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는 맑고 가벼웠다.
어제 내리던 비가 머릿속에서 느리게 반복 재생됐다.
같은 우산 아래 서 있던 공기,
어깨와 어깨 사이의 한 뼘.
오늘은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바닥까지 흘러내렸고,
사무실은 어제의 잔상을 금세 지워버릴 듯 말끔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탕비실엔 물 끓는 소리와 종이컵이 맞부딪히는 소리만 남았다.
나는 습관처럼 설탕봉지를 두 번 접었다 펴고, 다시 접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바깥 복도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겹쳐졌다.
“○○씨, 다음 달에 그만둔다더라.
다른 데서 제안 받았다던데.”
말투는 가벼웠다.
공기에 흘려놓듯 던져진 소리였다.
스푼을 잡은 손끝이 멈췄다.
금속이 컵 벽을 스치며 낸 얇은 소리가 천장에 닿았다.
커피 표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잦아들었다.
그저 한 줄의 대화였는데,
그 말이 내 안에 아주 얇은 금속 조각처럼 박혔다.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화면을 켜니 밤새 온 메일이 빽빽했다.
커서를 문장 맨 앞에 올려두었지만
손가락은 몇 번 떠올랐다가 내려앉지 못했다.
‘다음 달’이라는 말이 굵은 활자처럼 머릿속에 눌러앉았다.
확인된 사실도, 공식 공지도 아니었다.
그저 흘러나온 말,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소문.
그뿐일 텐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 유리창에 구름이 얇게 비쳤다.
커서가 깜빡였다.
그 점멸이 심장의 박동과 맞지 않는 박자로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별일 아니다, 라고 속으로 굴려보았다.
그 말은 혀끝에서 금세 마르지 않았다.
오전 회의가 시작됐다.
의자들이 바닥을 긁고, 서류가 테이블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녀는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메모를 넘기는 손이 아주 조금 늦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았겠지만,
내게는 길게 늘어난 빈 칸처럼 느껴졌다.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흩어졌다.
문이 스스로 닫히듯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문밖에서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네, 알겠습니다.”
평범한 문장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종이 모서리를 한 번 더 눌러
모퉁이를 반듯하게 맞췄다.
점심시간, 엘리베이터 앞에는 사람이 많았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사이,
공기 안쪽에서 짧은 웃음이 터졌다가 금세 흩어졌다.
나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전광판 숫자가 오르내리는 동안,
‘다음 달’이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 두 단어는 단순한 시간표의 표시 같았지만,
내 안에서는 예정표 전체를 뒤집는 밑줄처럼 굵었다.
오후엔 몇 줄의 문장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몇 줄은 어딘가에 걸렸다.
가끔 그녀 자리에서 나는 마우스 클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내 키보드 소리가 겹칠 때마다
아주 얇은 비늘 같은 침묵이
둘 사이에 한 장씩 더 포개지는 느낌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사무실은 속도를 늦췄다.
프린터가 마지막으로 종이를 내보내고,
누군가는 가방 지퍼를 닫았다.
창가에 빛이 길게 걸터앉았다.
그녀 자리에서는 서류를 정리하는 부드러운 마찰음이 한 번 났다.
나는 모니터를 끄지 않았다.
꺼진 화면 속에 내 얼굴과 천장의 불빛이 겹쳐 있었다.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 작은 점 하나가 생긴 듯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퇴근 시간.
로비엔 저녁의 냄새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 공기가 드나들었다.
자동문 사이로 사람들이 얇은 선처럼 끊기고 이어졌다.
나는 벽에 기대 잠시 멈췄다.
낮에 들었던 말이 공기 속 먼지처럼
느리게 도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다.
소문은 늘 그렇게,
입과 입 사이에서 모양을 바꾸며 떠다닌다.
그럼에도 문장 하나가 마음을 건너가 버리면
돌아오는 길은 오래 걸린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밖으로 나섰다.
저녁빛이 낮은 구름 아래서 얇게 번졌다.
신호등 불빛이 젖은 도로에 길게 누웠다.
발걸음을 떼면서,
어제 우산 아래의 공기를 떠올렸다.
한 뼘의 거리, 말없이 나란히 걷던 리듬.
그 공기가 오늘의 한 문장과 겹쳐
마음 한가운데서 느리게 흔들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
창밖으로 어둠이 스며들었다.
반사된 내 얼굴이 한 겹 더 흐려졌다.
나는 휴대폰을 쥐고 몇 번이나 화면을 켰다 껐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무엇을 써야 할지,
무엇을 묻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코너를 돌았다.
어제 빗물이 고여 있던 자리엔 이제 자취가 없었다.
물은 금방 마른다.
하지만 파문이 사라졌다고 해서
물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스쳤다.
오늘의 한 문장이 남긴 흔적은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잔존할 것이다.
창문에 이마를 가볍게 기대었다.
온기가 얇게 전해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스스로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닐 수도 있다.
정말로, 별일이 아니길.
그러나 마음은,
그 말이 공기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묵묵히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