장은 유독 더 자주, 더 빨리 다가오는 것 같았다.

보는 나에게도 그렇게 빨리 다가오는데 엄마 마음은 어떠셨을까?

시부모님, 시동생, 별난 시누이까지 함께 살고, 시누이 옷까지 다 개울에서 손빨래하고, 일 년에 제사가 13번, 명절날 친지들이 100명 넘게 오시고, 무뚝뚝한 신랑 때문에 위로받지도 못하고, 아침이면 자식 넷 도시락만 여덟 개인 날도 있고, 거기에 식구들 밥까지 준비하셔야 하고, 낮에는 논일, 밭일까지 하셨던 울 엄마의 힘든 삶에 단감은 하나 더 올려진 짐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엄마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다.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삶도 모범생으로만 살았다. 그 흔하다는 사춘기 한 번, 반항 한 번 없이 지냈다. 그런 삶이 되풀이될수록 남들은 달고 맛있다는 단감을 난 웃으며 맛있게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단감을 볼 때마다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쳐 잠이 들던 엄마 모습이, 무서운 할머니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5일마다 단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리어카에 실어서 장에 나가야 했던 엄마 모습이.

그 애처롭던 엄마 얼굴이.

그래서일까? 아직도 난 단감이 쓰고 떫다.

30년이라는 세월도 나에게 가을 5일장의 아픔을 보내 버리기엔

짧은 시간인 걸까?          


하지만 이제는 가끔 아주 가끔 용기를 내 볼까 한다.

지금까지 감히 묻지 못한 말이지만 언제나 궁금했던 말     

“엄마! 혹시 엄만 단감이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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