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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의 자유비행 Sep 16. 2021

[소설단평] 6. 미움과 이해, 악역과 여성에 대하여

강화길, 음복(飮福)


  작품은 첫 문장부터 ‘고모가 그 집의 악역’임을 명시한다. 국어사전에 명시된 악역의 정의를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악역을 ‘놀이, 연극, 영화 따위에서 악인으로 분장하는 배역. 나쁜 일을 맡아 해야 하는 역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악당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악당은 ‘악한 사람의 무리.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악당은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면 악역은 단지 ‘역할’일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악당은 행위에 초점을 두지만, 악역은 관계에 초점을 둔다고 설명할 수 있다. 관계에 따라 악역이 될 수도, 선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고모를 언급한 뒤 불쾌하고 무례하기까지 한 질문을 나열하며 ‘그 집’에서 고모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제사를 위해 시가에 간 화자에게 고모는 다짜고짜 ‘오늘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 조카며느리가 이해 좀 해줘?’라고 말을 건넨다. 화자는 ‘대체 뭘 이해하라는 거야?’라고 반문한다. 고모는 자신의 조카인 정우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닌, 몇 번 본 일이 없는 화자에게 이해를 바라고 있다. 화자는 대체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건지 의문을 가지며 고모의 말을 날 선 태도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우는 고모와 화자 사이에 발생한 미묘한 갈등에 관심이 없다. 그저 새집 냄새가 많이 나는 것만 신경 쓰고 있을 뿐이다.

  화자는 고모의 딸 정원에 관해 이야기하며 결혼식도 제사도 참여하지 않는 ‘멋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병렬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화자와 엄마와 외삼촌, 정원과 고모와 시아버지(어쩌면 시댁 식구들)은 놀랍도록 닮아있다. 이것은 화자가 고모를 이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정원을 멋지다고 말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화자에게 자녀 계획을 세우라고 말하는 고모를 막아서는 시어머니를 보며 화자는 정우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건지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는 시어머니와 정우의 닮은 지점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진실 은폐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어머니는 진실을 알리려고 하지 않고 정우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장면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불편한 진실을 숨기는 것에서 오는 평화로움을 좋아함을 상기하고 있다. 화자는 시어머니가 고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을 ‘은근히 나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화자로서는 아마 처음 느낀 보호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정우는 평생 보호받으며 살아온 탓에 자신이 얼마나 안온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지 자각조차 못 하지만, 화자는 보호받은 경험이 없으므로 시어머니에게 보호받는다는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고모와 시어머니가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정우는 태평하게 국제정치 기사를 읽고 ‘중국이 문제’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도 정우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정우는 당장 앞에 놓인,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은 눈치채지 못한다. 누군가가 작성해놓은 거시적인 문제 관심을 둘 뿐이다. 중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면서도 중국이 문제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위선적인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화자는 정우가 가족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은 것에 마음 상해한다. 화자 자신은 엄마와 외삼촌 간의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우는 중요한 이야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우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것을 나타낸다. 화자가 이야기하는 사건과 정우의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그것이 오래도록 기억할 만한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우에게는 문제나 사건이 되지 않는 일인 것이다.

  고모가 정우를 미워하고 있음을 눈치챈 화자는 고모가 악역을 자처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정우는 ‘시어머니가 열성적으로 제사를 챙기는 걸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고모를 이해하는 조카며느리,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우의 상반된 모습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시어머니가 왜 열성적으로 제사를 지내는지 모르는 사람은 (독자를 포함하여) 정우뿐일 것이다. 제사에 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며 타박하는 고모에게 사과하는 정우의 모습에서는 순수한 폭력성이 느껴진다. 정우는 집안의 분위기가 자신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기득권자다. 그러므로 정우는 순수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할 수 있다. 화자는 이 모습을 보고 ‘고모가 앞으로도 남편을 미워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고모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평생 가질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여전히.’라고 말하는 것에서 정우를 위한 집안의 비밀 유지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화자에게 숟가락을 던지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고모였다. 고모는 할머니의 옆에 앉아 있으면서 난폭한 행동을 제일 먼저 발견했다. 흥분한 할머니를 방에 혼자 둘 수 없다는 고모의 말에 답답해하며 ‘네가 같이 있으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시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우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화자는 그 소란한 ‘풍경 속에서 시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고모, 시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남편.’이 그 풍경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열된 이들은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시아버지 역시 할머니, 고모, 시어머니의 미움의 대상일 것이다.

  할머니는 고모의 손을 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고모는 이야기를 듣고 대답한다. 화자는 시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할머니를 보고 ‘자식 한 명을 아예 잊었나?’라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오직 고모에게만 의존하고 있다. 고모는 딸이기 때문에, 딸이 아니면 엄마를 이해할 사람이 없으므로 할머니의 반복되는 넋두리를 계속해서 듣는다.


   ‘정우는 다 모르게 해줘.’라고 말하는 시어머니를 보고 화자는 ‘섬찟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는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지.’라고 중얼거린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시어머니도 악역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화자는 ‘모든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 정우의 얼굴을 보며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라고 말한다. 정우의 고요한 얼굴은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라고 말하며 ‘너’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나열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겪은 적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네가 진짜 악역’이라고 말한다.

  화자는 작품 말미에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아무것도.’라고 말하며 자신의 딸 역시 정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환경에서 성장하길 바란다.


  작품에서는 고모가 집안의 악역임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남편에 대해서는 눈치 없다는 표현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표현이 없지만, 고모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고모를 악역으로 느끼지 않는다. 작품에서는 정우를 내세워 본인도 모른 채 악역을 수행하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이는 중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역 못지않게 악독한 주인공과 비교되어 기존 악역의 패러다임을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가는 정우나 외삼촌을 ‘악당’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역을 맡은 것뿐이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고 있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긴 시간 동안 세습되어 온 악역. 화자는 자신의 딸이 아무것도 모르는 악역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치면서 기득권 세습의 연결고리를 끊고 싶은 소망을 나타낸다.

  이 세습은 이해 강요로도 연결된다. 아들은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엄마를 이해하는 것은 딸 뿐이다. 엄마는 딸을 혐오하면서도 딸에게 의지한다. 딸은 엄마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받으면서도 엄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엄마와 딸 사이의 이해 강요와 그것을 방관하는 아들의 모습을 우리는 ‘음복’이라는 작품을 통해 반복해서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입체적으로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화자는 (어린 시절 엄마의 편을 드는 것을 제외하면)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고 보이는 그대로 장면을 서술한다. 누가 진정한 악역인지를 찾으며 읽다 보면 결국은 등장인물 모두가 연극적으로 느껴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두가 악역이고 모두가 선역이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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