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을 좋아해

by 플럼

우리는 저마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며 산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한다는 건

서로가 각자 그려온 그림들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여기 봐, 나는 공룡 그리기를 좋아해, 특히 초록색 크레파스로."

“나는 파스텔로 보라색 바다를 그리고 있었는데."

어떤 도구로, 어떤 그림을 그려왔는지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취향도 파악하고,

서로의 그림에서 고치고 싶은 것들도 발견하며,

때로는 내 그림이 더 이쁜지 네 그림이 더 멋진지를 가지고 싸우기도 한다.


그러다 관계가 성숙해지면,

새로운 도화지에 함께 하나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때 필요한 건 '대화'다.

나는 물감으로 분홍색 오토바이 바퀴를 그리고 있는데 상대는 연필로 비행기 날개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다음은 안 봐도 뻔하다.

이렇게 조화스럽지 못한 그림을 한 도화지에 담게 된 것에 대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게 되고,

대체 왜 너는 비행기를 그리고 있는지,

대체 넌 또 왜 하필 분홍색인지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대화다운 대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는 어떤 도구로 어떤 그림을 그릴 지에 대해

먼저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비단 연인 사이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모든 관계는 '대화'가 우선시되어야 하고,

내 주변이 대화가 통하는 사람으로 가득 찰 수록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도 줄어든다.


그래서 대화 자체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인생에서 정중하게 차단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는 인정머리 없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때때로 현명한 일이 된다.

때때로 매우 현명한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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