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자리, 같은 시간

by 맑을담

그녀의 이직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대신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안도감보다 허전함이 먼저 밀려왔다.
잃은 사람도 없는데, 이미 떠나버린 사람처럼 마음이 허전했다.

그녀는 늘 조용했다.
회의에서도 꼭 필요한 말만 했다.
말 대신 메모로, 감정 대신 이성으로 소통하는 사람.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벽이 있다”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벽이 싫지 않았다.
그 안에서 버티는 사람의 단단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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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녁, 프린터가 멈췄다.
“용지 걸렸나 봐요.”
그녀가 조용히 다가와 기계 옆에 섰다.

조심스러운 손끝이 서류를 곧게 펴서 넣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그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정하고 섬세한 손,
그 손끝에서 묘하게 평온한 기운이 흘렀다.

기계가 다시 돌아가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땐 세게 누르지 말고, 잠깐 기다려야 돼요.”

그 말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단순한 사용법처럼 들렸지만,
어쩐지 내 마음을 알고 한 말 같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 인사에 조금 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엔 내 책상 위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이 부분 수정하시면 문장이 더 자연스러워요.”

그 문장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업무 피드백이었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건넨 개인적인 온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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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복도에서 마주쳤다.
“회의 끝나고 힘드시죠?”
“그쪽도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녀의 얼굴에 번진 미묘한 웃음이 오래 남았다.
그 웃음은 ‘경계’보다는 ‘조심스러운 관심’에 가까웠다.

그녀는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표정의 결이 부드러워졌고,
눈길이 한순간 더 오래 머물렀다.
마치 그 거리의 온도를 스스로 조정하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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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침, 내 자리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뚜껑엔 작은 스마일 스티커.
그건 그녀였다.

“단 거 싫어하시죠?”
“네… 근데 오늘은 괜찮네요.”

그녀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전했다.

나는 그 커피를 들고 한참 앉아 있었다.
식어가는 커피 속에서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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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벽 같던 침묵은 사실,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는 소리였다.

그 문틈 사이로,
나는 그녀가 자신을 조금씩 허락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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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요즘 제 오피스 허즈번드 너무 바쁜 거 아니에요?”

농담처럼 던진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투엔 장난과 진심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녹아 있었는지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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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연애도, 우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묘하게 서로를 지탱해 주는 온기 같은 관계였다.

그녀는 여전히 단정했고,
나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커피 한 잔의 온도가
내 하루의 균형을 잡아주는 중심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그녀가 떠난 자리의 잔향 속에서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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