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과 타이밍이 전부가 아니야
완구 업계에 종사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적 우리 집엔 발길 닿는 곳마다 블록들이 쌓여 있었다. 설명서가 따로 없어 내가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 곧 작품이 되었는데, 무엇을 만들든 간에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밑판을 만드는 일'이었다.
작은 블록을 가로 세로로 쭉 나열해 놓으면 제법 큰 사각형이 만들어지긴 하지만, 이것을 밑판이라 부르긴 어렵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흩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블록과 블록 위에 새로운 블록을 얹어 두 개의 블록을 단단하게 이어주어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하는 밑판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집이든 성이든 자동차든, 그 무엇을 만들어도 '튼튼한 것'이 된다. 경험에 가치를 두고 사는 나는 그동안 여러 가지 모양과 색의 블록을 모으는 데 힘을 썼다. 여러 나라와 도시를 여행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으며 '취미 종결자'라고 불리기까지 제법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렸다. 가끔 내가 가진 블록을 모두 꺼내어 가로 세로로 이어 보며, '아, 이 정도면 언젠가 엄청나게 큰 집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며 내심 뿌듯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블록 모으기가 재밌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다들 저마다의 성을 짓고 있는 듯했다. 여러 색이 조합된 성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좁고 높은 파란색 성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나만의 성을 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블록을 쌓아나가야 할까.’, ‘내가 가진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을까.’ 모아 온 블록들을 모두 펼쳐놓고,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어떤 모양과 색의 블록으로 성을 쌓을 건지를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짓고 싶은 내 맘과는 달리, 가지고 있는 블록은 죄다 작은 것들이라 나는 '크고 길쭉하면서도 튼튼한 블록'을 구하고 싶어졌다. 그런 블록이라면 바로 깃발을 꽂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한, ‘한 방’과 ‘지름길’만 찾게 된 것이다. 도저히 수가 떠오르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블록을 싸 들고 멋진 성을 지은 주인을 찾아갔다. 왠지 그 성의 주인, 즉 이미 꿈을 이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게 '한 방'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지름길'은 어디가 더 빠른지를 알려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주인은 내게, ‘그런 건 없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지만, 왜 안 알려주느냐고 따질 수가 없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성 역시 작은 블록들로 쌓아 올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유년 시절 블록을 쌓으며 배웠던 ‘밑판의 중요성’이 다시 떠올랐다. 지루하더라도, 조급한 마음이 나를 괴롭히더라도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결국 밑판을 만드는 일이었구나.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다만 홀가분했다. 내가 요즘 찾아다닌 '크고 길쭉하면서도 튼튼한 블록'은 원래 없었던 거니까. 나만 못 찾은 게 아니니까.
나는 하고 싶었던 일의 가장 기본 단계가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했고, 스스로에게 이전과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 내가 세울 멋진 성의 밑판이 되어줄 두 개의 블록이 이제 막 이어지기 시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