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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의 자유비행 Sep 09. 2021

[소설단평] 5. 기적이라는 단어의 이기심에 대하여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나는 평소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다. 노동문제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어떤 방식으로 차별받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품을 읽으며 해주와 오경남, 화자와 버스 운전사(이하 남자)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약자로 표현되는 해주와 오경남에게만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을 상기하며 작품을 읽었다.

  이 작품은 기적, 책임, 약자라는 세 단어로 나타낼 수 있다. 기적, 책임, 약자를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해주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본다. 화자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해주는 자주 없는 것을 보았다고 우기는 듯하다. 해주를 위해 화자는 도라지 분말을 사다 준다. 해주는 도라지에는 관심이 없다.

  해주는 병원에서 선천적으로 후두가 부은 모양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화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해주는 일상을 잘 살지 못한다. 한적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화자가 자신을 혼자 두는 것에 분노한다. 화자는 해주가 선천적 후두 이상의 의미를 곡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주는 후두 이상의 의미를 곡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에 대한 명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한 것이다. 나 역시 며칠 전 전신에 원인 모를 두드러기가 났다. 동네 내과를 가도 나아지지 않아 대학병원에 갔는데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대학병원에서는 입원을 권유했다. 입원 후에도 두드러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해주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화자는 해주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해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자에게 위로나 관심을 갖는 것보다 가만히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다소 위선적인 책임 회피 경향이 드러난다.

  작품은 회상 형식으로 진행된다. 화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했어야 했다, 혹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후회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 화자는 카페에서 가볍게라도 해주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

  화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자책하지만 사실 화자는 물리적으로 사고를 막을 수 없다. 해주의 죽음은 안개가 짙어 발생한 사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사고는 누구의 책임일까.

  카페에서는 지갑을 잃어버린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부주의로 지갑을 잃어버렸음에도 전혀 관계없는 사람인 해주를 탓한다. 이 장면을 통해 직접적인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손가락질받는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주는 정말 본 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사실과는 달랐지만, 해주는 자신이 본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믿고 말했다. 하지만 해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화자 역시 ‘보긴 도대체 뭘 봤다는 거야’라고 해주에게 화낸다. 화자는 해주가 본 것을 이야기할수록 생기는 문제들을 차단하고 수습하려 한다. 해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화자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문제를 원활히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 하지만 화자는 ‘왜 하나도 좋아지지 않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라고 한탄한다. 나는 이 말이 현재 약자가 처한 현실(또는 노동 현실)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 같다고 생각했다.

  화자는 해주의 슬픈 얼굴을 떠올리며, ‘그 순간에는 그게 너무 슬퍼 보이고 무얼 뜻하는 줄은 몰랐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뒤에 가서 ‘뭐가 그렇게 너를 암담하게 만들었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말해 보라고, 그게 뭐든 같이 견디자고. 아니면 그냥 옆에서 가만 듣다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한다. 해주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화자는 다리가 저려 밤에 잠들기 어려웠으나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진단받는다. 사람들은 화자에게 이럴수록 잘 먹고 잘 버티라고 말한다.

  화자는 결국 은행에서 화를 낸다. 사고 발생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표출된 것이다. 사고는 있지만 책임질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혼잣말을 하고 이상한 시선을 느낀 후, 화자는 조금이나마 해주에게 공감하게 된다. 종교 단체 홍보 책자를 놓지 못하는 모습은 약자가 손바닥만 한 희망, 혹은 위로를 놓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화자가 계속해서 사고와 관련한 누락된 사실을 찾는 모습은 누락된 책임자는 없는지 찾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마침내 책임을 전가할 사람을 찾는다. 사고를 피한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거라면, 해주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그냥 그럴 수 있는 죽음을 맞은 거냐고 질문한다. 사고를 당할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세상인가, 그게 왜 해주인가, 라는 질문은 약자가 반드시 필요한 세상인가, 그게 왜 해주인가, 라는 물음으로 들린다. 사고로 사람이 죽었지만 해고당했다는 이유로 억울하다, 너무하다, 지나치다며 항의하고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화자는 남자에게 사고의 책임을 전가하기로 한다.

  남자가 더 그럴듯한 사람이었다면 책임 전가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화자도 남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막상 마주한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초라해서 화자는 오히려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형식적으로 건넨 위로였지만 남자는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것이 화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기적을 믿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화자는 ‘나는 보다 상식적인 쪽’이라고 답한다. 이 짧은 대답에는 해주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상식적으로 설명하고, 내가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게 하라는, 남자를 향한 적대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분석문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작품에서 이름을 갖는 인물은 해주와 오경남 둘 뿐이다. 나는 소설에서 인물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해주와 오경남만이 이름이 있는 이유는 작가가 이들을 특별한 존재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해주와 오경남은 기적으로부터 소외된 자들로 약자, 피해자, 소수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자는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오경남에게 ‘그런 병 한둘 앓지 않는 버스기사가 어딨어. 다들 그렇지’라고 말한다. 이는 해주에게 무관심하고(도라지 분말이나 사다 주고) 윽박지르기만 하는 화자의 모습과 닮아있다. 해주와 오경남이 원한 것은 도라지 분말이나 캔커피가 아니라 공감과 이해, 관심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해주와 오경남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자 한다. 인간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남겨진 것보다 군중 속에서 혼자 되었을 때 더 큰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해주와 오경남으로 표상되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내릴 사람도 없는 곳’으로 가고자 한다.

  남자는 화자에게 좋은 것을 가지게 되면, 그저 좋아하기만 하는 인간의 특성을 설명한다. 이 장면은 개인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 사고로 살아남았다는 말은 사고로 죽거나 다친 사람이 있다는, 다시 말해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당장 자신의 앞에 놓인 ‘좋은 것’만 생각하고 누군가가 겪었을 ‘불행한 일’은 애써 생각하지 않는다.

  오경남은 해고 후 노랫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린다고 말한다. 이는 해고 후 더욱 외톨이가 된 오경남의 모습을 나타낸다. 오경남은 ‘처음에는 노래가 무서웠는데 지금은 듣기 참 좋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우리는 흔히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을 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다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사회적 약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 것이었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것을 모두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순간, 편안함이 찾아온다. 오경남 역시 여러 가지를 포기한 듯하다.

  오경남은 남자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 말은 남자를 휘청거리게 한다. 이 장면은 쉽게 건넨 위로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남자를 보고 화자가 느낀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사고가 있었던 날, 남자도 오경남이 들었던 것과 같은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남자는 자신도 오경남처럼 해고당할까 걱정한다. 주위의 무엇도 살피지 않고 당장 눈앞에 놓인 길만을 보며 간다. 그러면서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그런 작은 실수조차 얼마든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사소한 실수도 약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의미다.

  남자에게 들리던 노랫소리는 그가 약자가 아님을 깨닫자 멈춘다. 남자는 자신의 버스를 타지 않은 여자(아마도 해주)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을 다짐한다. 버스를 놓친 여자는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괜한 사람’이 된다.

  남자는 자신이 사고를 피한 것에 대해 ‘상식 밖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어떤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떤 큰 힘이 기적처럼 도울 때가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해주의 죽음 직후 사회가 화자에게 보인 반응과 닮아있다. 약자의 죽음에 대해 사회 구성원 전부가 침묵하는 것이다.

  화자는 결말부에서, 제대로 된 진상을 알려고 하지 않고 ‘기적이다’와 같은 이기적인 말로 위로를 건네는 이들이 약자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작품을 읽고 나서 문득 나의 실기 시험날이 생각났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실기 주제는 ‘버스 노선을 이탈하는 마을버스 운전기사’였다. 나는 ‘아버지의 버스’(정확하지 않다)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아직까지 이것보다 잘 쓴 글이 없다.

  나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종종 ‘정시 실기로 대학에 붙은 건 기적이에요’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말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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