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우리는 아직 여기 있다

by 맑을담

밤 열한 시,

거실 스탠드 조명 아래서

나는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다.


아내와 아이는 안방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여느 때처럼 조용히 소파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TV는 켜지 않았다.

바람 빠진 듯 조용한 공간에서,

나는 아내를 처음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다.


키가 크고,

웃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던 얼굴.
그녀는 내게 말없이 기대 오던 사람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잘 웃는 사람이다.
회사에서도, 동네에서도, 어디서든.


하지만 요즘은 웃음 뒤에

자꾸 어떤 공허함이 밀려왔다.
누군가 내 속을 알아채기라도 할까 봐,

더 많이 웃게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아내가 식탁에 앉았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물기를 닦고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마주 앉아 있었다.


“다이어트 해보려고.”


아내가 말했다.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다.
그 말은,

지금의 자신을 그대로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무리하지 마. 몸이 먼저야.”


내가 조심스레 말하자, 아내는 피식 웃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싶어서.”


그 말엔 자조와 슬픔,

그리고 아주 희미한 후회가 섞여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내는 임신 후 30킬로 넘게 살이 쪘고,

아이를 돌보며 자기 자신을 거의 지우다시피 했다.


나는 매주 주말에만 집에 오는 주말부부였고,
그 시간 동안 아내는 혼자서 아이를 안고 버텼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면 사람들은 말했다.
“와, 요즘은 남편들이 다 이렇게 해?

아내 복 터졌네.”


그 말이 마냥 기쁘진 않았다.
어떤 날은 오히려,

그 말 때문에 아내가 밉기도 했다.


나만 애쓰는 것 같았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기분에 더 외로워졌다.




그날 밤, 혼술을 하며 생각했다.


아내는 진짜로 나를 부러워했을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서로의 고생을 경쟁하듯

증명하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그 다음날 아침,

아내가 일찍 일어나 동네 공원에 나갔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했다.


그 뒤로 이틀에 한 번 정도,

아내는 조용히 나갔다 돌아왔다.


많이 걷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는 듯했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보려는 작은 몸짓 같아서.


안방 문을 살짝 열었다.
아내는 아이 옆에 누운 채,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녀의 발끝에 가볍게 이불을 덮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여전히 자주 싸운다.
말이 없는 날도 많다.


그런데 가끔,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 생겼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앉아 있는 날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것이면 충분하진 않지만,

어쩌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삶이란,

다시 사랑하지 않아도
조금은 덜 미워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웃는다.


이제는 조금 다른 이유로.
함께 견디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긴다.














[에필로그]


이 긴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잃고,

또 무언가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겠지요.


내가 아내를, 아내가 나를,

그리고 우리가 딸을 통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과정은,

꼭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테니까요.


때로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이고,

멀어진 듯한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또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 있다는 걸

저는 믿습니다.


당신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글을 덮고 난 후에도,

당신의 마음 한 켠에

조용히 머무는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만의 이야기에도

따뜻한 빛이 비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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